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 요새 -2- >
이게 무슨 말이냐고?
간단하다.
명색이 제국의 차원 요새인데, 제국인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원 요새의 자체 방어 장치와 무인 병기만 연합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거대한 차원 요새가 함정일지도 몰랐다.
수한의 머릿속에 제국의 흉계가 그려졌다.
종족 연합의 최고위 이능력자들을 이곳으로 모두 불러들인다. 함정을 이용해 몽땅 잡아들인다. 이후에는 종족 연합 소속의 각 행성을 공격하여, 남은 고위 이능력자들을 포획한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수한은 파장 생성 장치 앞에 섰다.
지금은 기호지세(騎虎之勢). 일단 차원 요새부터 확보하고 볼 일이었다. 수한과 천공 관조자 헤라가 Ex 등급으로 확인하면, 함정의 유무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입니다!]
소리를 지르며 용기사의 팔을 휘둘렀다.
적색 광선이 솟구쳤다. 광선이 뭉쳐 큰 망치 형상을 만들었다. 붉은 빛의 망치가 원통형 장치를 후려갈겼다.
파장 생성 장치가 일격에 박살났다.
다른 세 곳에서도 그랬다. 라오그뉴의 앞발이, 마엘른의 세계검이, 아르텔라가 부른 용이 생성 장치를 부수었다.
그와 함께, 차원 요새 인근을 가득 채웠던 파장이 완전히 사라졌다. 수한은 불쾌하게 자꾸 몸에 달라붙던 힘들이 씻은 듯이 소멸하는 것을 느꼈다.
[좋아, 돌격하세요! 차원 요새를 함락시키겠습니다!]
[돌격!]
1만 기의 기계용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차원 요새의 방어 장치들이 반응했지만 소용없었다. 외벽을 뜯어내고 안쪽으로 진입했다. 몇몇 구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기계 괴수들이 나타났지만, 모두 가볍게 격파 당했다.
파장 생성 장치를 파괴했던 셋은 그쪽으로 난입한 연합군 이능력자와 합류했다. 이 혼잡한 와중에 다시 데리러 가기도 뭐하니, 각자의 위치에서 작전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수한은 헤라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요새의 통제실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중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보호 받고 있는 것 같네요. 제 능력으로도 찾는 게 쉽지가 않아요.]
[합류해서 같이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의식 군주도 데려갈 게요.]
헤라와 라이니엘이 곧 수한의 용기사로 옮겨왔다.
조종석에는 여유가 좀 있었다. 동료 셋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헤라와 라이니엘은 그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수한은 절대 의식으로 두 세라프와 자신의 정신을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세계 투시를 발현했다. 헤라도 투시 계열 이능을 끌어올렸는지 두 눈에 황금색 빛이 일렁였다.
둘은 교차 검증하듯 차원 요새 곳곳을 살폈다.
동시에 한 지점을 보았다. 절대 의식으로 연결된 서로의 정신을 통해, 서로가 보는 것이 일치하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아무리 통제실을 보호하는 힘이 대단하더라도, 이렇게 교차 검증하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했다.
도넛 형태 한쪽 구석, 환영처럼 기묘하게 일렁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창고처럼 보였다.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둘이 함께 투시 계열 이능으로 보아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Ex 급 투시 계열 능력으로도 투시가 제대로 안 됩니다.]
[그럴 거예요. 차원이 다르니까요.]
[차원이 다르다고요?]
[일종의 차원 결계에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지금 그대가 신고 있는 게 다차원 조작 신발이지요? 그것과 비슷합니다. 신발이 자기 주인을 몇 초 동안 이차원으로 옮겨준 것처럼, 일정 공간의 차원을 달리한 겁니다. 명명하자면 차원 위상 조작 정도 되겠네요.]
점입가경이다.
차원 자체가 달라졌다면 외부의 공격을 모두 무시할 것 아닌가? 수한이 차원 전이의 신발이나 다차원 조작 신발로 그랬던 것처럼.
수한은 금방 적당한 방법을 떠올렸다.
근원 부여.
방금 전에는 이능 취소 파장을 역으로 해석해서 스스로와 기계용에게 부여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차원 위상을 해석하여 동일한 차원 위상을 본인에게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대로였다.
동일한 차원 위상을 스스로와 헤라, 라이니엘에게 부여했다. 그러자 수한의 눈에 창고 대신 묘하게 생긴 방이 하나 나타났다.
구 형태.
기계 괴수의 내부와 흡사했다. 중앙에 의자가 몇 개 배치되어 있었다. 둥글게 모여 사방을 향하고 있는데,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라이니엘이 수한에게 말했다.
[이 공간 자체에는 차원 위상을 부여할 수 없나? 그럼 우리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도해보겠습니다.]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본래의 차원 위상을 통제실에 부여했더니, 아예 기존의 차원 위상이 취소되는 것이다. 통상 공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통제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였다. 헤라와 라이니엘이 그것을 해킹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도 수한의 팔찌에서 나타나 그들을 도왔다. 차원 도약기를 분석할 때의 인원이 모두 모인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을 위해 개발한 해킹 장치를 집중 투여했다. 그냥 이능으로만 해킹을 하려고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미네르바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안 체계가 상당합니다. 준비해온 걸 다 써도 사흘 이상 걸릴 겁니다.]
어쩐다?
수한은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궁극 속성 부여로 얻은 세 가지 속성.
그 중 멸혼이 있지 않았나.
생명체에게 쓰면 백치로 만들고, 인공지능에게 쓰면 초기화시키는 속성.
수한은 직접 공격을 선호해서 잘 쓰진 않지만, 분명 유용한 속성이었다.
그걸 얘기하자, 라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렇게 하자. 초기화된 인공지능을 해킹하여 우리 뜻대로 조종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렇게 해도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다.
약 여섯 시간 정도.
수한은 속으로 조바심이 났지만 진득하니 기다렸다.
광폭하게 진군하며 차원 요새를 파괴하던 연합군에게도 대기 명령을 내렸다. 잘 하면 차원 요새 자체를 장악할 수도 있는데, 모두 파괴하긴 아깝지 않나.
이윽고 해킹이 완료되었다.
라이니엘이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성공했다. 일단 방어 장치를 정지시키겠다.]
[부탁드립니다.]
전투는 끝났다.
라이니엘이 직접 차원 요새를 조종했다. 모든 방어 장치가 침묵하고, 대신 파괴된 부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제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수한은 외곽에 머물러 있던 우주 전함과 기계용 부대를 불러들었다.
그러는 한 편, 스스로 통제실의 기록을 열람했다.
다름 아닌 이곳을 지키던 제국인들이 어디 갔는지에 대해서.
몇 가지 정보가 수한의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수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의심하던 게 맞았다.
이 차원 요새는 거대한 함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끼.
이곳 차원 요새는 수확 직전까지만 쓰이는 곳이었다. 금속 구를 유출하거나 분실하는 식으로 좌표를 노출하고, 그로 인해 공격을 받으면 다른 차원 요새를 쓰게 된다.
그곳을 통과한 제국의 전함들이 조만간 이곳을 포위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차근차근 압박해 오며 이능력자들을 포획하겠지.
수한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모인 종족 연합의 전력도 엄청나다. 하지만 조만간 닥쳐올 제국의 전력은 그것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었다.
10명의 Ex급 이능력자?
혼자서 Ex급 이능력자 서넛을 당해낼 수 있는 초월 진화자가 몇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SSS급에 해당하는 7차 진화자, SS급에 해당하는 6차 진화자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더구나 전함과 개인 기갑 장비인 기계병은 종족 연합의 전함이나 기계용과 격차가 컸다. 1대 10으로 싸워도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는데, 문제는 준비된 전함과 기계병의 수가 종족 연합에 비해 최소 10배 이상이었다.
이래서야 대적할 수가 없다.
수한은 급히 연합군의 지휘부를 불러 모았다.
세라프 종족의 아홉 최고 의원.
종족 연합의 최고 평의회 의원들.
그리고 각 전함의 함장들과 기계용 군단의 주요 지휘관들.
이들만 모아도 수가 상당히 많았다. 절대 의식으로 이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은 뒤, 차원 요새 컴퓨터를 해킹해서 얻은 정보를 알렸다.
일제히 한숨이 터졌다.
[여기가 함정이라고요? 하아, 맥이 빠집니다.]
[그 제국군이 언제 도착합니까?]
[앞으로 정확히 12시간 후입니다.]
[공격 시작하고 딱 24시간 만이네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나마 차원 요새 중앙 컴퓨터를 해킹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못하고 24시간 내내 차원 요새와 투덕거렸다면 손도 못 써보고 당했을 테니까.
수한은 차원 요새에 장비된 무기들을 살폈다.
강한 화력의 무기는 없었다. 기껏해야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일 듯했다.
하기야 미끼로 던진 곳인데 얼마나 좋은 무기가 있겠나. 그랬다가 탈취당하여 자기들이 손해를 보면 큰일인데. 이능 취소 파장 등의 짜증나고 귀찮은 장비나 설치해 두겠지.
술렁이는 가운데, 튜니에가 침착하게 말했다.
[사전에 논의했던 대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수한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요새는 요새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한 상태.
하지만 다른 시간대 차원으로의 통로를 만드는 기능은 살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연합군을 제국의 본래 차원으로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정면 대결이 불가능하다면, 게릴라 작전을 해야 하지 않겠나.
새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원 이동 기능은 살아 있다고요? 이상한데요?”
확실히 그렇다.
자칫 자기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기능인데, 그걸 남겨둘 이유가 있을까.
라이니엘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의 차원 요새는 물론, 다른 차원의 차원 요새들도 한 차원계, 한 항성계로만 움직일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남겨놓은 것 같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아주 작은 길을 하나 열어둔 거겠지.]
[그 말씀은……]
[보나마나 엄중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겠지. 역공을 한 게 우리들만은 아닐 테니까.]
차원 요새와 연결되어 있는 곳은 칼라트라의 영토 중 일부인 글리멜 항성계.
정보에 따르면 그곳에는 거대한 저장소가 있었다. 칼라트라가 포획한 이능력자들이 저장되고, 모종의 방법을 사용하여 힘의 근원을 추출해 냈다.
강대한 전력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칼라트라의 함대는 물론, 유인 병기인 기계병도 엄청나게 많았다. 주변의 방어 위성에 설치된 요격포도 강력하여 여간해서는 떨어뜨리기 쉽지 않았다.
그곳으로 차원 이동하는 것은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같은 행위.
그러나 그 수밖에 없었다.
시간대 차원의 이동은 제국으로서도 쉽지 않다. 세라프의 전당처럼, 거대한 구조물 두 개가 두 차원계에 모두 존재해야 이동이 가능하다.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한다고 할까.
그게 아니면 제국 황실이 관리하는 시공 요새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만에 하나 글리멜 항성계의 저장소를 부순다면 당분간은 수한이 사는 차원계가 공격당할 염려를 던다는 것. 12시간 후 도착할 제국의 함대도 글리멜 항성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정예만 추렸다.
여기 모인 모든 전력이 가봤자 기동력만 느려진다. 그러느니 정예만 가서 재빨리 차원을 넘어 분탕질을 치는 게 낫다.
SSS급 이상의 이능력자들.
차원 요새를 공격할 때 선두에 섰던 이들이다.
나머지 인원은 차원 요새에서 방어선을 펴기로 했다. 제국의 함대는 어쨌든 이곳부터 공격할 테니까.
[사장님, 무운을 빕니다.]
[지구는 저희가 철통 같이 지키겠습니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미르 공격대 소속 이능력자들이 수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임페리얼 안에 타고 있던 S급과 SS급 이능력자는 다른 전함으로 옮겨 탔다. 그리고 SSS급 이능력자들은 모두 임페리얼에 탑승했다. 1만 기계용도 임페리얼에 수용했다.
그렇게 하고 보니 제국으로 날아가는 것은 딱 임페리얼 1척에 불과했다.
수한은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다른 전함들과 임페리얼의 성능 차가 너무 났다. 임페리얼은 단독으로 제국의 전함과 맞서 싸울 수가 있는데, 다른 전함들은 1대 1인은커녕 3대 1도 힘들었다.
더구나 Ex급 이능력자가 모두 임페리얼에 타고 있으니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홀가분하게 임페리얼을 발진시켰다.
이미 차원 요새의 중앙 구멍 부분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천천히 회전하는 차원문.
지금까지 봤던 차원문과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 실은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단순히 이차원을 이용해 머나먼 공간을 이동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차원을 연결시켜주는 물건이다.
수한은 손짓을 했다.
임페리얼이 천천히 나아갔다.
무턱대고 차원문을 통과했다간 통과하는 즉시 벌집이 될 터.
수한은 몇 가지 안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