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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커맨더-233화 (234/254)

< 도주 >

수한은 소녀를 보는 즉시 소녀의 정체를 눈치 챘다.

아름답고 생명이 넘치는 행성, 쿠마.

그런데 제국인은 행성 전체에 딱 1명밖에 없었다. 시중을 드는 이가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뻔한 이야기다.

유배당했다는 황족, 그녀가 분명했다.

상당히 외로워 보였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저런 삭막한 도시에 친구 하나 없이 가둬 놓다니……

하지만 소녀를 보는 수한의 얼굴은 냉담하기만 했다.

제멋대로 시공을 분열시켜 차원 전체를 목장으로 삼고, 뭇 종족의 이능력자를 길러 수확하는 족속 아닌가.

외모는 어려 보이지만, 실은 세라프 종족의 피와 살을 섭취한 노괴물일지도 몰랐다.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 끝에 갇히는 신세가 된 모양인데, 아무리 어려 보인다고 해도 동정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래도 무슨 소리를 하나 궁금해서 슬쩍 귀를 기울였다.

[날 도와줘. 제발……]

그걸 듣자 흥미가 떨어졌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해지는 정신 감응.

그러나 태양계 전체를 황태자가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린 지금, 그걸 듣고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가능성은 적었다.

수한은 세계 투시를 거둬들였다.

제국인의 권력 다툼에 낄 생각은 없었다. 그것 말고도 수한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오고스 항성계로 가서 임페리얼과 합류하는 게 중요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차원 도약기의 과열이 좀 식자 즉각 차원 도약을 시행했다. 이번에는 황제 직할령 더 깊이 들어갔다. 자원을 몽땅 소모한 광산 행성이 있는 항성계인데, 최근 인구가 줄고 왕래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휴식해 가며 차원을 뛰어넘었다. 다섯 번 이상 경유한 뒤 오고스 항성계로 향했다.

모이기로 한 지점에 도착하고,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용이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제국 놈들이 있어!]

기계병 몇몇이 소행성 지대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소행성 지대 곳곳에 파괴된 기계용들이 떠다녔다.

임페리얼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금속 파편도 보였다. 가끔 제국의 기계병 파편도 보이지만, 비율로 따지면 채 1할도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한은 급히 세계 투시를 사용했다.

시간의 장벽을 뚫고, 과거에 있었던 일이 보였다.

거대한 전함이 차원문을 통해 나타났다. 은신하여 소행성 지대로 진입한 뒤, 대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제국의 추적대가 차원문을 열고 나타났다.

추적대는 임페리얼의 위치를 금방 알아챘다. 즉각 기계병들이 소행성 지대로 진입하여 임페리얼을 공격했다.

기계용들이 대항했으나 역부족.

그나마 초월 진화자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무수히 많은 기계용들이 희생당한 대신, 임페리얼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차원을 도약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뻔했다.

빌렌 항성계.

두 번째 집결지.

수한은 이를 악물었다.

방금 본 영상은 불과 몇 시간 전의 것이었다. 추적대가 분주히 차원문이 열린 자리를 뒤적이더니 금방 그 뒤를 쫓아가는 게 보였다.

수한은 용이를 재촉했다.

[차원 도약은 언제 가능해?]

[최소한 6시간은 필요해.]

[젠장!]

저절로 욕설이 나왔다.

6시간?

그렇게 시간을 보낸 다음에는 늦다. 아까 세계 투시로 본 장면으로 유추하건대, 그 안에 기계용은 모조리 박살나고 임페리얼은 나포 당할 것이다.

수한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방법 없어? 이걸 잃어도 좋아! 동력핵을 폭주시키든 어쩌든 해서라도 차원 도약을 해야 돼!]

[알았어. 그럼 동력핵을 폭주시킬게. 차원 도약 직후에 이게 폭파될 테니까 바로 뛰쳐나가야 해.]

[좋아, 그렇게 하자.]

기계용 머리가 웅웅대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깨알만큼 작은 동력핵이 힘껏 진동을 일으켰다.

수한이 앉아 있는 의자가 계속 덜컹거렸다. 흡사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새파란 빛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왜곡되었다.

아차원을 통과하여 저 먼 우주로 연결되는 통로가 생성되었다.

기계용 머리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력핵에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막 통로에서 벗어나 목표 지점에 도착하는 즉시, 유리처럼 부스러지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용이가 융합을 해제했다. 용갑이 되어 수한의 몸에 착용되었다. 그와 동시에, 수한은 차원 위상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폭발에 대비했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우주를 하얗게 물들였다.

강렬한 힘이 밀려오지만, 그저 꼿꼿이 선 채 무시해 버렸다. 세계 투시를 발휘할 것도 없이 정면만 쳐다보았다.

임페리얼이 보였다.

기계용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만 보이면 괜찮은데, 문제는 제국의 기계병들과 추적함들이 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연합군이 밀리는 중이었다. 파괴 되는 것은 모두 기계용뿐이고, 임페리얼의 지근거리까지 기계병들이 진출해서 곧 직접 공격을 할 것 같았다.

어쩐다?

용기사가 없는 상황에서는 수한이라 해도 전투력이 제한된다. 근원 부여를 중첩시켜 기계병이든 추적함이든 날릴 수는 있지만,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한다.

아니, 잠깐만.

수한이 혼자 다 알아서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조금만 틈을 열어줘도 될 것이다. 그럼 대적하는 기계용들이 알아서 상대를 박살내겠지.

마비 속성?

그 정도가 아니라 멸혼 속성을 기계병들과 추적함에게 꽂아주면 어떻겠나.

컴퓨터가 초기화되면서 한참 동안 기동하지 못할 것이다. 수동으로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기계용들이 우세를 점하는 것도 가능했다.

생각을 마친 즉시 행동했다.

뇌룡 질주를 사용해 달려 나갔다. 스스로에게 변형된 차원 위상을 부여한 뒤였다. 드라고나를 팔에 부착한 뒤, 멸혼 속성을 부여하여 쭉쭉 발사했다.

회색 선이 그어졌다.

너무나도 가냘픈 선이었다. 아무도 그 선에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연약해 보이는 선이 일으킨 결과는 무척 놀라웠다.

선에 닿은 기계병들이 스르륵 움직임을 정지했다.

기계용을 공격하다 말고 동력이 꺼지고, 기세 좋게 날아들다가 뻔히 보이는 공격을 얻어맞으며 파괴당했다.

제국인들이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다.

[뭐야?]

[갑자기 컴퓨터가 멈췄어!]

[정신 공격이냐?]

[보안 체계가 작동하지도 않았어! 정신 공격은 아냐!]

수한은 현재 차원 위상을 변화시킨 상태.

특수한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감지할 수도 없었다. 기계병들은 은신한 채 멸혼 속성을 날리는 수한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상대적으로 연합군은 어리벙벙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세게 공격하던 제국군이 갑자기 사방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한은 그들에게 절대 의식을 걸었다.

[접니다!]

[누구?]

[접니다, 지구의 이수한!]

[아, 사령관님!]

[오빠!]

[돌아왔나!]

연합군 전체에 말을 건 탓에 다양한 답변이 쏟아졌다.

수한은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 놈들에게 멸혼 속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초기화 될 테니까, 그 사이에 공격하세요!]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수한은 우주를 누볐다.

멸혼 속성을 미친 듯이 난사하자, 비로소 연합군이 기계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추적함들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는 기계병들에게만 맡겨 놓았는데, 이젠 그들도 가세하여 광선포를 쏘아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는 것이, 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 듯했다.

그럼 수한이 가면 된다.

몸을 돌려 그들에게 날아갔다.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아 무심코 가속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그러자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우주를 돌파했다.

그제야 추적함들은 수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각종 탐지 장치를 가동했는데, 그 중 하나가 차원 위상이 변화된 존재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한 것이다.

추적함들이 일제히 한 가지 장치를 가동했다.

차원 고정 장치.

수한이 스스로에게 건 차원 위상이 해제되었다. 한 줄기 번개가 나타나며, 추적함들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추적함들이 요격포를 마구 발사했다.

수한은 세계 투시로 그 궤적을 미리 보고 모조리 피했다. 그러는 한편 몇 겹 중첩시킨 멸혼 속성을 추적함에게 날렸다.

기계병과 비교하여 덩치도 수백 배가 넘게 크고, 중앙 컴퓨터도 정교한 추적함이지만 중첩된 멸혼 속성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모두 침묵하며 우주 공간을 떠돌았다.

그 틈을 노려 임페리얼이 광선포를 발사했다. 주포는 아니고 부포인데, 평소라면 방어막에 막혔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유효했다. 컴퓨터가 초기화되면서 방어막이 사라졌으니까.

수한도 한 몫 거들었다. 세계 투시로 동력핵이 있는 곳을 확인한 후, 그곳에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공격 받은 동력핵이 폭주하며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 추적함들을 침몰시켰다.

이후에는 쉬웠다.

절대 의식으로 기계용 군단을 지휘하면서 기계병들에게는 멸혼 속성을 선사했다. 덕택에 기계병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아예 나포한 기계병도 많았다.

“후!”

수한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것으로 한 판 전투는 끝.

그러나 이겼다고 기뻐할 틈은 없었다.

이미 추적함들이 통신을 보냈을 것 아닌가. 좌표가 알려졌을 테니 금방 후속대가 도착할 터였다. 지금은 그나마 초월 진화자가 없어 전세를 뒤집었는데, 초월 진화자가 포함되어 있다면 당장 난처한 지경에 빠진다.

수한은 급히 임페리얼의 함교로 들어갔다.

“오빠!”

새미가 수한의 품에 격렬하게 안겼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눈물 자국이 가득 번져 있었다.

꽉 껴안고 새미의 등을 쓸어주었다. 새미가 수한에게 안긴 채 엉엉 울었다.

“너무 늦었잖아! 걱정 했다구!”

“그래, 자기야. 내가 잘못 했어.”

새미는 한참 운 다음에야 진정했다.

뒤쪽에 서 있던 마니엘라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최고 의원님들은 어떻게 된 건가?]

수한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변 세라프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라오그뉴가 다가와 수한을 툭 쳤다.

[어쨌든 살아와서 다행이다. 후, 다들 죽는 줄 알았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오셔서 다행입니다.”

마엘른이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르텔라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멀찍이서 계속 저주를 날리느라 힘을 상당히 소모한 모양이었다.

“피해가 컸어요. 사자님,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다들 지치고 힘든 기색이었다.

수도 많이 줄었다.

출발할 때만 해도 임페리얼에는 SSS급 이상의 이능력자 1만과 기계용 1만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의 반에도 못 미치는 듯했다.

입맛이 썼다.

굉장한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질적으로 제국에 미친 피해라고는 저장소 하나를 파괴한 게 전부이지 않나.

“일단 움직이지요.”

모든 이능력자와 기계용, 약간의 전리품을 수용한 뒤 차원 도약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후속 추적대가 금방 임페리얼을 쫓아올 것이다. 차원 도약 흔적을 교란해 놓는다 해도, 얼마나 시간을 끌지 의문스러웠다.

그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설령 좌표를 알아낸다 해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그런 곳이 어디에 있을까?

칼라트라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잉트리그와의 접경지대? 블랙홀이 수십 개나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암흑 성운 속? 무한히 확장 중인 우주의 끝, 공허의 경계?

수한의 눈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한 군데가 있었다.

누구도 접근하지 말라는 황제의 칙령이 떨어진 곳.

쿠마 행성.

그곳의 기계 도시.

어린 소녀 홀로 눈물짓는 궁전.

그곳이라면 잠시 소나기를 피해봄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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