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 요새 -1- >
전함 임페리얼이 선두에서 차원문을 통과했다.
도착한 곳은 공허한 우주였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 흔한 소행성 하나, 우주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위대한 별들만 아득히 먼 곳에서 스스로의 위엄을 빛내고 있었다.
수한은 세계 투시 초능으로 이 거대한 공간을 살폈다.
그러자 숨어 있던 구조물이 드러났다.
달 크기.
금속으로 만든 별.
모양은 흔히 보듯 원형이 아니었다. 도넛처럼 중앙이 뻥 뚫린 형상이었다. 그리고 도넛의 가장자리에 삐죽삐죽 뭔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국의 차원 요새.
저길 거쳐야만 다른 시간대 차원으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했지.
전함 임페리얼 뒤로, 푸른 빛이 무수히 명멸하며 돋아났다.
그 빛 속에서, 수많은 우주 전함과 기계용들이 나타났다. 수한의 시야를 공유 받으며, 부채꼴 형상으로 도넛 모양 차원 요새를 포위했다.
공허 속에서 침묵하던 차원 요새도 반응했다.
표면에 청색 빛이 감돌았다. 삐죽삐죽 솟아 있던 것들이 회전하며 종족 연합 함대를 겨누었다. 중간 부분이 개방되며 커다란 새처럼 생긴 것들이 날아올랐다.
기계 새들.
차원 요새를 지키는 무인병기였다. 그들과 마주칠 때쯤이면 차원 요새의 방어 광선포 사거리에도 들어갈 것이다.
수한은 연합군 전체에 알렸다.
[곧 교전이 시작될 겁니다. 모두 준비하세요.]
아직 제국의 초능력자는 보이지 않았다.
기계 새들은 지금까지 계속 사냥했던 기계 괴수의 한 종류에 불과했다. 중형과 소형이 대부분이고 대형이 가끔 섞여 있는데, 그나마 제국인이 들어 있지 않아 전투력은 낮은 편이었다.
이 함대에 소속된 것은 최소 SS급 이상의 이능력자.
단신으로 기계 새와 맞서 싸울 이들도 많았다. 더구나 우주 전함이나 기계용에 탑승하고 있으니, 기계 새들이 벌떼처럼 날아들어도 가소롭기만 했다.
마침내 연합군과 기계 새 군대가 마주쳤다.
미네르바가 빠르게 읊조렸다.
[임페리얼의 요격포를 기동합니다.]
기이이잉.
임페리얼이 낮게 진동했다.
결전 병기인 주포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전후좌우상하 모든 방향에 배치된 요격포를 기동시켰다. 시푸른 광선탄이 무더기로 우주 공간으로 사출되었다.
수한은 굳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임페리얼의 함교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용이도 기계 새들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제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엎드렸다.
번쩍! 번쩍!
차원 요새에서도 빛줄기가 날아왔다.
강력했다.
한 방만 제대로 맞으면 어떤 전함이든 박살날 지경이었다. 오직 강화된 임페리얼만 그 공격을 견딜 수 있었다.
수한은 함교에 앉은 채 세계 투시로 차원 요새의 공격을 살폈다.
놀랍도록 정밀했다. 하나하나가 연합군의 전함 아니면 기계용을 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임페리얼이 견딜 거라는 사실을 예측했는지 임페리얼만은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구경만 했다간 상당한 피해를 입을 터.
수한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거기! 곧 차원 요새의 파괴 광선이 날아옵니다. 이쪽으로 피하세요!]
[그렇게 피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피해야 돼요!]
[돌격하세요, 돌격! 기계 새 따위 무시하라고요!]
절대 의식을 사방에 날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위험한 기체에는 아광속과 고리 은하를 부여했다. 기계용들은 미리 경고만 해주면 곧잘 피했는데, 전함들은 기동이 느릿느릿해서 수한이 보조를 해줘야 했던 것이다.
가끔은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중심을 맞지 않아 다행이었다. 방어막으로 일단 막아낸 후, 치명상만 피한 채 뒤쪽으로 후퇴했다.
기계 새들을 처리하는 것은 쉬웠다.
채 30분도 되지 않아 모든 기계 새를 부수었다. 반면 연합군의 피해는 경미해서, 기계용 몇이 반파된 게 전부였다.
수한은 차원 요새를 노려보았다.
차원 요새의 표면에 어린 청색 광채가 불길했다. 간헐적으로 날아오는 푸른 빛줄기도 강력하지만, 가까이 다가갔다가 무슨 방어 수단을 가동할지 몰랐다.
임페리얼에 같이 탑승한 세계수호자 실르엔이 수한에게 질문했다.
[심상치 않은데, 어떻게 할 것이냐?]
[전군을 다 몰아갈 수는 없습니다. 일단 포위한 후, SSS급 이상의 이능력자들만 기계용에 타고 접근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좋겠다.]
SSS급 이상이라고 해도 그 수가 1만을 넘어간다. 태반이 세라프 종족이지만, 다른 종족의 수도 적지는 않았다.
수한의 기계용에는 라오그뉴와 새미, 마엘른, 아르텔라만 탑승했다. 실르엔은 본인 전용으로 제작한 기계용에 탔다. 임페리얼에 타고 있던 SSS급 이능력자들이 기계용에 오르느라 일순 분주해졌다.
준비가 끝나자, 수한은 웅장한 음성을 터뜨렸다.
[제가 선두에 설 테니 절 따라오세요. 임페리얼과 다른 전함들, 그리고 기계용들은 엄호 사격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작전에 참가하는 것은 딱 기계용 1만.
모두 SSS급 기계용이었다. 덩치도 크고, 기계용의 부품으로 활용된 것도 최소 대형 기계 괴수였다.
수한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모든 능력을 발휘했다.
기계용 1만에게 모두 아광속과 고리 은하를 걸었다. 그것으로 그들의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졌다. 안에 탑승한 이능력자들의 이능도 강해졌으니, 아무리 강한 존재가 앞을 막아도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발!]
수한은 기계용을 발진시켰다.
비행 속도로 따지면 용기사보다 더 빠른 형태.
순식간에 어두운 우주로 치고 나갔다. 추진 장치가 빛을 뿜은 순간, 함대에서 멀어져 차원 요새로 가까워졌다.
수한의 기계용만 홀로 돌출된 것.
차원 요새가 기계용을 포착했다.
그 거대한 구조물 전체가 반짝이더니, 초월적인 힘이 기계용에게 쏟아졌다.
저기 맞으면 아무리 수한의 특제 기계용이라도 맥을 못 추고 결박될 터. 이후에는 광선포들이 기계용을 조각낼 것이다.
수한의 눈이 심원한 빛을 뿜었다.
세계 투시가 발현되었다.
거대하게 덮쳐드는 힘이 보였다. 피할 곳은 없다는 듯, 모든 방향을 차단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수한이 찬 장갑에서 빛이 휘몰아쳤다. 기계용의 전신이 달아오르더니 한 줄기 벼락으로 화했다.
번쩍!
아광속과 벼락신이 조합된 뇌룡 질주는 예전과 차원이 달랐다. 빛이 번뜩인 순간 공간을 도약하다시피 저 멀리 내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벽처럼 덮쳐오는 힘을 가볍게 돌아가, 차원 요새에 더욱 가까워졌다.
거대한 힘은 몇 번이나 더 기계용을 덮쳤다. 그때마다 이리저리 피했다. 세계 투시로 힘의 궤적을 먼저 읽고, 뇌룡 질주로 피하다 보니 어느새 차원 요새가 코앞이었다.
[너무 빠르다!]
실르엔의 목소리가 수한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수한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 사이 최대한 접근하세요. 방금 전 공격은 최고 의원님들에게도 위험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조심하도록 하라. 이번 전투는 엄연히 초전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총사령관을 잃을 수는 없다.]
[걱정 마십시오.]
차원 요새에 어느 정도 접근하자, 더 이상은 거대한 힘을 날리지 않았다.
뭔가 제약이 있는 모양.
대신 차원 요새 전체가 진동을 일으켰다. 그 파장이 매질 없는 우주 전체로 퍼져나갔다.
파장을 돌파하려니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더구나 뇌룡 질주가 저절로 해제되고 아광속과 벼락신까지 흩어졌다.
이능을 취소하는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기계용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용이는 Ex 등급. 하지만 기계용이 워낙 특출 나서 혼자 힘으로는 온전히 조종하기 힘들었다. 수한의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간다!]
용이가 젖 먹던 힘까지 몽땅 다 짜냈다.
복잡한 기동은 불가능해도, 최고 속력을 내는 것은 가능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기계용이 일직선으로 차원 요새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차원 요새는 지근거리.
외벽을 지키던 광선포들이 마구 빛줄기를 난사했다. 몇 발 얻어맞자, 금방 방어막이 뜯겨 나갔다.
기계용의 전진이 주춤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공격을 허용하면 유효한 타격을 입을 터. 차원 요새에 진입도 못해보고 우주의 먼지로 흩어질지도 모른다.
수한은 눈을 부릅떴다.
아까부터 계속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이 파장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뒤따르는 이들도 위험해질 테니까.
수한의 9가지 초능 중 오직 Ex 등급인 근원 부여와 세계 투시만 작동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발현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두 가지 초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급한 대로 기계용 자체에 혼돈을 부여했다. 기계용의 몸을 회색빛이 뒤덮었다. 그러자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하여 차원 요새의 공격을 견뎌냈다.
속성 부여와는 다르게, 수한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부여가 가능한 근원 부여.
잠깐만.
분명히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특이 파장에 대척되는 힘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단, 수한이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만사 헛것이었다.
금방 방법을 떠올렸다.
혼돈으로 기계용을 보호하는 한 편, 세계 투시를 극도로 발현했다.
차원 요새 주변에 가득한 파장을 주시했다.
그것의 특질 자체를 꿰뚫어 보았다.
정체가 보였다.
은은한 힘이 그물처럼 얽혀 있었다. 그것들이 이 공간에 진입하는 이능력자에게 달라붙어 이능 발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수한은 그것을 역으로 해석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작업이다. 아무리 세계 투시가 파장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 준다고 해도, 그것을 역으로 해석하여 정반대되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해내야만 했다.
지금 수한의 기계용에는 세 외계인 동료는 물론, 아내인 새미까지 타고 있다.
자신의 실수로 수한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새미가 죽는 꼴만은 두고 볼 수 없지 않은가. 수한은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스스로의 뇌를 혹사시켰다.
그런 보람이 있었다.
끝내 수한은 파장에 담긴 힘과 반대되는 힘을 합성해내고야 말았다.
즉시 기계용에 부여했다.
투명한 빛 무리가 기계용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파장이 낱낱이 해체되었다. 수한은 억제되어 있던 자신의 초능 모두가 활짝 개화하는 것을 느꼈다.
저 뒤에서 쏜 살 같이 날아오던 이들에게 소리쳤다.
[정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공간을 가득 채운 이능 억제 파장을 해결하지 않는 한, 그들의 전력이 얼마나 강하든 화톳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과 같았다.
다행히 다들 금방 정지했다. 1초라도 늦었으면 진작 파장의 권역 안으로 들어왔을 터였다.
수한은 가장 앞선 실르엔에게만 파장에 대해 알렸다.
파장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파괴하겠다고 하자, 실르엔이 우려하면서도 응원을 했다.
[알겠다. 건투를 빈다. 파장이 그치는 즉시, 차원 요새에 돌입하도록 하마.]
[부탁드립니다.]
수한은 기계용을 다시 장악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기계용이 뇌룡 질주를 발현했다.
광선포가 빗발치지만, 몽땅 다 피했다. 드디어 차원 요새 표면에 돌입했다.
수한은 파장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네 군데.
도넛처럼 생긴 차원 요새 곳곳에 위치했다. 그 네 군데를 동시에 부셔야 파장이 사라진다.
콰쾅!
기계용이 천지 돌파를 사용하여 그 중 한곳을 직격했다. 단단한 금속 벽이 무너지며 대번에 속살이 드러났다.
어두컴컴하고 거대한 복도가 드러났다.
수한은 용기사를 이용하여 그 복도를 헤집었다. 방어 장치들의 반격은 안중에도 없었다. 단번에 짓뭉개 버린 후, 파장 생성 장치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원통형 빛의 기둥처럼 생겼다.
천천히 회전하며 옅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종석 뒤의 좌석에 앉아 있던 라오그뉴가 몸을 일으켰다.
[좋아, 날 내려줘.]
[네?]
[네 개를 동시에 부숴야 한다며? 그럼 한 명은 여기 남아야지. 안 그래?]
라오그뉴의 말이 옳다.
수한에게 원격 폭탄 같은 초능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니 한 명은 남겨서 동시에 폭파시켜야 했다.
새미가 라오그뉴의 등을 쓰다듬었다.
“조심하세요, 라오그뉴님.”
[걱정 마. 방어 장치도 다 부숴 졌고, 근처에 방어 병력이 보이지도 않잖아.]
라오그뉴를 내려준 뒤, 추진 장치를 가동시켰다.
금방 우주 공간으로 뛰쳐나갔다.
다음은 더 쉬웠다. 뇌룡 질주로 차원 요새의 다른 쪽에 도달한 후 천지 돌파로 파고들었다. 모든 방어 장치를 침묵시킨 후, 이번에는 마엘른을 내려주었다.
[마엘른님, 건투를 빕니다.]
[걱정 마시오.]
마엘른 다음은 아르텔라 차례.
이제 딱 1개가 남았다.
막 벽을 부수고 들어가는데, 새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 이상하지 않아?”
뜬금없는 말이지만, 수한은 금방 말뜻을 알아들었다.
“맞아, 이상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