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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커맨더-218화 (219/254)

< 전함 임페리얼 -2- >

[조심하세요. 반물질 폭탄이에요. 불안정한 상태여서 접촉하기만 해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어요.]

[알았어. 어디로 가야 하지?]

[이쪽이에요.]

여자아이가 수한을 인도했다.

수한은 잔해를 조심조심 지나쳤다. 못 피할 것 같으면 신발의 기능을 이용해 공간을 도약했다. 그렇게 격납고를 지나자 긴 복도가 나왔다.

지구 배의 복도와 비슷했다. 철로 된 복도가 쭉 이어져 있었다. 역시나 생명 유지 장치는 망가진 상태여서, 허공을 유영하듯 쭉 나아갔다. 중력이 미약한 곳이라 달린다기 보단 날아가는 듯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격벽이 하나 나왔다.

여자아이가 손을 뻗어 수한을 제지했다.

[저곳만 통과하면 생명 유지 장치가 작동하는 곳이 나와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함장님 신분을 각인시키고, 문을 열도록 할게요.]

[그래. 빨리 해.]

곧 격벽이 열렸다.

밝은 복도가 나타났다.

함선의 기능이 살아있는 듯했다. 조명이 밝게 빛났다. 아울러 방어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광선총 더미. 소형 광선포. 각종 특수탄이 장착된 기관포.

제국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양식이었다.

[가자.]

수한은 바닥을 박찼다.

굳이 걸어가며 늦게 갈 생각이 없었다. 상당히 속력을 냈다. 일정 거리마다 격벽이 내려와 있었지만, 수한의 신분이 인증 되자 접근할 때마다 빠르게 열렸다.

함교까지 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격벽이 열렸다.

안쪽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공간 곳곳에 은빛 의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벽면은 대패로 민 듯이 매끈하고, 천장에서는 흐릿한 조명이 빛을 뿌렸다.

허공에는 공기 방울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 안에 제국인들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체들.

겉으로 보기에는 지구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목구비가 좀 이질적이긴 하지만, 인종 간 차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체들은 왼쪽 손목에 하나 같이 은빛 팔찌를 차고 있었다. 팔찌 표면에는 몇 개의 글자들이 떠오른 채 깜빡거렸다.

일종의 레벨 업 도우미로 보였다.

수한이 그들을 둘러보는 사이, 여자아이가 허공에 손짓을 했다.

우우웅.

뭔가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함교 인근의 동력부가 깨어나는 것이다.

여자아이가 수한을 돌아보았다.

[함장님. 전함 임페리얼을 재기동하고자 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내 명령 없이는 재기동할 수 없는 거냐?”

[전함의 재기동은 인공지능이 임의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함장님의 명령이 필요합니다.]

“알겠다. 그런데 난 아직 임시 함장이라고 했지?”

[예. 정식 함장으로 취임하는 것은 오로지 우주 연방 은하 의회의 추인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구축함이나 순양함도 아니고, 결전 병기니까요.]

“흠, 그렇다면 임시 함장과 정식 함장의 차이는 뭐지?”

[전함에 대한 권한에 차이가 있습니다.]

겨우 글자 둘 차이지만,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정식 함장이라면 임페리얼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 그 권한은 실로 막강해서, 우주 연방에게 반역을 저지르는 것도 가능했다.

반면 임시 함장은 함장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임페리얼의 주포를 쏘는 것도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임페리얼의 유지 보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여러 기술을 이전 받는다거나, 인공위성을 쏘고 안드로이드 병사를 제공 받는 것 정도는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

“다른 조건은 없어?”

[몇 가지 있습니다. 최소한 이터누스 종족의 병사와 1대 1로 싸울 정도로 강한 초능력자여야 하고, 우주 연방군 소속이어야 합니다. 연방군 계급이 사령관 이상이면서, 출신 행성이 우주 연방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고요. 제가 아까 조사한 바로는, 함장님께서 대부분의 조건을 충족하고 계셨습니다.]

“그래?”

인공지능이 혼란스러워 하는 게 느껴졌다.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니 수한의 레벨 업 도우미를 우주 연방군의 초능력 진화기로 판단한 듯했다.

하긴 체계는 같다.

반면 훨씬 더 발전한 형태이니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수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손짓을 했다.

홀로그램이 그 손짓에 따라 일어났다. 주위 경관을 비춘 뒤, 인근의 지구를 크게 확대시켰다.

“너, 이름이 뭐야?”

[전 함장님께서 미네르바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래? 나도 미네르바라고 부를게. 미네르바, 저 별이 무슨 별인 것 같아?”

[함장님의 초능력 진화기에서 읽은 정보로는, 지구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붙을 정도로 제 기억장치 속 지구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흡사한 행성이 아냐. 지구가 맞아.”

[예?]

“인류의 고향, 태양계의 3번째 행성이라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구는 이터누스 종족의 공격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래, 쉽게 이해하긴 힘들겠지.”

수한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전함 임페리얼이 참가한 마지막 전투에서, 세라프 종족은 최후의 수단으로 시공 회귀를 시도했다. 그 결과 우주 전체의 시간이 강제로 되돌려지며, 세라프 종족은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갔다.

세라프 종족의 우주 지배는 없던 것이 되었다. 자연히 지구가 파괴된 사실도 사라졌다. 여전히 우주의 푸른 별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격렬히 반응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태양계를 한 번 봐. 태양,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모두 네 정보와 일치할 텐데? 내가 기억하는 지구 역사라도 보여줄까?”

미네르바가 불안한 눈빛을 흘렸다.

임페리얼의 탐지 장치를 이용하여 태양계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더니 혼란을 느끼는지 여자아이 영상이 간섭파라도 맞은 것처럼 계속 흔들렸다.

인공지능치고는 사람과 비슷했다.

수한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말하는 우주 연방은 이 우주에는 없어. 이터누스 종족도 없지.”

[이터누스 종족이 없다고요?]

“그래. 시공 회귀한 뒤, 이터누스 종족은 더 이상 이터누스 종족이 아니게 됐어. 종족 전체가 불임이 되었거든. 지금은 인공 수정과 인공 자궁을 이용해 인구를 늘리고 있어. 이름도 세라프 종족이라고 바꾸었지.”

[고자가 되었다는 말씀이죠? 그 사악한 종족에게 어울리는 최후입니다.]

미네르바가 이를 바득 갈았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덕분에 예전의 그 지배적인 위치도 잃어 버렸지. 우주로 진출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있어. 차원문을 이용해서 각 행성으로 이동하는 게 고작이야.”

[사악한 이터누스 종족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 없습니다. 혹시 지구가 이터누스 종족의 식민지가 된 겁니까? 복원된 지구를 그렇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인류의 고향을 저들의 손에서 탈환해야 합니다!]

“그런 거 아냐. 뭐, 상태는 더 심각하긴 하다만……”

[심각하다니요?]

수한은 제국의 존재에 대해 털어놓았다.

2004년 있었던 대전쟁.

지구 인구의 1/3이 죽고, 언젠가 수확을 통해 지구 전체가 다시 공격 받을 거라고 하자 미네르바가 눈에 띄게 흥분했다.

미네르바는 인류 수호와 우주 연방의 방위를 위해 탄생한 인공지능.

지구에 수확이 닥치거나 대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기필코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그 제국이라는 것은 이터누스 종족이 만든 걸 겁니다. 과거 벌였던 만행보다 훨씬 더 사악한 짓을 하고 있네요. 놈들의 본성에 주포를 먹여줘야 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시공 회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수한은 쓴 웃음을 지었다.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긴 미네르바는 탄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터누스 종족을 상대로 기나긴 전쟁을 치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한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세라프 종족은 그럴 가능성이 없어.”

[함장님께서 그들에게 속으신 겁니다.]

“아냐. 제국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어.”

[함장님께서 파악한 제국의 정체가 뭡니까?]

“미래의 지구야.”

[예?]

수한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미네르바는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래의 존재가 어떻게 시간을 넘어 현재의 지구를 공격하느냐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을 공격하는 꼴이고, 그로 인해 제국의 존립도 위태로워 질 텐데.

“내가 알기로는 제국은 시공 분열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만든다고 해. 일종의 평행 차원이지. 그들의 차원은 시공 요새를 통해 보호하고, 그렇게 만들어낸 차원을 목장처럼 육성하는 것 같아. 세라프 종족과 여러 종족을 강하게 만든 뒤, 그들을 수확해서 뭔가를 얻는 거지. 뭘 얻는 건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어.”

[힘의 근원 흡수……]

“응? 뭐라고?”

[아, 아닙니다.]

미네르바는 말을 얼버무렸다.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우주 연방 시절에 그와 비슷한 게 있었나 보다.

“말해 봐. 난 네 함장이야. 말할 수 없는 거야?”

미네르바는 망설이다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초능력 진화기는 강제로 주인의 초능력을 진화시키는 물건입니다. 처음에는 본인의 경험을 초능력으로 변환해주는 수준에서 그쳤지요. 그게 개량되면서, 초능력자의 영혼을 가공해서 뽑아낸 힘의 근원을 흡수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우주 연방도 그런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세력을 불렸다는 거야?”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함장님께서 생각하신 것처럼 초능력자들을 기른 후 영혼을 가공하는 것은 우주 연방의 기본 정신인 자유와 평등, 인권에 어긋납니다. 결국 의회에서 기술을 봉인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

입맛이 썼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는 결국 힘의 근원 흡수 기술을 부활시킨 모양이다. 수한도 힘의 결정을 흡수해서 재미를 많이 보지 않았나.

우주 연방 시절에도 초능력자 1명으로 힘의 근원 10개는 너끈히 뽑아낸다고 했다. 제국은 그보다 더 발전했을 테니, 수십 수백 개는 충분하겠지.

수한은 미네르바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믿을 수 있겠어?”

[믿을 수 없습니다. 함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제국은 우주 연방의 후신 격입니다. 그런데 그런 집단이 그토록 사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째서 불가능하지?”

[우주 연방은 자유와 평등, 인권을 기본 정신으로 삼고, 인류를 수호하며 우주의 모든 지성 종족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우주 연방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그런 짓을 벌일 리가 없습니다.]

“하, 농담하는 거야?”

수한은 비웃음을 날렸다.

자유, 평등, 인권?

이미 익숙한 개념이다. 지구의 많은 선진국들이 주창했고, 지구 전체에 퍼뜨렸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선량한 국가였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문명의 탈을 뒤집어쓰고 온갖 야만적인 짓거리를 다 벌였다. 오히려 그들이 주장하는 미개한 나라보다 더욱 잔인할 때도 많았다.

수한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 않다고 믿었다.

악에 더 가깝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주 연방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미네르바는 우주 연방이 선한 곳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터누스 종족과 대비되는 효과를 받아서 그럴 것이다.

실상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주 연방도 만만치는 않겠지.

“넌 그럴 수도 있겠지. 인공지능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아냐. 개인은 몰라도 집단은 반드시 이기적인 종족이잖아. 우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때, 과연 어떤 만행을 저지를지 상상도 되지 않아.”

미네르바는 침묵을 지켰다.

몇 번 말을 붙여 보았지만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나는 이 세상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다른 차원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제국을 무너뜨리려고 해. 거기에 네가 협력했으면 좋겠다.”

[제국을 무너뜨린다고요?]

“그래. 네 세계의 우주 연방은 희망과 평화를 위해 싸웠는지 몰라도 우리 세계의 제국은 거대한 악, 그 자체야.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희망은 없어. 네가 돕는다면 제국을 부수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가능할 거야.”

언젠가 클로아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시공 분열에 의한 새로운 차원 생성에 뭔가 제약이 있는 것 같다고. 제국에 맞서 싸우려면 그 제약을 알아내야 할 거라던가.

어쩌면 미네르바를 통해 그걸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함장님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장고 끝에, 미네르바가 수한의 제의를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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