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 도약기 >
제국의 보안은 정말로 철통같았다.
질라 행성에서 금속 구를 얻어오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금속 구의 컴퓨터를 해킹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한이 레벨 업 도우미를 이용해도 마찬가지.
세라프 종족을 통해 가끔 연구 결과를 듣곤 했다. 금속 구의 원래 이름은 개인용 차원 도약기이고, 좌표만 알면 우주 어느 곳이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던가.
하지만 세라프 종족도 알아낸 것은 적었다. 잘못 해킹하다가 금속 구 하나가 폭발해 버린 뒤 연구 속도도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던 차에 비슷하게 생긴 금속 구를 발견했으니 아예 가져온 것이다. 미네르바의 도움을 받으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한은 미네르바에게 금속 구의 분석을 맡겼다.
미네르바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분석하기 힘들겠습니다.]
“보안이 그렇게 강해?”
[제가 알지 못하는 기술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이건 저 혼자 파헤치는 게 불가능합니다. 전함 임페리얼 수리에 제 능력을 할애해야 하니까 더 그렇고요.]
“그래? 그럼 외부 도움을 받아야겠네.”
사실 수한도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우주 연방의 기술과 제국의 기술 사이에는 아득한 격차가 존재하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세라프 종족이 합쳐지면 어떨까?
비록 기술로는 미네르바만 못하겠지만, 세라프 종족에게는 Ex급 이능력자가 있었다. 최고 의원 중 하나가 정신 계열 이능력자이니, 둘이 합쳐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일단 지구로 돌아갔다.
이동은 원형 문으로 했다. 처음 가져왔던 기계용을 이용해 원형 문을 만든 것이다. 전함 임페리얼의 격납고와 이어진 곳에 만들었으니, 나중에 수리에 필요한 각종 재료를 가져오기도 편할 터였다.
승무원이 된 이들에게는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오늘 일은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아셨지요?”
“걱정 마십시오.”
“용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내가 애야? 걱정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우리만 믿어!]
지구로 돌아온 후, 수한은 헤븐 행성을 방문할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미네르바가 수리에 필요한 재료의 목록을 뽑아 보여주었다.
많긴 많았다.
기계 괴수로 따지면 100마리는 족히 필요했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굳이 대형, 거대 기계 괴수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소형 기계 괴수의 부품으로도 충분했다. 더구나 동력핵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수한은 임페리얼의 업그레이드를 제안했다.
“임페리얼을 더 강화시키는 건 어때? 그냥 수리만 하면 아쉽잖아. 우리 공격대가 보유하고 있는 게 꽤 많으니까, 그걸 조합하면 괜찮은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관련 기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용이에게 받으면 될 거야. 용신들이 모은 기술을 다 가지고 있거든. 우리 공격대 컴퓨터도 좀 참고하고.”
[고려해보겠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동안 모았던 기계 괴수 전리품을 대부분 팔아치운 다음이라는 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전체 수리를 시작했을 텐데.
뭐, 상관없는 일이다.
수한도 레벨을 올릴 겸 당분간 원정을 많이 다녀야 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계 괴수 부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사용하면 임페리얼을 금방 수리하겠지.
간부 회의를 열어 공격대의 주요 임원과 간부들에게 임페리얼의 존재에 대해 알렸다. 당분간 공격대의 최우선 목표를 임페리얼 수리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백기수 이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그럼 외계 행성 연수는 어떻게 됩니까?”
일반 사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절호의 기회라, 설마 취소되는 건가 싶었나 보다.
수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예정대로 시행합니다. 그냥 수리만 할 건 아니어서 준비 기간이 좀 필요하니까요. 대신 연수 다녀온 다음에는 또 강행군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휴가 갔다 오면 일이 밀려 있는 법이죠!”
백기수 이사만이 아니라 다른 간부들도 반색했다.
그들도 속으로는 외계 행성 연수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한은 그저 웃고 말았다.
다른 이들은 지구에 놔두고, 수한만 단출하게 헤븐 행성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용이와 미네르바만 따라왔다.
미네르바는 본체와 떨어지는 격이지만 괜찮다고 했다. 수한에게 줬던 팔찌가 일종의 분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지구에 있을 때보다는 못해도 중요한 기능은 대부분 수행할 수 있었다.
용갑을 입은 채 원형 문을 통과했다.
편지 하나 보내지 못한 채 방문한 참이었다. 마니엘라에게 받았던 반지가 없었다면 애초에 헤븐 행성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수한은 원형 접시를 타고 청옥 도시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학술원.
제국인의 금속 구를 그곳에서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한이 학술원에 방문하여 튜니에와 면담을 요청하자, 학술원에서 수한을 안내하곤 했던 렌느가 나와 수한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의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튜니에님은 바쁘십니까?]
[기계용을 돌보고 계세요. 아무도 출입하지 말라는 명을 내려놓으셨는데…… 중요한 일인가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제국을 상대할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전해주세요.]
[제국을 상대할 방법이라고요?]
수한의 말에 렌느가 눈을 치켜떴다.
그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학술원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수한은 응접실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엘프 차를 마시다 보니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익숙한 존재감. 수한의 발밑에 엎드려 있던 용이가 고개를 들더니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 엄마다!]
튜니에를 엄마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
문이 열리며 튜니에가 들어왔다. 뭘 하다 왔는지 옷매무새가 좀 흐트러져 있었다. 항상 담담하고 침착하던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튜니에는 들어오자마자 수한에게 급히 다가왔다.
[제국을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고요?]
[확실하진 않습니다.]
수한은 자신의 최근 기억을 몽땅 튜니에에게 투사했다.
튜니에는 처음에는 멈칫했지만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마음의 장벽을 풀고 수한의 기억을 받아들었다.
북한산에 떨어진 운석, 금속 구, 전함 임페리얼, 인공지능 미네르바……
그리고 수한이 운명의 눈으로 봤던 장면까지.
튜니에가 수한의 어깨에 앉은 미네르바를 반히 쳐다보았다.
[이 아이가 미네르바인가요?]
[맞습니다.]
[옛 제국, 아니 우주 연방이라…… 맞아요. 잊힌 도서관에서 그런 기록을 본 기억이 나요. 당시 우리 종족을 압박했던 전함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전함이었다고 했어요.]
미네르바는 튜니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한 게 있는데, 너희 정말 이터누스 종족 맞아?]
[네?]
[내가 아는 이터누스 종족은 이렇지 않았어. 생김새는 비슷한데, 꼭 다른 종족 같아. 초능력도 훨씬 강해지고 풍기는 분위기가 아예 다른 걸?]
그래서 지금껏 말이 없었나 보다.
헤븐 행성에 오면 뭐라고 쫑알쫑알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튜니에가 쓰게 웃었다.
[이터누스가 우리 종족의 옛 이름이었나 보죠? 그럴 만도 합니다. 시공 회귀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으니까요. 잊힌 도서관의 기록을 보면, 과연 이게 우리 종족이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하도 충격적인 기록이 많아서, 우리도 성인들에게만 기록 열람을 허가하고 있지요.]
[흐응.]
미네르바가 묘한 콧소리를 냈다.
탐색하듯 튜니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튜니에도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수한은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미네르바는 제국의 전신인 우주 연방의 인공지능이고, 세라프 종족에는 Ex급 정신 계열 이능을 가진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둘이 협력하면 금속 구의 정보를 분석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능한 이야기네요. 기왕이면 투시 계열 이능력자도 참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금속 구의 보안을 뚫기가 더 쉬울 테니까요.]
[아, 그렇겠습니다.]
[천공 관조자와 의식 군주에게는 제가 말을 해두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제국의 보안을 뚫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튜니에가 눈을 감았다.
정신 계열 이능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다행히 얘기는 잘 진행되었다. 두 세라프가 학술원으로 와서, 보관 중인 금속 구를 함께 조사하기로 했다.
금속 구가 보관되어 있는 곳은 학술원 지하.
세라프들이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적색 검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환수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미네르바가 그들을 보고 생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합니다. 이터누스 종족이 동물을 기르다니……]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지?”
[이터누스 종족은 오로지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로 만물을 판별했습니다. 생명의 존엄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 행성에 도착하면서부터 뭔가 이질적이라고 느꼈는데, 이런 차이가 있었네요.]
“그래?”
말하는 것을 보니 세라프 종족과 잘 지낼 듯했다.
이터누스 종족과 세라프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모양.
물론 세라프 종족이 한때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추악한 과거는 원죄처럼 세라프 종족을 언제까지고 쫓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심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우주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금속 구로 다가갔다.
거대한 공동에 금속 구 2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온갖 방어 마법진과 감시 마법진이 금속 구를 싸맸다. 공동에는 꽤 많은 세라프들이 오가며 금속 구를 살피는 중이었다.
반가운 얼굴도 보였다.
마니엘라.
세 최고 의원 세라프에게 인사를 하는 한편, 수한에게도 부드럽게 눈인사를 보냈다. 수한도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수한은 무한 의식으로 해킹에 참가할 이들의 정신을 모두 묶었다. 의식 군주 라이니엘도 가능한 일이지만, 해킹에 전념하라고 보조해주는 것이다.
천공 관조자 헤라가 자신의 이능을 발현했다.
Ex급 투시 계열 이능.
금속 구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구성 요소, 내부 구조는 물론 컴퓨터의 시스템까지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잠깐만요!]
미네르바가 제지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외부에서 들여다보면 바로 방어 기제가 작동한다고요. 해킹 시도가 가해지는 즉시 자폭 명령이 내려집니다.]
[아, 그래서……]
수한도 납득했다.
저번에 세라프 종족이 금속 구 하나를 터뜨려 먹었다더니, 그게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미네르바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래도 저 분의 불멸 능력 덕분에 대충 구조는 알았어요. 잘 하면 해킹이 가능할 것 같아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네가 이 금속 구를 조사하는데 열쇠가 되겠구나. 내가 뭘 해야 할지 알려다오. 네 말에 따르도록 하겠다.]
라이니엘이 고상한 어조로 말했다.
미네르바는 라이니엘과 헤라를 보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이터누스 종족과 힘을 합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잘 해보도록 하죠.]
[좋다. 잘 해보자.]
셋은 신중하게 금속 구를 조사했다.
보안 시스템의 기본 구조는 우주 연방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덕분에 미네르바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미네르바가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하게 지시했다. 그 지시에 따라 라이니엘이 하나둘 방어막을 벗겨 나갔다. 좀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헤라가 과감하게 투시 계열 이능을 썼다.
지난하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셋이 힘을 합쳤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흘 밤낮을 꼬박 해킹에 매달렸는데도 반의 반 밖에 작업이 진척되지 않았다.
그래도 모두 얼굴이 밝았다.
[효과가 있습니다.]
[같은 시간대 차원 내는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것 같구나.]
[그나마 다른 시간대 차원 이동은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뭔가 특별한 구조물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작업하면 되겠어요.]
수한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셈해 보았다.
약 열흘 정도는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작업을 끝내자마자 미르 공격대의 외계 행성 연수를 시작할 때가 오는 것이다.
렌느에게 슬쩍 부탁을 했다.
조만간 자신의 공격대 소속 수천 명이 연수를 올 텐데, 편의를 좀 봐달라고 한 것이다.
[그래요? 알겠어요. 날개 요새 사령관님께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렌느는 어려울 것 없다고 수락을 했다.
덕분에 수한은 조사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라프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피로는 이능으로 풀면서 셋의 정신을 연결하는데 주력했다.
헤븐 행성에 도착한지 13일째가 되었다.
드디어 모든 작업이 끝났다.
라이니엘이 기지개를 폈다.
[으으, 힘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하네. 보안 체계가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어.]
[이제 어떤 체계인지 알았으니, 다른 것을 해킹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차원 도약기의 보안은 기계 괴수들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계 괴수는 수한이 용이의 정보를 준 뒤 진작 해킹이 가능해졌지만, 차원 도약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차원 도약기에 아주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제국의 거점 좌표.
현재 수한이 사는 시간대 차원을 총괄하는 차원 요새가 위치한 곳이다. 오직 그 차원 요새를 통해서 다른 시간대 차원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수한은 그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제국의 본성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그렇지요.]
다들 같은 생각을 했다.
무한 의식으로 연결된 그들의 두뇌가, 순식간에 한 가지 계획을 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