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출 -2- >
[응!]
수한은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파앙!
거대한 감옥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단단한 벽면과 방어막이 앞을 막지만 소용 없었다. 검 형태의 드라고나를 휘두르자 거대한 혼돈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사람 몇 명이 동시에 통과할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다.
수한은 그 안으로 접어들었다.
격벽 수십 개가 앞을 막고, 온갖 방어 장치가 광선포를 쏘고 폭탄을 터뜨렸다.
의미 없었다.
수한은 몸 전체를 혼돈으로 감싸고 일직선으로 돌파했다.
금속 구에 타고 도망친 제국인들 따위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함교를 지나쳐 그들이 도망친 비상 통로 앞에 도착했다.
비상 통로는 차원 위상을 바꿔야 진입이 가능했다.
수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찰나의 순간, 비상 통로의 차원 위상을 해석했다.
그와 동일한 차원 위상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그 상태에서 돌진하자, 시야가 묘하게 변하며 원래의 차원 위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났다.
수한은 제국인이 도망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처럼 통로를 날아갔다.
온갖 방해물이 앞을 막았다. 하나같이 강력한 것들이지만, 수한 같은 초월 진화자를 막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잉트리그의 군주를 놓친 것들이 아닌가.
얼마나 날아갔을까.
제국인들이 탄 금속 구가 저 앞쪽에 보였다.
아직 거리가 멀었다. 몇 번이나 방향을 꺾어서 쫓아가야 했다. 잘못하면 놓치게 생겼다.
이럴 때 쓸 만 한 게 하나 있다.
뇌룡 질주!
전신이 번개로 변했다. 거기에 주변 차원 위상과 약간 다른 차원 위상까지 부여했다. 수한의 몸이 이 위상 속에서 사라지며, 말 그대로 번개처럼 내달렸다.
수한이 재해석하여 부여한 차원 위상은 이 통로의 차원 위상과 본래의 차원 위상에 살짝 걸쳐 있었다. 그래서 통로를 통과하는 것도 가능하고, 반면 방어 장치의 공격을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
제국인들은 저희들끼리 다급하게 소리쳤다.
[젠장! 저놈 수확 행성 출신이라며! 어떻게 수확 행성 출신이 차원 격리에서 벗어난 거야? 그건 군주님들도 힘들어 하는 거잖아!]
[저 녀석이 이상한 겁니다! 저번에 도망친 잉트리그의 군주도 실시간 대응 차원 격리는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제길! 좋은 방법 없나?]
[일단 차원 고정 장치를 작동시키겠습니다!]
구조물 전체가 파랗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모든 차원 위상이 깨졌다. 원래의 차원만 유지되는 것이다.
자연히 수한의 뇌룡 질주에 부여된 차원 위상도 소실되었다. 더 이상의 차원 위상 공격은 불가능해졌지만, 수한도 공격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게 된 셈이다.
상관없었다.
뇌룡 질주는 관성을 무시할 수 있었다. 지그재그로 공격을 피하며 제국인들을 쫓아갔다.
마침내 제국인들을 따라잡았다.
[이놈들!]
벼락처럼 노호하며 달려들었다.
금속 구들이 벌떼처럼 흩어졌다. 수한은 그 중 가장 약한 제국인이 탄 금속 구를 향해 돌진했다.
[으히힉!]
제국인이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한은 금방 금속 구를 따라잡았다.
금속 구가 푸른 광선을 뿜어 반격하지만 소용없었다. 모조리 회피하며 날아가, 드라고나를 금속 구에 꽂아넣었다.
벽을 길게 가르자 맹렬한 적색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죽어!]
제국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SS급 거력 계열 초능이었다. 장갑에서 증폭되며 매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그래봐야 수한에겐 코웃음만 나올 지경.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바로 뇌룡 일격을 먹였다.
번개가 제국인의 반신을 갈랐다. 적색 빛 따위 가볍게 깨뜨리고 단번에 제국인을 직격했다.
제국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공격 한 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시체만 남아 널브러졌다가, 그마저도 수한이 집어 밖으로 던져 버렸다.
우왜애애애앵!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금속 구가 자폭 명령을 발동시켰다. 주인이 죽고,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수한은 즉각 멸혼 속성을 날렸다.
인공지능이 간단히 초기화되었다. 용이가 용갑에서 벗어나 금속 구에 깃들었다. 금속 구를 장악한 뒤 용의 머리처럼 변형시켜 구멍난 곳을 메웠다.
수한은 용이에게 속삭였다.
[우주로 나갈 거야. 서두르자.]
[응, 알았어.]
기계용 머리가 통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다른 제국인들이 탄 금속 구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수한이 실랑이하는 사이, 우주로 뛰쳐나간 뒤 차원을 도약한 것이다. 세계 투시로 그들이 어디로 도망쳤는지는 알아냈지만, 굳이 뒤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윽고 기계용 머리가 우주로 뛰쳐나왔다.
용이의 고유 능력을 이용해 은신했다. 표면을 검게 물들인 후 인근을 지나치던 우주 쓰레기 안으로 숨었다.
수한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하아!”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드미트리가 곧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자라면 금방 용인의 은신을 꿰뚫어 볼 것이다.
그 전에 차원 도약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가지?
그런 수한의 마음을 읽은 듯, 용이가 작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오고스 항성계나 빌레 항성계로 가자.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있을 거잖아.]
그러고는 싶은데, 그랬다가 추적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수한은 금속 구의 컴퓨터에 남은 좌표들을 일람했다.
여러 좌표가 남아 있었다.
칼라트라의 수도 행성인 파트라, 칼라트라의 수많은 보유 행성들, 잉트리그와의 접경 지대, 그 외 황제 직할지의 여러 구역 등등.
어쨌든 오고스 항성계로 가긴 해야 한다.
그러려면 몇 군데를 거쳐 가는 게 낫겠지. 추적당하지 않게 은밀히 움직여야겠고.
수한은 결정을 내렸다.
[쿠마 행성으로 가자.]
[거긴 어디야?]
[황제 직할지 중 하나야. 칼라트라 영역이랑 맞닿아 있어. 황족이 유배된 곳이라 출입이 금지 됐으니까, 거기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것 같아.]
[지금 도약할까?]
[늦장 부릴 시간 없어. 바로 가자.]
[알았어.]
용이가 차원 도약기를 작동시켰다.
푸른빛이 일렁였다.
우주 쓰레기 바깥까지 그 빛이 스며나왔다. 제국인들이 그것을 포착했을 때, 기계용의 머리는 멀고 먼 우주로 이동한 후였다.
쿠마 행성.
그 태양계에는 크고 작은 항성이 존재했다. 작은 항성이 큰 항성의 주변을 공전했다. 행성이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바다가 있고 대기가 있어 생명체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지구를 연상시키듯 아름다운 행성이었다. 한때는 많은 방문객들이 오던 곳이지만, 황족의 유배지로 쓰인 다음에는 인적이 뚝 끊겼다.
황태자가 쿠마 행성의 태양계를 출입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수십 개의 세력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도 황실의 힘이 뭇 세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특히 현 황제는 벌써 수 만년 째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둘러서, 제국인들 황제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곤 했다.
황태자도 그런 황제를 닮아 매우 잔인하고 폭압적인 인물.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고서야 쿠마 행성으로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그런 정확한 사정까진 몰랐지만, 수한은 일단 쿠마 행성으로 차원 도약했다.
용이가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말했다.
[차원 도약기가 과열된 것 같아. 다시 이동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응? 겨우 1번 썼는데?]
[애초에 그렇게 만들었나 봐. 충전된 건 충분한데 작동하지를 않아. 무시하고 차원 도약했다간 망가져 버릴 걸?]
[끄응, 죽은 놈이 뭔가 수작을 부렸나 보다.]
[그러게.]
몇 시간만 기다리면 풀린다고 했다.
일단 도착한 자리를 벗어났다. 탐지하기 어렵도록, 쿠마 행성을 공전하는 세 개의 달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갔다.
용이가 은신 기능을 극도로 발휘하고 있었다. 수한은 기계용 머리 전체에 차원 위상을 부여했다. 지금부턴 어지간한 탐지 장치로는 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수한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쿠마 행성의 위성 표면에 내려앉은 후, 숨을 죽이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기지 같은 게 있어.]
용이가 수한에게 속삭였다.
수한도 보고 있었다.
세 개의 달 모두, 여러 인공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일견하기에도 거대한 광선포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탐지 장치는 물론 소형 요격포가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차원 위상을 변화해 놓지 않았으면 진작 탐지되어 공격을 받았을 터.
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다.
광선포와 요격포의 방향.
분명히 위성에 설치된 방어 기지인데, 광선포와 요격포의 방향이 우주가 아닌 쿠마 행성을 향했다.
외부에서 쿠마 행성을 방어하는 게 아니라, 쿠마 행성의 뭔가를 조준한 것만 같았다.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쿠마 행성은 황족의 유배지.
유배당했다는 그 황족을 겨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행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은 안전할 것이다. 위성에 설치된 탐지 장치도 오직 쿠마 행성만 살피고 있을 테니까.
“후우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피로가 몰려 왔다.
하긴 연합군을 이끌고 출격한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몰랐다. 그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싸우기만 했으니 아무리 수한이라 해도 피곤할 만 했다.
[용아, 난 눈 좀 붙일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깨워. 알았지?]
[응, 알았어.]
수한은 슬쩍 눈을 감았다.
막 잠을 청하려는데, 묘한 느낌이 수한을 간질거렸다.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해야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소리.
아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수한의 뇌로 직접 어떤 개념이 전달되고 있었다.
정신 감응 중의 하나.
누구지?
결국 잠이 들지 못하고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세계 투시로 살펴도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위성에 설치된 감시 기지는 모두 무인 기지였기 때문이다.
용이가 의아한 감정을 흘렸다.
[왜 그래?]
[누가 나를 부른 것 같아서.]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수한은 그 정도 착각을 할 정도로 얄팍한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수한을 불렀다.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해 미약하기 짝이 없고,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지 몰라 흐릿하기 짝이 없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수한은 쿠마 행성을 보았다.
세계 투시를 활성화했다.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 달에서 행성까지의 그 먼 거리를 넘어 지표면을 직접 눈에 담았다.
천국처럼 아름다운 행성.
어딜 가나 기화요초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앙증맞은 동물들이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뛰어다녔다.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상큼한 노래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적도와 북극 사이의 한 온대 지역에 작은 도시가 있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흡사 금과 은으로 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도시였다.
이상한 것은, 도시의 면적이 상당한데도 시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기계 동물들 뿐.
사자, 호랑이, 늑대, 곰, 토끼, 사슴, 독수리, 매, 참새, 까치, 사마귀, 메뚜기, 고양이, 개 등등 별별 기계 동물들이 돌아다녔다. 진짜 동물은 없고, 심지어 나무와 풀도 기계로 되어 있었다.
간혹 새들이 날아들거나 떠돌이 개가 접근하면 기계 동물들이 광선포를 뿜어 죽여 버렸다. 도시 전체에 생물이라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뿐이었던 것이다.
아니, 딱 하나가 있었다.
기계 도시 중앙.
거대한 궁전.
작은 소녀.
궁전의 발코니에 나와 눈물짓는 한 명의 소녀만이, 이 화려하되 차가운 기계 도시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