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35화 (236/254)

< 황녀 비에라 -2- >

냉철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제가 황도로 복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수한이 예상했던 말.

비에라는 뒤를 이어 그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유폐한 것은 개인의 세력과 무력을 이용한 것이지,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다나.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거라고 했다.

사실 황녀 유폐 정도로는 황태자를 실각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비에라에게 황태자를 실각시킬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초월 진화자 10명이 있으면 황제를 직접 알현할 수 있으니, 그렇게 황제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것.

그 설명을 들은 후, 수한은 자기 뺨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아직 9명이 부족한데요?”

[제 가신 중에 초월 진화자가 3명이 있어요. 그들과 협력해서 6명만 더 끌어들이면 되요. 그렇게 황도에 복귀하면, 당신들 차원의 독립성을 보장하겠어요.]

“독립성을 보장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칼라트라가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독립된 차원 요새를 하사하겠어요. 그런 다음 그 차원 요새를 통해 제국의 질서에 편입하든, 차원을 봉쇄하고 여러분끼리 지지고 볶든 마음대로 하세요.]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제국 자체를 멸망시키는 것만은 못해도, 최소한 지구를 구할 수는 있으니까.

수한은 씩 웃었다.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제국 전체, 하다못해 칼라트라 정도는 궤멸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은 지구 보존을 목표로 움직여도 될 것이다.

“좋습니다. 초월 진화자 6명만 모아오면 된다 이거지요?”

[맞아요.]

“그 전에 한 가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유폐된 겁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초월 진화자를 포섭하든 어쩌든 할 수 있으니 자세히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비에라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수한이 몇 번이나 재촉한 다음에야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비에라의 동복 언니였던 제 789 황녀 시에라는 강력한 이능력자였다. 군주 계급에, 무려 6가지의 초능을 초월 진화시켰다고 했다. 따라서 황태자의 강력한 경쟁자였는데, 어느 날 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다.

비에라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시에라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 뿐. 그러면서 시에라의 레벨 업 도우미를 상속 받았다.

이후 비에라는 시에라의 사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그게 황태자의 짓임을 알았고,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데까지 성공했다.

황태자라 해도 황족 살해는 중범죄.

비에라는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려 했지만 황태자가 먼저 수를 썼다. 증거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이 손발을 다 끊어낸 후, 쿠마 행성에 유폐시킨 것이다.

[황태자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요. 흥, 그래봐야 만년 황태자에 불과한 것을…… 제가 황도로 복귀하여 시에라 언니의 사망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는 게, 황태자가 몰락하는 신호탄이 될 거예요.]

비에라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감돌았다.

수한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여러 조건을 요구했다.

우선 임페리얼을 수리하는 게 필요했다. 소멸한 용기사를 대신할 새로운 용기사도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 더해 제국 내부의 자세한 정보도 얻어야 하고.

비에라는 모든 조건을 수락했다. 비록 쿠마 행성에 유폐된 신세라 많은 제약이 걸려 있지만, 그 정도 조건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거절한 조건도 있었다.

수한이 지구가 있는 차원의 수확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는 것이다.

[저장소를 파괴하셨다고 했지요? 그럼 다른 저장소와 대상 수확 차원을 곧 동기화할 거예요. 1달 정도 걸리겠네요.]

이미 1주가 지났으니 겨우 3주 정도 남았다.

3주 동안 비에라를 복권시킬 수 있을까?

차라리 칼라트라의 저장소를 부수고 다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차원 위상을 변화시킨다면, 칼라트라도 쉽게 수한을 포착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수한은 곧 그 계획이 가진 맹점을 깨달았다.

어차피 차원문 생성 장치는 칼라트라의 수도 행성인 파트라에도 있었다. 저장소들을 다 소멸시킨다고 해도 수확을 완벽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정보가 필요합니다. 누굴 어떻게 포섭해야 하지요?”

[제 궁전의 자료에 인명 정보가 있을 거예요. 그걸 참고하세요.]

“쯧,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그게 계약이잖아요?]

비에라가 요악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왕 수한과 연합군을 품에 안은 김에 제대로 부려먹겠다는 태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대로 간단히 수락하면 주도권은 완전히 비에라에게 넘어가고 수한은 거의 하인 취급을 받을 터.

“부족합니다.”

[뭐라고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일이 종료된 후 그런 적 없었다고 식언을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마련해야겠습니다.”

[감히, 지금 제국 황녀의 말을 못 믿겠다고 하는 건가요?]

“예, 못 믿겠습니다.”

수한은 당당하게 말했다.

비에라가 화가 난 눈치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갖 마법의 맹세로 약속을 강제할 것을 강요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만두겠다고 나왔지만, 수한은 그러라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아쉬운 건 둘 다 마찬가지.

결국 비에라가 한 발 양보를 했다. 세라프 종족이 마련한 마법의 계약서에 피와 영혼을 걸고 맹세한 것이다.

[제국 황족의 말은 금으로 된 행성보다 더 가치가 있거늘……]

그렇게 투덜거리지만, 수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경계했다.

세라프 종족의 계약서에 마법적인 구속의 힘이 있지만, 제국 기술이라면 그 정도는 해체할 수 있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 궁전의 통제권을 넘겨 받았다. 수한이 마음만 먹면 언제든 비에라를 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긴 수한은 초월 진화자니 기계 궁전의 방어 장치로는 막아내는 게 불가능하긴 하다.

수한은 미네르바에게 궁전의 통제와 정보 접속 권한을 맡겼다. 그러는 한 편 비에라가 내준 방에 모여 제국의 정보를 열람했다.

뚜렷한 홀로그램이 공중에 떠올랐다. 일견하기에 세라프 종족의 것과 비슷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질량이 존재한다는 것.

홀로그램을 만지는 게 가능하다. 심지어 영양분을 합성하여 식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만큼 동력을 소모하지만, 기계 궁전의 동력핵은 충분히 소모되는 동력을 감당해 냈다.

“으음……”

[무시무시하네.]

[과연 제국이로구나.]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기계 궁전의 정보 창고는 제국의 온갖 정보를 모두 저장하고 있었다.

일행이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제국의 전력.

바로 초능력자의 수였다.

무시무시했다.

1차 진화자부터 4차 진화자까지의 하급 초능력자는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다. 5차 진화자부터 실질적인 제국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5차 진화자는 1조 명, 6차 진화자는 100억 명, 7차 진화자는 1억 명 정도 되었다.

세라프식으로 따지면 S급이 1조, SS급이 100억, SSS급이 1억이라는 이야기.

차원 요새를 부수기 위해 모인 연합군을 보고 뿌듯한 감정을 느꼈었는데, 이제 보니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다행인 점은 초월 진화자부터는 수가 적다는 거였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1천 명을 겨우 넘었다. 그 정점인 반신 진화자는 제국에서도 딱 5명밖에 없었다.

황제, 그리고 네 명의 대군주.

세라프 종족의 분류 체계로 치면 G급으로, 역사 상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는 최강의 이능력자였다.

하나하나가 초월 진화자 수백에 필적한다고 했다. 모두 황실 소속이고,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부에서 반신 진화자가 나타나면 힘을 합쳐 죽여버린다고 하니, 권력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알 만 했다.

그것을 확인한 뒤, 그 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일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포획한 이능력자들로 뭘 하냐는 것.

간단했다.

힘의 근원을 만드는데 쓰였다.

이능력자를 끌고 와 영혼에 고통을 가하면 강한 힘이 생성된다. 그것을 특정 파장을 가진 보석에 집어넣으면 힘의 근원이 탄생한다. 그 힘의 근원을 가지고 동력핵을 만들기도 하고 레벨 업 도우미 등을 이용해 흡수하기도 했다.

더 강한 고통을 가할수록, 더 오래 고문할수록 더 많은 힘의 근원을 만들 수가 있다고 했다.

수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파벌의 제국인이라 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역시 영혼을 고문하여 힘의 근원을 뽑아 냈다. 레벨 업 도우미를 흡수시켜 각자의 계급을 향상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 껍데기만 남았다. 초능력은 남아 있으되 제대로 발현이 안 되는 것이다. 제국은 그것들을 일종의 전지 취급을 했다. 기계 괴수 같은 무인 병기에 집어넣고, 먹이 던져주듯 수확 차원에 보냈다.

이걸 연구해서 더 강해져 보라고.

덕분에 수확의 때에 얻는 힘의 근원이 더 많아졌다던가.

수확 대상들의 성장도 빨라지고, 간혹 수한처럼 Ex 등급의 이능력자도 나타나게 되었으니까. 운 좋은 놈은 고장난 레벨 업 도우미의 파편을 얻기도 하고.

한 가지 더.

수한은 궁전의 정보 창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새미의 이름도 있었다.

황실의 시조.

단순히 그것만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진작 눈치 챈 사항이니까.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원래 차원의 이수한만이 아닌, 수확 차원의 이수한이 수십 개나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읽은 수한의 눈이 깊어졌다.

각 수확 차원의 수한은 한결같이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외계의 문명을 접하고, 그 문명을 활용해 지구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것이다.

접하는 외계의 문명은 조금씩 달랐다. 전함 임페리얼인 경우도 있고, 시공 회귀 이전 이터누스 종족의 유산이나 제국의 무인 병기인 경우도 존재했다.

수한이 얻은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무인 병기.

이전에 칼라트라가 관리하는 수확 차원 중 한 곳의 수한이 레벨 업 도우미의 파편을 얻었다. 고생해가며 8익급까지 만들었고, 성장 한계까지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칼라트라에게 대항했고, 끝내 포획 당했다.

그 다음에는 고문당하여 영혼이 파괴당했다. 육신은 기계 괴수에 태워져 지구를 공격했다.

이후에는 익히 아는 대로.

세라프 종족에게 의해 기계 괴수가 파괴당했다. 그로 인해 일어난 산사태에 묻혔다가, 2015년 수한에게 발견되었다.

처음 레벨 업 도우미를 얻었을 때, 레벨 업 도우미는 수한의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런 다음에야 사용 권한을 주었다. 그걸 두고 세라프 종족은 보안 체계가 고장 나서 그랬을 거라고 수군거렸지.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기계 괴수 속의 제국인.

그 자가 다름 아닌 평행 차원의 수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유전자가 똑같고, 지금의 수한이 별 무리 없이 레벨 업 도우미를 사용했다.

수한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궁전의 정보 창고에 기록된 모든 이수한은 제국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 중 자그마한 승리를 거둔 이는 있어도 궁극적인 성공을 거둔 이는 없었다. 모조리 제국에 붙잡혀 힘의 근원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고 말았다.

“오빠……”

새미가 수한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녀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수한의 곁에는 항상 새미가 있었다. 함께 제국에 대항했고, 역시 붙잡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해피엔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라오그뉴가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다르지 않겠어? 지금까지 존재했던 이수한은 기껏해야 SSS급 이능력자였잖아? 너는 Ex급이니까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차원 요새만이 아니라 저장소를 부순 것도, 이렇게 내부 협력자를 얻은 것도 네가 처음이잖아.]

“꼭 그렇게 만들어야지요. 다른 세계의 제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저는 다를 겁니다.”

“오빠라면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대를 믿소.”

“사자님이야말로 이 사악한 제국을 멸망시킬 구원자이십니다.”

일행이 한 마디씩을 했다.

그나저나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수한은 1천 명이 넘어가는 초월 진화자들의 신상 정보를 하나하나 살폈다.

이들 중 6명을 포섭해야 한다.

대부분은 이미 충성을 맹세한 군주가 있었다. 그런 자들은 모두 배제했다. 스스로의 권력을 추구하는 이나 자유롭게 우주를 활보하는 자들의 목록을 뽑아 보았다.

꽤 수가 많아서 거의 100명에 가까웠다.

수한은 그들의 상세한 정보를 열람했다. 홀로그램에 코를 박다시피 하며 인적 사항을 머리에 박아 넣었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제국에서 초월 진화자쯤 되면 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한다. 온갖 종족 미인들의 시중을 받고, 전 우주의 행성에서 모여든 진미를 음미하며, 보석으로 지은 궁전에서 살 수 있다.

그런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돈과 권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염원과 이상, 통한에 접근하는 방식을 써야 할 것이다.

수한은 초월 진화자 중 몇 명을 골라냈다.

갈망하는 것이 있되,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들.

그것을 이뤄준다면, 유폐된 황녀를 지지하는 것쯤이야 흔쾌히 수락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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