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34화 (235/254)

< 황녀 비에라 -1- >

수한은 미네르바에게 즉각 차원 도약을 명령했다.

전투가 끝난 시점부터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좌표를 알려주자마자 차원 도약기를 가동시켰다.

워낙 거대한 규모에, 여기저기 피해를 입은 곳이 많았다. 그래서 차원 도약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임페리얼 전체가 수백 번이나 진동을 한 다음에야 차원문이 열렸다.

쿠마 행성 앞에 도착했다.

세 개의 위성에 있는 기지들이 감시의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수한은 최대한으로 능력을 끌어올려 임페리얼에 차원 위상 변이를 걸었다.

효과가 있었다.

기지들은 임페리얼을 포착하지 못했다. 비록 차원 위상 감지 장치가 있긴 하지만, 행성 전역을 한꺼번에 시야에 두진 못하기 때문이었다.

수한은 조심스럽게 사각지대로 임페리얼을 인도했다. 미네르바가 전폭적으로 협력을 했다.

일단 임페리얼을 인공 위성 궤도에 정박시켰다.

사태의 추이를 보며 임페리얼을 수리할 생각이었다. 이후 더 머무르든 쿠마 행성을 떠나 칼라트라의 다른 영역을 공격하든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

[모두 치료부터 하지요.]

수한은 시계의 힘을 회복으로 맞췄다. 고리 은하를 부여하자 예전에 쓰던 시계처럼 맑은 힘이 함교 전체, 더 나아가 임페리얼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능력자들은 스스로를 치료했다. 모두 SSS급 이능력자다 보니 그 정도 재주는 있었던 것이다.

마니엘라가 수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일단은 전력을 회복한 다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수한은 주위를 둘러본 뒤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임페리얼을 완전히 수리하고, 부상자들을 모두 치료한다 해도 전력 자체가 너무 낮아졌다. Ex급 이능력자는 더 이상 없고, SSS급 이능력자와 기계용은 반의 반만 남지 않았나. 실질적인 전투력은 출발할 당시의 10% 정도라고 봐야 했다.

제국의 함대가 아니라, 초월 진화자 한 명만 나타나도 당해내기 힘들 터.

어떻게 한다?

황태자의 출입 금지 명령에 기대어 숨어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만간 칼라트라가 추적할 터였다. 소수 정예만 보내 공격할 수도 있고, 황태자와 담판을 지은 뒤 대규모로 덮칠 가능성도 존재했다.

먼저 수를 써야 한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문득 쿠마 행성에 홀로 유폐된 소녀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녀의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

아무리 유폐되었다고 해도 황녀는 황녀. 그녀의 비호를 받아 행성 표면으로 내려간다면 칼라트라라고 해도 쉽게 연합군을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황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사항이니까.

일단 다른 이들과 의논을 했다. 앞으로 연합군의 행동을 정하는 중요한 대목이니, 수한 혼자 결정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마니엘라가 세라프 종족을 대표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우리 군의 사령관이니 그대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해라. 단, 우리 종족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걱정 마세요.]

간단히 말해서, 자기들을 협상 도구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

당연한 일이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은 임페리얼의 통신기를 활용하여 소녀에게 통신을 보냈다. 정신 계열 초능으로 말을 걸면 좋은데, SSS급으로는 그 먼 거리를 격하고 말을 걸기 어려웠던 것이다.

임페리얼 전체가 진동했다.

중앙 화면이 켜지고,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소녀는 자신의 반지를 통해 임페리얼의 함교를 보고 있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처럼 보이는 외모. 검은 머리칼이 비단 같고, 두 눈동자는 푸른 진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단아한 흰 옷 한 벌만 걸치고, 귀걸이와 목걸이, 반지와 팔찌 등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했다.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당신들은 누군가요?]

처음 듣는 언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의미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어째서 그런가 보니, 소녀의 반지에 깃든 힘이 실시간 통역을 하는 게 보였다.

수한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는 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종족 연합군입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지요?”

[종족 연합군이라고요? 처음 듣는데…… 아, 뭔지 알겠어요. 당신들은 수확물들이군요?]

소녀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놓고 수확물 운운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아, 제 말만 하고 있었네요. 반가워요. 제국의 제 999 황녀 비에라라고 해요.]

소녀는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제 999 황녀?

오랜 세월을 사는 만큼 황제가 자식도 많이 낳은 모양이다. 비에라의 위로도 최소한 998명의 형제자매가 있다는 얘기 아닌가.

수한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종족 연합군 총사령관, 21세기 지구 출신 Ex급 이능력자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지구 출신 이수한이라고요?]

비에라가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수한의 옆에 서 있는 새미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주 같은 푸른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럼 설마 옆의 분은 윤새미님이에요?]

수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름을 말한 적도 없고, 어디서 정보를 얻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새미를 알아보다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

비에라가 활짝 웃었다.

[와! 두 분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신기해요!]

두 분?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미네르바를 처음 만나던 그때, 수한은 운명의 눈을 통해 짧게나마 세계의 교차점을 목격했다.

원래 세계의 수한이 미네르바를 얻는 장면.

그게 제국의 씨앗이 되었다. 임페리얼을 수리하기 위해 만든 거대 기업이 지구를 정복하다시피 하고, 나중에는 제국의 황실이 된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수한이 추측해 낸 대목.

어쩌면 그 인생에서도 새미가 수한의 반려였던 것은 아닐까? 수한과 새미의 자손, 그들이 현재 황실을 이룬 것일지도 몰랐다.

논리의 비약이 존재하지만, 수한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직감이 맞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비에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두 분, 아니 여러분을 제 궁전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잠깐 괜찮겠어요?]

수한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뜻밖에 이야기가 잘 풀렸다.

한동안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에라가 먼저 연합군을 초청한 것이다.

수한은 의뭉스럽게 답변했다.

“쿠마 행성은 출입 금지 구역 아니었습니까?”

[뭐, 황태자는 싫어하겠죠. 하지만 상관없잖아요? 여러분은 제국 신민도 아닌데요. 아 참, 도시로 나가면 기계 동물들이 공격할 테니, 제 궁전 안에 머무르셔야 해요.]

수한은 이것저것을 물어본 뒤 수락했다.

가장 중요시여긴 것은 다름 아닌 안전 보장.

슬쩍 세계 투시도 사용했다. 비에라가 뒤로 꾸미는 게 없다는 점을 확인한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초대를 받아들이지요.”

[잘 생각하셨어요! 궁전으로 하강하는 경로를 보내드릴 테니까, 그대로 따라오세요. 거길 벗어나면 기계 동물들이 공격할 거예요.]

통신이 끊겼다.

마니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느냐? 함정일지도 모른다.]

수한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세계 투시로 비에라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는데, 음모나 함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호의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에게도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비에라의 의도는 간단했다.

비록 패잔병 꼴이지만, 임페리얼의 전력은 비에라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들을 회복시키고 무장시키면 상당한 힘이 될 터였다.

특히 21세기 지구의 이수한.

비에라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비단 황실의 시조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런 그를 받아들인다면, 지금처럼 기계 궁전에서 홀로 말라비틀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이 올라왔다.

기계 궁전 중앙으로부터, 빛의 기둥이 일직선으로 섰다. 그 기둥이 궁전과 전함 임페리얼을 하나로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차원 위상이 변화되어 있어 불가능한데, 수한이 중간에서 조율을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임페리얼이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몸체가 대기권을 돌파하는데도 불똥 하나 튀지 않았다. 새벽처럼 고요하게, 안개가 밀려오듯 천천히 기계 궁전을 향해 내려갔다.

지상에 닿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임페리얼이 정박한 곳은 궁전 안의 거대한 격납고였다. 정박을 끝내자마자 미네르바가 알아서 자가 수리를 시작했다.

수한은 부상자들은 일단 임페리얼 안에 머무르게 했다. 그 후, 자신의 일행을 비롯하여 마니엘라와 함께 임페리얼 밖으로 나갔다.

작은 인형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님께서 여러분을 환영하신답니다.]

“흠, 황녀는 어디 있지?”

[절 따라오세요.]

비에라는 궁전의 가장 높은 곳, 수한이 엿보았던 발코니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주위의 도시는 물론, 그 너머의 평원까지 잘 보인다. 기계 생물들이 아닌, 진실한 생명들이 뛰고 놀며 삶을 빛내고 있는 그곳이.

기계 인형은 수한 일행을 그곳까지 안내해준 뒤 물러났다. 기척을 느낀 비에라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순수한 기쁨이 그 얼굴에 어렸다.

[반가워요. 살아있는 존재를 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누군가 찾아왔을 만도 한데, 아무도 오지 않은 겁니까?”

[황태자의 명령이 있었으니까요. 여러분은 제국인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지금의 황태자는 매우 무서운 사람입이랍니다.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비에라는 직접 수한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차를 우려내 대접하기까지 했다. 엘프 차와 비슷한데, 그보다 더 맑고 부드러웠다.

탁자에 둘러앉은 뒤, 비에라가 흥미롭다는 듯 수한과 새미를 보았다.

[두 분을 직접 뵙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저흴 아세요?”

새미가 불편하다는 투로 물었다.

아까 함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꾸 아는 척 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비에라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황족 중에 두 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우리의 뿌리이고, 고귀한 혈통의 시작이니까요!]

비에라는 흡사 아이돌 가수를 보는 여중생의 얼굴을 하고 수한과 새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덕에 불편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마니엘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라프 종족을 대표해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대충 내막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라오그뉴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마엘른은 깊은 생각에 잠겼고, 아르텔라는 기도하듯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수한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들 제국 황실의 시조가 21세기 지구의 이수한과 윤새미였나 보지요? 하지만 당신들 의 시조와 저, 그리고 제 와이프는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순진한 척 하지 말고 본색을 드러내시지요. 저는 당신들이 말하는 초월 진화자이고, 당신이 초월 진화자가 아닌 이상, 제게 거짓을 말할 수도, 당신의 의도를 숨

길 수도 없습니다.”

[역시 초월 진화자셨네요. 아무리 이수한님이라고 해도 어떻게 칼라트라의 추적을 뿌리치고 여기까지 왔을까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어요.]

비에라는 천진하던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세월에 찌들고 세파에 단련된 억센 미녀의 표정이 나타났다.

역시 겉보기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이도 많을 것이다. 비에라 또한 황족이고, 세라프 종족의 피와 살을 섭취할 수 있을 테니까.

마니엘라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비에라를 보았다.

[그대의 육체와 영혼에서 내 동족의 냄새가 난다.]

[그럼 내 나이가 몇인데 당신들 노예 종족을 활용하지 않았을 것 같아?]

비에라가 짧게 비웃음을 흘렸다.

수한은 손깍지를 끼고 몸을 비에라에게 기울였다.

“당신이 우리에게 손을 내민 건 따로 이유가 있지요? 속내를 밝혀보시죠. 당신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준다면 손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비에라가 수한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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