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리멜 항성계 >
글리멜 항성계는 참 조용한 곳이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항성이 하나 있다. 온도가 무척 낮아, 주변의 행성에 생명을 발생시킬 수 없는 항성이었다.
항성을 공전하는 행성은 세 개.
다른 항성계의 행성과 비교하면 훨씬 작았다. 언뜻 보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대신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있다.
정육면체 형상.
크기가 무섭도록 컸다. 지구의 달보다 오히려 큰 것 같았다. 더구나 직경 수 킬로미터의 구멍이 무수히 뚫려 있고, 커다란 전함들이 그 구멍을 드나들었다.
칼라트라의 주요 저장소.
그 앞에는 또 하나의 구조물이 있다.
원형이다. 거대한 O자 형태로, 빙글빙글 회전 중이었다.
네 개의 기둥이 그것을 떠받들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전기가 파닥이며 푸른 물결이 일렁였다. 회색 금속으로 만들었는데 외곽은 금과 은으로 장식하여 신령한 기운이 풍겼다.
차원문 생성 장치.
이곳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시간대 차원만 10개를 훌쩍 넘겼다. 부유한 칼라트라에서도 진귀한 물건이라, 항상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다.
특히 글리멜 항성계의 저장소가 무척 중요했다. 그 때문에 그 주변에는 둥근 금속 별들이 일정한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탐지 장치를 가동하고, 언제든 주포를 쏠 수 있게 충전해 두었다.
저장소 한쪽에서는 함대의 편성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수확의 때가 다가왔다. 수도 행성 파트라에서도 지원 병력이 도착한 참이었다. 수확물들의 Ex급 이능력자를 담당할 초월 진화자들은 도착하지 않았으나, 출병할 때쯤에는 도착할 것이다.
그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간혹 차원문을 통해 역공해 오는 수확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비하여 저장소의 호위 함대가 차원문 근처에 포진한 채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뭔가 나타나기만 하면 온갖 초능들이 날아들 터. 인공지능은 정지시키고 수확물의 이능은 봉인하여 포획하기 쉽게 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함대의 편성 작업이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 차원문 생성 장치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누군가 차원 이동해 오고 있었다.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차원 이동. 그렇다면 누가 오는 것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온다!]
[준비하라!]
[계획된 대로 움직여라!]
차원문 생성 장치의 원 안에 푸른 물결이 원반처럼 넘실거렸다.
그 물결이 그치고, 거대한 전함이 튀어나왔다.
길이 10 킬로미터가 넘는 직육면체 형태의 전함.
바로 임페리얼이었다.
[발현시켜!]
지휘관의 구령에 맞추어, 온갖 초능이 발현되었다.
빛의 형태로 튀어나갔다. 미사일에 담겨 근거리에서 폭발하거나, 광선포를 타고 날아가 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전함의 몸체에 그 초능들이 몽땅 직격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직격하기는 했느냐 싶게 허무하게 지나치고 말았다.
제국인 중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차원 위상 변화? 말도 안 돼! 저 거대한 전함에 어떻게?]
그러나 수한은 해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낸 끝에, 임페리얼 전체에 차원 위상을 부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힘을 소모한 것도 아니었다. 세라프 종족이 제공한 특제 회복 물약을 물처럼 마시며 힘을 되찾았다. 앞으로도 충분히 교전을 치를 수 있었다.
차원문을 넘기 전에 안배했던 것 중의 하나.
하나가 더 있었다.
세계 투시를 통해 제국인들이 당황하는 것을 확인하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미네르바, 쏴!”
[네, 함장님!]
우우우웅.
임페리얼 전체가 옅게 진동했다.
지금 임페리얼은 자세히 보면 평소와 모습이 좀 달랐다. 앞부분이 벌어져 있었다. 악어가 입을 벌린 듯한 모습인데, 그 안에서 청색 광채가 번뜩였다.
시공 회귀 전의 우주 연방이 결전 병기로 개발했던 임페리얼의 주포.
광자 중첩포.
행성조차 일격에 소멸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차원 요새를 통해 글리멜 항성계로 넘어오기 전, 미리 발사 준비를 다 끝내둔 것이다.
빛이 증폭되었다.
파란 빛 무리가 임페리얼의 앞부분에서 뛰쳐나갔다. 빛의 원이 무수히 중첩되면서 한 마리의 용처럼 꿈틀거렸다.
빛의 용은 단번에 저장소를 관통했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우주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안구를 태울 것처럼 강렬한 빛이 우주를 섬뜩한 파랑색으로 물들였다. 수한은 눈을 부릅뜨고 저장소의 상황을 노려보았다.
어마어마한 힘이 저장소를 때렸다. 저장소 외곽을 지키던 방어막이 단번에 소멸했다.
광자가 저장소 전역으로 스며들었다. 원래 회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졌던 저장소가 퍼렇게 달아올랐다. 이내 외곽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지더니,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저장소 전체가 통째로 증발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반딧불처럼 흐릿한 빛 덩이 조금.
제국측이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여전히 전력은 그들이 훨씬 더 앞서 있지만, 시작부터 방어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의 지휘부는 다름 아닌 저장소 내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생존자 중 선임이 지휘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혼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강렬한 정신 감응이 날아들었다.
[감히, 이 미개한 수확물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분노와 당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수한은 조롱하듯 답했다.
[그러게 잘 좀 해보지 그랬나? 겨우 수확물들에게 저장소를 잃다니, 참 무능한 작자로군.]
[이익! 감히 누구에게!]
분기탱천한 정신 감응을 들으며, 수한은 그 자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알아냈다.
임페리얼 인근의 함대.
개중 가장 큰 전함에서 정신 감응이 날아오고 있었다.
8익급이고, SSS급 이능력자.
거리가 멀었다. 광선포가 유효한 타격을 입히기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수한은 그쪽을 향해 광선포를 조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광선포가 빛을 뿜었다.
비웃음의 감정이 정신 감응을 타고 날아왔다.
[흥, 그 거리에서 공격을? 방어막으로 간단히 막아주마.]
수한은 그냥 무시했다.
뻗어나간 빛줄기.
통상적인 광선포 공격이 아니었다. 평소의 샛노란 색이 아니라, 진득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혼돈이 부여된 것이다.
회색 광선이 우주 공간을 쭉쭉 가로질렀다. 먼 거리를 지나쳐, 단번에 호위 함대에게 들이닥쳤다. 그들 사이로 파고든 뒤 폭죽처럼 뻥뻥 터졌다.
빛이 근방을 휘몰아쳤다. 혼돈의 용이 태어나 사방을 할퀴었다. 거대한 우주 전함들이 그 일격에 방어막이 소멸되고 외벽이 박살나며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뭐야!]
[공격당했습니다!]
[제 8, 9, 10, 11 구역 소실! 화재 발생!]
제국의 호위 함대가 도떼기시장처럼 변했다. 저마다 악을 쓰며 질러대는 소리에, 세계 투시로 엿보는 수한의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수한은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미네르바가 그 손짓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당장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우주 저 편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지옥 속성과 천멸 속성.
9가지 속성이 호위 함대를 찢어발겼다. 천멸 속성이 직격한 인근의 전함은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셔졌다. 방금 전만 해도 위풍당당했던 함대가, 이젠 넝마주이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이쯤 되자 호위 함대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초월 진화자입니다! Ex 등급 수확물이 아니에요!]
[뭐? 초월 진화자? 말도 안 돼!]
수한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단 세 번의 공격이지만, 각 속성을 10번 이상씩 중첩시켜 공격한 참이었다. 처음 진입할 때 차원 위상을 부여했던 것까지 하여, 벌써 수한의 힘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힘들다고 쉴 수는 없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지만, 회복 물약을 마시며 근원 부여를 퍼부었다.
실르엔이 수한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내보내다오.]
[좋습니다.]
임페리얼의 격납고가 열렸다.
대기하고 있던 기계용들이 기세 좋게 뛰쳐나갔다. 세라프 종족의 최고 의원들은 물론, 종족 연합의 강력한 이능력자들이 모두 그 안에 탑승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계병들이 그 앞을 막았다.
인간 형태에, 갖가지 무기를 들고 있는 병기.
기계용을 간단히 압도하는 것들이었다. 병기를 어지럽게 휘두르며 반격해 왔다. 선두에 섰던 기계용 몇몇이 거기 맞아 불길에 휩싸여 파괴당했다.
그나마 이능력자들이 합세하여 호각을 이루었다. 금속 구에 탄 제국인들은 기껏해야 S급이나 SS급 초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9명의 최고 의원들.
그들의 힘이 무시무시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한바탕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기계용 군단이 접근하자 호위 함대가 반격에 나섰다.
형형색색의 빛줄기가 우주를 수놓았다. 그 중에는 속성이 부여된 것도 얼마간 존재했다. 광선포가 아니라 구현 계열 초능이 날아오기도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기계용 군단은 여기서 절반 이상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한이 임페리얼의 광선포에 근원을 부여하며 엄호하는 중이었다. 한 발 한 발이 막강하여 전함이건 뭐건 간단히 부수고 있었다. 결국 기계용 군단의 접근을 허락했다.
생존 이능 장비를 갖춘 이능력자들이 기계용 밖으로 뛰쳐나왔다. 특히 세라프들이 날개를 펼치고 전함들을 급습했다. 각자 장기로 삼는 SSS급 이능을 쏟아 붓자, 거대한 전함들이 불을 뿜으며 터져나갔다.
방어 위성들이 파괴 광선을 퍼부었다. 단순히 공격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파장을 발현하여 방해했다. 이미 체험해 봤던 이능 취소 파장이라던가, 공간 왜곡과 시간 왜곡 등 별의 별 파장을 다 사용했다.
이건 기계용 군단이 어쩌기 힘들었다.
수한이 나섰다.
세계 투시로 방어 위성의 정확한 위치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미네르바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미네르바가 임페리얼의 광선포를 방어 기지에 발사했다.
당연히 여러 속성이 부여된 상태.
수한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방어 위성과 포격전을 벌였다. 그 덕에 압도하지는 못해도, 기계용 군단이 호위 함대를 격멸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엄호해 주겠나?]
[좋습니다.]
기계용 군단이 기수를 돌렸다.
다음 목표는 다름 아닌 방어 위성들.
임페리얼의 엄호 포격을 받으며 하나하나 공략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글리멜 항성계의 방어 기지를 모두 일소하는데 성공했다.
초반에 저장소를 날려놓고 시작한 게 컸다. 그렇지 않았으면 안에 대기하던 함대들까지 나왔을 테니 힘겨운 싸움이 됐을 것이다.
방어 위성 중 하나는 남겼다.
수한은 멸혼 속성으로 방어 기지의 인공지능을 날려 버렸다. 기계용들이 방어 기지의 중앙 컴퓨터를 뜯어내 임페리얼로 가져왔다.
인공지능은 초기화되었지만 기록된 정보는 남아 있었다.
수도 행성인 파트라의 좌표 정보나 다른 주요 행성, 그리고 저장소의 좌표 정보들.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반면 잃은 것도 있었다.
출격했던 기계용 군단을 임페리얼에 거둬들이고 확인했더니, 기계용의 수가 꽤 줄어든 상태였다.
거의 30% 이상 손실한 것 같았다. 이능력자들은 위기의 순간 잘 대피하긴 했는데, 그래도 상당히 많이 죽었다.
새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많이 죽은 것 같아.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어쩌지?”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자. 칼라트라에도 이런 저장소는 세 개밖에 없다고 하잖아. 재산 손실로 따지면 이미 10%는 났다고 봐야 할 걸?”
수한은 손짓을 했다.
임페리얼이 광선포를 발사했다. 배후에 있던 차원문 생성 장치가 거기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이것으로 당분간 지구가 있는 차원계를 공격하지는 못할 터.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시 동안이다. 다른 차원문 생성 장치와 지구가 있는 차원계를 연결하면 그만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벌었을까.
수한은 입맛을 다셨다.
“생각 같아선 파트라를 직접 공격하고 싶은데 그건 자살 행위겠다. 일단은 저장소 위주로 공격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떻게든 전력을 보충해야 할 텐데……”
“앞으로 저장소를 공격하면서 다른 시간대 차원에 대한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야. 거기도 세라프 종족이랑 종족 연합이 있을 테니까, 그들이랑 힘을 합칠 수도 있지 않겠어?”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되겠다!”
수한은 임페리얼을 발진시켰다.
교전이 시작한지 시간이 꽤 지났다. 자칫 늦장을 부리다간 칼라트라의 구원 함대에게 공격당할지도 몰랐다.
다음 목표도 칼라트라의 저장소 중 하나.
세 개 모두 부수고 차원문 생성 장치를 박살내면, 칼라트라로서도 뼈 아플 것이다.
차원 도약을 준비했다.
막 임페리얼의 동력핵이 거세게 진동을 일으킬 때, 저 앞쪽에서 청색의 빛이 소용돌이쳤다.
차원문이다.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규모가 작았다. 우주 전함은커녕, 거대 기계 괴수만 되어도 통과하지 못하게 생겼다.
크기가 작아서일까. 차원문은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어도 임페리얼이 멀고 먼 행성으로 떠났을 텐데, 아쉬운 대목이었다.
거대한 기계병 셋이 튀어나왔다.
수한은 그것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창창한 기파가 느껴졌다.
모두 다 10익급, 거기다 Ex급 이능력자가 기계병 안에 탑승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제국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월 진화자.
그들이 임페리얼을 막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