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22화 (223/254)

< 싹쓸이 >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다음 목표는 그랑가크입니다.”

그랑가크.

자미르 행성 언어로 무서운 불이라는 뜻이었다.

루비 아이가 눈에서 광선 공격을 한다면, 그랑가크는 전신에서 불을 뿜었다. 그 불꽃이 둥글게 뭉쳐 주변의 모든 것을 불살랐다.

일격의 파괴력은 루비 아이가 앞섰다. 하지만 난투전은 그랑가크가 훨씬 더 뛰어났다. 전투 내내 불꽃을 사방으로 날리기 때문이었다.

“그랑가크 다음에는 주디크를 잡겠습니다.”

주디크도 역시 왕급 기계 괴수였다.

이 녀석은 어둠 침식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파괴력은 그냥 그런데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게 특징적이었다. 방어막 따위 그냥 통과해버리며 타격하는 것이다.

수한은 왕급 기계 괴수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정확히 11마리.

현재 알려진 모든 기계 괴수였다.

기가 죽을 만도 하지만, 미르 공격대 간부들은 오히려 전의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루비 아이를 잡았으니 다음은 그랑가크죠!”

“이제 대형이나 거대 기계 괴수를 잡아가지고는 수지가 안 맞는다고요!”

“얼른 그랑가크 잡고 성과급 받읍시다.”

오늘은 목요일.

주말은 쉬고 월요일부터는 출근하라고 했다. 최대한 빨리 원정 계획을 짜서 자미르 행성으로 가자는 거였다.

간부들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는 밤을 거의 다 샌 다음에야 끝이 났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지구로 귀환했다.

일단 공격대 사옥으로 가서 해산식을 가졌다. 혹시나 싶어 일일이 숫자를 세어 보았는데, 낙오한 사람들은 없었다.

해산식 후, 사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흩어졌다.

저마다 두 손 무겁게 뭔가를 들고 있었다. 쇼핑을 알차게 한 모양이었다.

[잘 있었어?]

“물론이지요. 라오그뉴님 얼굴도 좋아 보입니다.”

[신계가 좋긴 좋더라. 오랜만에 늘어지게 낮잠 좀 자고 왔지 뭘.]

“마엘른님도 얼굴이 피셨네요. 가족들이랑 잘 지내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휴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기회가 있을 겁니다.”

차곡차곡 준비를 해나갔다.

이번에는 외부 인사의 도움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용기사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이능력자의 수로만 따지면 SSS급 3명, SS급 7명, S급이 30명이다. 조금 모자란 듯도 싶지만, 용기사를 감안하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2주가 지난 후, 자미르 행성으로 출발했다.

루비 아이가 있던 가브낙 행성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세라프 종족은 행성 구석에 그랑가크를 몰아넣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철통 같이 지켰다.

미르 공격대만으로 그랑가크를 습격했다.

격전이 벌어졌다.

수한은 용기사를 앞세워 일선에서 싸웠다. 조합 기술을 사용해서 혼을 빼놓으며 격렬히 공격했다.

라오그뉴가 그랑가크의 배후를 노렸다. 아르텔라는 용을 소환하여 그랑가크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새미가 떨구는 벼락이 연속으로 그랑가크를 직격했다. 마엘른이 휘두르는 검에 그랑가크의 금속 장갑이 쩍쩍 벌어졌다.

변이체들도 활약을 했다.

SS급 변이체들. 그랑가크의 불꽃에만 맞지 않으면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무시해 버렸다. 부상을 입어도 그랑가크의 금속 장갑을 씹어 먹어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지구인 SS급 이능력자도, 쥬페르 행성의 형제신도 빠진 참이지만 전력은 그때보다 오히려 강해져 있었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인간형으로 변형했다. 그리고 전신에서 불꽃을 뿜으며 마구 돌격해 왔다.

라오그뉴가 앞을 막았다가 한 번 얻어맞고는 질겁해서 도망쳤다. 불꽃이 라오그뉴를 뒤덮자, 온 몸의 털이 홀라당 타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용기사로는 막을 수가 있었다.

루비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두 손에서 나오는 광선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둘을 합쳐 전면을 완전히 가리자 불꽃이 덮쳐 와도 몽땅 튕겨내 버렸다.

용기사의 분전에 힘입어, 종국에는 그랑가크를 거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만세!”

“이겼다!”

원정에 참가한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번에도 사망한 이들은 없었다. 다친 사람은 제법 되었지만, 그 정도야 라오그뉴가 자기 능력을 한 번 발휘하면 다 나아 버린다.

수한은 레벨 업 도우미를 확인했다.

역시 왕급 기계 괴수는 좋은 경험치원이었다. 한 번 전투로 레벨이 20이나 올랐다.

능력치는 따로 오른 게 없어도 기갑 격투는 1이 올랐다. 레벨 업 도우미를 흡수하면서 모든 능력치가 1씩 오르고 초능 점수는 10점을 받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수한은 쓰러진 그랑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걸 그냥 지구로 보내 팔아먹기는 좀 아쉽다.

무엇보다도 불꽃 공격이 상당히 탐이 났다. 장거리 포격에는 마땅치 않지만, 근접전에서는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즉석에서 용기사를 개조했다.

그랑가크의 무기를 용기사의 어깨에 장착한 것이다.

시험적으로 사용해보니 루비 아이의 광선 무기와 그랑가크의 화염 무기를 동시에 쓸 수가 있었다. 같이 쓰면 출력이 좀 낮아지긴 하는데, 아주 미약한 수준이라 무시해도 좋을 듯했다.

새미가 강해진 용기사를 보더니 한 마디를 했다.

“그러고 보니까 왕급 기계 괴수마다 무기가 다르지 않아? 그거 다 장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겠지만 잘 될지 모르겠어. 동력핵 한 개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한 개로 안 되면 두 개, 세 개 달면 되지 않아?”

“아하, 컴퓨터 CPU에 칩 여러 개 다는 것처럼?”

“응.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혹시 안 되는 이유 있어? 기계 괴수들도 하나만 달고 있는 게 이상하던데.”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다. 지금은 괜찮으니까 놔두고, 나중에 용기사에 과부하가 걸리면 그때 해봐야겠어.”

“그렇게 해, 오빠.”

용이의 제어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Ex급이 된 뒤로 어지간한 일은 척척 해내고 있지만, 수한이 보기에는 왕급 무기 네댓 개를 장비하는 게 최선이었다.

용기사가 강해지자 원정이 더욱 쉬워졌다.

자미르 행성을 이리저리 쓸고 다녔다. 기계 괴수만 보였다 하면 급강하하여 가슴을 쪼갰다. 동력핵을 꺼낸 뒤, 용기사에 덧붙여서 원형 문을 통해 지구로 보냈다.

덕분에 원정이 빨리 끝났다.

겨우 3주 만에 자미르 행성의 모든 기계 괴수를 사냥하는데 성공했다.

원정에 성공하고도 모두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3주면 일반적인 변이체 사냥에 소요되는 시간이었다. 그냥 기계 괴수도 아니고, 왕급 기계 괴수 1마리에 행성 하나를 송두리째 누볐는데도 이렇게 짧은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새미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 공격대가 강해지긴 강해졌구나……”

“벌써 왕급 기계 괴수를 두 마리나 잡았잖아. 다른 공격대에게는 왕급 기계 괴수가 잡힌 사례가 없어. 이 정도면 전 차원계 최고의 공격대라고 할 만 하지.”

“호호, 그건 그래.”

새미가 시원하게 웃었다.

이번에 얻은 기계 괴수 시체들은 미르 공격대에서 쓸 생각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전함 임페리얼을 강화시키는데 사용하려는 것이다.

정산금을 줘야 하니 일부는 팔아야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형이나 거대 기계 괴수들은 덩치가 무척 크니까.

지구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미르 공격대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수한은 최대한 빠르게 원정을 재개했다. 주디크가 있는 강카 행성을 향해서였다. 이번에도 주디크는 물론 강카 행성 내의 기계 괴수란 기계 괴수를 몽땅 쓸어 담았다.

그러는 한편 미르 공격대의 덩치를 꾸준히 불렸다. 지원 요원은 물론, 이능력자도 많이 확충했다. 지금은 수한이 참가하지 않는 일상적인 원정에서도 매출이 많이 발생했다.

레벨도 쑥쑥 오르고, 임페리얼도 거의 수리를 끝냈다. 지금은 수한이 권한 대로 이곳저곳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2019년이 어느새 멀찍이 달아났다.

2020년.

수한은 가혹할 정도로 사원들을 몰아쳤다. 한편에서는 앓는 소리가 나오고, 실제로 몇몇이 과도한 업무로 퇴사하기까지 했다.

백기수 이사가 수한을 찾아왔다.

“사장님, 조금 쉬엄쉬엄 원정을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규모 원정을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습니다. 전함 임페리얼도 그렇습니다. 당장 어떻게 써먹을 수도 없는데 너무 많은 자원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공격대 매출은 높은데, 요즘은 영업이익이 너무 적습니다.”

수한은 잠시 말을 아꼈다.

지금은 돈을 벌려고 원정을 나가는 게 아니었다.

다가올 차원 요새 공략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를 강화하고자 원정을 나가는 거였다. 더불어 미르 공격대의 전력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이유도 컸고.

수한이 묵묵히 침묵만 지키자, 새미가 수한을 보며 말했다.

“오빠, 우리 공격대 주요 임원들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혼자서는 제국을 상대할 수가 없잖아.”

“하긴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수한은 얼굴을 굳히고 기수를 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수의 얼굴도 딱딱해졌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 기수에게 다짐을 주었다.

“백 이사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특급 기밀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걱정 마십시오. 제 입은 무척 무겁습니다.”

“좋습니다. 백 이사님을 믿겠습니다.”

수한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중요하게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수확과 차원 요새 공략 작전에 대한 것이었다.

이 세계 전체가 실은 제국의 목장에 불과하다는 내용.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기계용 군단과 전함 임페리얼, 그리고 종족 연합의 주요 이능력자들과 함께 제국의 차원 요새를 공격한다.

기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사실입니까?”

“예. 세라프 종족은 1년 기한을 두었습니다.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허어…… 그래서 원정을 서두시는 겁니까? SSS급 힘의 결정 때문에?”

“그런 셈입니다.”

그랑가크를 비롯한 왕급 기계 괴수의 동력핵에서는 100% SSS급 힘의 결정이 나왔다.

사실 Ex급 힘의 결정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 미르 공격대에는 SSS급 힘의 결정이 꼭 4개가 있었다. 그랑가크와 주디크 말고 거대 기계 괴수 동력핵에서도 SSS급 힘의 결정이 가끔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루비 아이의 동력핵은 용기사 안에 있으니 쓸 수가 없었고.

기수가 신음하듯 몇 마디를 내뱉었다.

“이거 널리 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민 중입니다. 차원 요새 공략은 몰라도 수확에 대해서는 알려 봤자 혼란만 생길 것 같아서요. 게다가 지구에서 제국에게 반항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우리 공격대 밖에 없어요.”

“휴, 알겠습니다. 일반 사원들에게는 알릴 수 없겠지요?”

“알고 있는 사람이 최대한 적어야 합니다. 한 번 새어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휴우, 사원들은 제가 최대한 다독여 보겠습니다. 그래도 퇴직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좀 나올 것 같습니다.”

“일단 왕급 기계 괴수를 모두 잡을 때까지만 고생합시다. 그러고 나면 좀 여유가 생길 겁니다.”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1년.

미친 듯이 원정을 다녔다.

마음 같아서는 왕급 기계 괴수만 쏙 빼먹고 다른 행성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공격대 전체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것도 중요하니, 기계 괴수란 기계 괴수는 몽땅 해치웠다.

덕분에 미르 공격대의 전력이 쑥쑥 강해졌다.

우선 마엘른.

마엘른은 원정을 징검다리 넘듯 참가했다. 이번 원정에 참가했다면 다음 원정에는 미드가르드 행성에 가는 식이었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었는지, 검법도 경지를 깨어 한 단계 나아갔다. 덩달아 SSS급 신속 계열 힘의 결정 흡수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새미.

저번에는 이능 각성 보조 장치를 사용했는데도 SSS급 힘의 결정 흡수에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성공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흡수한 끝에, 마침내 승급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이능 각성 보조 장치는 정말 최고였다.

수한은 이능 각성 보조 장치를 대거 공격대에 들여왔다.

덕분에 미르 공격대의 이능력자들은 순조롭게 승급에 성공했다. 1년의 기한을 거의 채운 지금은 SS급이 변이체들까지 합쳐 20명이 되고, S급은 무려 100명이 넘어가는 초강력 공격대로 거듭났다.

AA급과 A급 이상의 이능력자만 따져도 1천 명이 훌쩍 넘을 정도.

세라프 종족을 제외한다면, 단일 집단으로는 종족 연합 내 최강의 조직이 된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핵심은 따로 있었다.

바로 수한.

원정을 거듭하면서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던 것이다.

SSS급이 된 새미나 마엘른?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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