< 세계수 의회 >
마엘른은 추방자 신분이다.
따라서 세계수가 위치한 대수림으로 직접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선책을 취했다.
황금 평야로 진입했다.
대수림 바로 남쪽, 땅의 엘프들이 지배하는 곳.
비록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어 볼 수 없었지만, 기상이 좋을 때는 저 멀리 세계수가 보이기도 했다.
원형 문을 통과한 후, 마엘른이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이 향기…… 실로 오랜만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대수림으로 가면 되나요?”
“예. 대수림 최남단 시리앗실로 가는 게 우선입니다.”
지구에서 진작 편지를 보냈다.
마엘른의 인적 사항과 추방당한 경위에 대해 자세히 썼다. 아울러 미르 공격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쓰고, 미르 공격대가 얼마나 종족 연합을 위해 헌신했는지 역설했다.
세라프 종족에게도 지원을 부탁했다. 그간 만났던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추천서를 써달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받은 추천서만 10장이 넘었다. 특히 기대도 하지 않았던 튜니에가 친필로 추천서를 써줬다.
SUV를 타고 북상했다.
미드가르드 행성은 여전했다. 어딜 가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일행을 반겼다. 새와 동물들이 평화롭게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도로도 포장이 잘 되어 있어, 고속도로를 타듯 쌩쌩 내달렸다.
하루 만에 대수림 초입에 도착했다.
거대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시리앗실이다. 하지만 마엘른은 아직 대수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황금 평야의 도시에 마엘른을 놔두고, 다른 사람들만 시리앗실로 향했다.
숲 속 도로를 몇 시간 달리자 시리앗실에 도착했다.
종족 연합 최초로 왕급 기계 괴수를 사냥한 미르 공격대의 이름은 미드가르드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시리앗실의 영주에게 면담 요청을 넣자, 번갯불처럼 요청이 승인되었다.
[어서 오시오, 미르 공격대의 명성은 듣고 있었소.]
영주가 직접 일행을 맞이했다.
일행을 한 번 훑어보더니, 어째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동족도 미르 공격대 중추라고 들었소만, 동행하지 않은 거요?]
[마엘른 이사님 말씀이십니까? 마엘른 이사님은 황금 평야의 골로아 시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아직 대수림 진입 허가는 받지 못했으니까요.]
[아쉽소이다. 우리 종족이 배출한 최고의 영웅을 만나보나 했더니……]
영주는 세계수로 전갈을 넣었다.
이미 준비는 끝나 있었다.
세계수 의회에서 귀빈용 하늘 마차를 보냈다. 대수림 안에서만이 아닌, 미드가르드 행성 전체에서 운행 가능한 물건이었다.
마엘른이 이미 하늘 마차에 탄 상태였다. 남쪽의 골로아 시를 먼저 들렀다가 온 것이다.
SUV는 시리앗실에 놔두고, 하늘 마차를 타고 날아올랐다.
용이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 여기 와 본 것 같아!]
그럴 테지.
다름 아닌 SS급으로 진화했던 곳이니까.
용이가 북쪽을 쳐다보며 킁킁 댔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세계수의 영험한 기운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라오그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쥬페르 행성의 신계에 온 것 같아. 거기도 저런 기운이 가득 차 있거든.]
[그래요? 한 번 가보고 싶네요.]
[힘들 걸? 우리 행성 태생의 신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라서. 우리 행성 태생 아니면 애초에 입구로 접근도 못 해.]
[아쉽네요.]
하늘 마차는 빠르게 대수림의 하늘을 질주했다.
저 멀리 세계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둑한 세상 속,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대기가 청량해지며 어디선가 달짝지근한 향기가 풍겼다. 하늘 마차를 끄는 정령들이 신바람을 내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마엘른이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
엘프 어.
내내 그리워하던 곳을 눈앞에 두니, 한국어고 세라프 어고 다 잊어버렸나 보다.
한편으로는 반지 하나를 매만지고 있었다.
히메르아가 추방되는 마엘른을 걱정하여 수한을 통해 전달해달라고 했던 반지.
수한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마엘른의 심정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얼마 후, 세계수에 도착했다.
하늘 마차가 세계수의 밑동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수 안의 광대한 도시가 일행의 시야를 가득 매웠다.
세계수 의회는 세계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숲 엘프들은 의원내각제와 비슷한 정치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세계수 의회가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이고, 의회가 지명한 종신직 군주가 정부의 수반이 되는 것이다.
엘프들이 정중한 태도로 일행을 맞이했다.
[세계의 터전, 생명의 요람, 모든 엘프의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 여정에 고생하셨습니다. 편히 쉬세요. 세계수 의회에서 곧 여러분을 호출할 겁니다.]
여기까지 오자, 마엘른이 바짝 긴장을 했다.
크리맛실의 수호검으로 명성을 날릴 때도 세라프 의회에 출석한 적은 없었다. 히메르아만 호위해서 몇 번 와 본 게 전부였다.
수한이 친근하게 마엘른의 어깨를 툭 쳤다.
“긴장 푸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숲 엘프 중에 SS급 이능력자는 한 명 밖에 없다면서요? 반역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친족 살해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충분히 복권될 거라고 봅니다.”
시리앗실의 영주가 보인 반응만 봐도, 마엘른이 복권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잠시 후, 세계수 의회가 일행을 호출했다.
마엘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일행이 닦달한 다음에야 겨우 다리를 놀려 세계수 의회에 출석했다.
국회의사당을 연상시키는 반원형 공간.
고풍스러운 검을 찬 여성 엘프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숲 엘프 군주 틸리아.
몸은 가녀리지만, 그 정체는 SS급 거력 계열 이능력자였다. 마엘른처럼 숲의 검법을 극도로 익히기까지 해서, SS급 이능력자 중에서도 수위에 꼽혔다.
틸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옆을 가리켰다.
[지구의 미르 공격대 분들이지요? 이쪽에 앉으세요.]
틸리아가 앉은 높은 의자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격식을 차린 의자였다.
수한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엘프들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늘씬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눈에 호의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하나 보였다.
크리맛실의 영주 히메르아.
그녀가 할 말이 아주 많은 얼굴로 마엘른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엘른도 히메르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행이 착석을 하자, 틸리아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자, 회의를 재개하겠습니다.]
엘프들이 차례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마엘른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개중 신중론을 펴는 엘프도 있었지만, 최소한 마엘른을 복권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엘프는 없었다.
라오그뉴가 수한을 쿡 찔렀다.
[굳이 우리까지 올 필요도 없었겠는데?]
[예상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틸리아가 부드러운 얼굴로 마엘른을 바라보았다.
[수호검님, 뭔가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수호검이라는 호칭을 듣고, 수한은 일이 다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프들이 마엘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엘른이 촉촉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주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예.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마엘른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 동안, 수한과 눈이 마주쳤다.
마엘른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무한한 감사와 경애, 우정의 감정이 투명한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한도 가슴 한 편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새미는 어느새 손수건을 들고 눈가를 찍어냈다.
마엘른이 천천히 단상 앞으로 가서 섰다. 자신을 둘러싸고 앉은 엘프 의원들을 한 차례씩 본 후, 엘프 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뜻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연설에 담긴 감정만은 흠뻑 전해졌다.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과 절망이 절절이 묻어나왔다. 한편으로 고향에 돌아온데 대한 기쁨도 대기를 타고 날아와 수한의 마음을 적셨다.
엘프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히메르아를 시작으로, 단상 아래의 엘프들은 물론 틸리아까지 박수 세례를 보냈다.
틸리아가 손을 들었다.
[그럼 이번 안건에 대해 투표를 실시하겠습니다.]
엘프들이 자기 책상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틸리아의 뒤에 있는 벽에 등불이 켜졌다.
정확히 푸른 등불 1백 개.
만장일치로 마엘른을 복권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엘른이 의원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것으로 회의가 끝났다.
의회 밖으로 나오자,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마엘른 삼촌!]
뮤리아였다.
언제 왔는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엘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소리쳐 부른 것이다.
마엘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뮤리아!]
3년이 넘어서야 만난 숙질 사이였다.
마엘른이 뮤리아를 안아들었다. 어린아이 비행기 태우듯 높이 올리고 빙글빙글 돌렸다. 뮤리아는 마엘른의 애정 표현에 생경해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거의 성인처럼 보이는 뮤리아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니 좀 어색했다. 어린아이인 채로 오래 지내서 그게 더 편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히메르아도 다가왔다.
마엘른이 뮤리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히메르아가 마엘른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엘른,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응, 없어. 오히려 훨씬 더 강해졌지. 지금의 나라면, 여길 떠나기 전의 내가 100명이 덤벼도 이길 수 있을 걸?]
[너…… 좀 변한 것 같아.]
[하하, 그래?]
고향에 돌아와서일까.
아니면 지구에서 수한이 동생들과 지내는 것을 봐서일까.
히메르아와 뮤리아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엘프 모녀가 좀 어색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어린 게, 자기들을 친근하게 대하는 마엘른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히메르아를 따라 크리맛실로 갔다.
대규모 축제가 열렸다.
예전에 뮤리아를 반대했던 장로들은 모두 퇴출당했다. 동생을 추방해야 했던 히메르아가 악에 받쳐 그들을 처리한 것이다.
엘프식 축제는 좀 정적이었다. 달짝지근한 술과 새콤한 과일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하늘에 온갖 정령들이 돌아다녀 그게 볼 만 했다. 지구의 폭죽놀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면이라, 수한은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엘른이 옆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그간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했지요. 떠나시려는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사장님께 받은 은혜를 갚아야지요. 충분히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수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엘른은 미르 공격대의 SS급 이능력자 중에서도 강력한 축에 속했다. 지금 시점에서 마엘른이 빠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앞으로 왕급 기계 괴수를 최소한 아홉은 잡아야 하니까.
용이가 엘프들 사이를 달음박질 쳤다. 그 뒤를 뮤리아가 팔랑팔랑 쫓았다. 몸은 다 컸는데, 아직도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 있는 듯했다.
수한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당분간은 휴가를 드리겠습니다. 우리 공격대 연수까지 하면 두세 달은 가능할 겁니다. 다음 원정 행성으로 바로 합류하는 것으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남은 시간 동안은 축제를 즐겼다.
마엘른도, 히메르아도, 뮤리아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스스럼없는 미소가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수한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새미가 수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루비 아이를 잡길 잘 한 것 같아. 대한민국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네.”
“그러게. 다른 기계 괴수들도 잡으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겠지. 많은 병사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라오그뉴와 아르텔라도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라오그뉴는 어느새 용이와 어우러져 뛰놀았고, 아르텔라는 용이를 쳐다보며 경건한 자세로 술을 마셨다.
축제가 끝나고, 수한은 다른 이들과 함께 시리앗실을 찾았다. SUV를 되찾은 후, 세라프의 원형 문이 있는 히미앗실로 향했다.
지구로 돌아왔다.
별 일 없이 외계 행성 연수를 준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혀 뜻밖의 사건이 수한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