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인 포섭 -2- >
[알고 싶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제 무한 폭뢰의 창을 그렇게 연속으로 쓸 수만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도 안 갑니다!]
독토르가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수한은 슬쩍 떠보듯 말했다.
[가르쳐 드릴까요?]
[가르쳐 준다고? 그게 정말입니까? 흠, 대신 저는 황녀 비에라를 지지해야 되겠지요?]
독토르는 찰떡 같이 수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게 조건입니다.]
[으음, 이거 고민 되네요. 그런데 제가 그 기술을 배워 쓰는 게 가능합니까? 엄연히 당신만의 궁극기일 텐데요.]
수한은 간단히 소멸의 빛에 대해 설명했다.
소멸의 빛이 실은 근원 부여와 세계 투시의 조합이라는 말을 듣자, 독토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네요. 저도 파멸 폭뢰와 무한 포격을 동시에 써서 무한 폭뢰의 창을 만들었지만, 그렇게 연사는 불가능한데요.]
[그게 핵심입니다.]
수한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독토르가 궁금증에 몸을 뒤트는 게 느껴졌다.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 기술, 저도 배울 수 있는 게 확실합니까?]
[가능합니다. 아주 어렵거나, 사람을 타는 기술은 아니니까요.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발현되는 형태도 제 것과는 차이가 있을 테고요. 그래도 제가 보여준 소멸의 빛과 비슷한 위력을 낼 거라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끄응!]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독토르가 탄 표범 기계병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우주를 날아다녔다.
수한은 독토르가 결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차피 당신도 썩 좋은 처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잉트리그의 군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당하기 전에 뭔가 수를 쓰는 게 좋을 겁니다.]
[음…… 그 말이 맞습니다. 좋습니다. 황태자도, 19 황자와 100 황녀도 나를 외면했으니 거적때기 황녀라도 손을 잡아야겠지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곤궁한 처지에서 도움을 준다면, 나중에 황녀 비에라가 복권되었을 때 그대의 조력을 잊지 않을 테니까요.]
[흥,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독토르는 비에라의 지지를 약속했다.
수한은 그 대가로 조합 기술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초능 장비를 만들어 동시에 초능을 발현하고, 교차해서 배열한 뒤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라는 것이다.
정신 감응으로 그 느낌을 선명히 전달했지만, 독토르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데, 시현을 해주면 안 됩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렇지, 절 따라오시지요.]
[따라오라니요?]
[조합 기술을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러려면 같이 있는 게 좋지요.]
[흠.]
독토르는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비밀을 유지하는 게 좋았다. 독토르는 자신의 대역에게 영지 관리를 맡겼다. 그러면서 말하길, 오래 속이진 못할 테니 며칠 안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독토르가 기계용에 탑승했다.
독토르는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었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인상 깊었다.
기계용의 조종석에 들어온 후, 독토르는 수한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누구냐?”
용모 자체가 일반적인 제국인과 다르니, 의아할 만도 했다.
수한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독토르는 수한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수한! 설마, 21세기 지구의 이수한이냐?”
제국에선 수한이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수한은 그저 씩 웃었다.
독토르는 수한을 한참 동안이나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실의 시조가 다시 살아 왔을 리는 없으니 당신은 수확 차원 출신이겠지요. 허 참!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구먼. 수확물과 손을 잡게 될 줄이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의 황녀를 위해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수확 차원 출신 초월 진화자라니 놀랍습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독토르는 놀라고 신기해 하긴 했지만 특별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제국 자체가 다중 차원을 지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없진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더 괴상한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독토르는 조종석의 의자 중 하나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래, 우리 황실 시조께서는 비에라 황녀를 어떻게 복권시킬 생각입니까?”
“초월 진화자 10명을 모을 생각입니다.”
수한은 짧게 비에라와 시에라, 황태자에 대해 얽힌 이야기를 했다.
독토르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비에라의 세 가신이 온전하니 당신까지 해서 다섯만 더 모으면 되겠습니다.”
비에라도 그렇고 독토르도 그렇고 수한을 거의 순혈 제국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초월 진화자의 위상이 컸다고 할까. 아니면 어느 평행 차원에서든 지구의 대표로 성장하는 이수한이라는 존재가 인상 깊다고 할까.
이렇게 첫 단추는 잘 꿰었다.
더구나 독토르가 다른 이들을 포섭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트리모의 퀴그 폰 반, 그리고 바츠의 핌 브로스와 원래 친분이 있다는 것이다. 모두 성격이 다르고 갈망하는 것도 달랐지만, 독토르의 설득에 힘입어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기계용에 탄 사람이 넷으로 늘었다.
수한과 독토르, 퀴그, 핌.
이제 칼데츠라한의 3인방만 남았다.
이터누스 종족과 결혼한 그들. 이미 그들의 조건을 들어주기로 비에라와 얘기를 했으니, 수한만 잘 대처하면 끝이 날 터였다.
포섭한 셋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그 미치광이들을 포섭하는 게 가능할까?”
“이터누스 종족과 결혼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작자들이야.”
“요즘엔 노예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던데?”
“쯧쯧,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사실 셋을 선택한 것은 반쯤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욕망으로 가득 찬 제국에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터누스 종족과 결혼했을까 싶었다.
순수하게 이터누스 종족의 인권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라면 적잖이 도움이 될 테니까.
비에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한을 위해서.
“차원 도약할 테니 모두 앉도록 하세요.”
“대체 그 미치광이들을 어떻게 포섭하겠다는 건지……”
“모르지, 수확 차원 출신이니 통하는 게 있을 지도.”
기계용이 칼데츠라한 성운으로 이동했다.
우주 외곽에 위치한 칼데츠라한 성운.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다. 행성 대부분 기운이 낮아서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 많았다.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행성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베일리프가 다스리는 행성 근처에 도착했다.
차원 위상을 변화시킨 채 행성으로 잠입했다. 세계 투시로 베일리프의 위치를 알아낸 후 용갑을 차고 날아갔다.
포섭한 이들은 기계용에 남겨두었다. 용이가 없어도 원래 컴퓨터가 기능을 유지시키고, 여러 위락 시설이 있으니 심심하진 않을 것이다.
[저기 봐, 세라프 종족이야!]
용갑 상태의 용이가 수한에게 속삭였다.
색색의 날개를 펄럭이며 비행하는 이터누스들이 보였다. 수한이 익히 봤던 세라프 종족과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다.
세라프 종족 특유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찾기 힘들었다. 좀 병약해 보였다. 날개의 색깔은 파리하고, 얼굴은 창백하여 윤기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존재감.
지구가 있는 차원계의 세라프 종족은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기운을 폴폴 풍긴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저 병약한 미녀를 보는 듯했다.
수한은 그 이유를 알 듯했다.
제국의 이터누스 종족은 성장할 때 충분한 힘의 결정을 공급받지 못한다. 그래서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을 지나치며, 저 멀리 보이는 성을 향해 다가갔다.
얕은 산 위에 서 있었다. 특이하게도, 지면에 아닌 공중에 건설되었다. 성에서 맑은 물이 퐁퐁 쏟아져 산의 계곡을 타고 흘렀다. 행성의 토착 생물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마른 목을 축였다.
수한은 성 앞에서 잠깐 정지했다.
차원 위상 및 투명화, 은신과 탐지 불가 등 각종 상태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상태였다. 여간해서는 허공에 떠 있는 수한을 감지하기 어려웠다.
성 안을 샅샅이 훑었다.
많은 수의 이터누스 종족이 존재했다. 성 밖의 이들과는 다르게 상당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최소한 S급에서 SS급은 되는 것 같았다.
종족 연합을 만든 세라프 종족을 연상시키는 그들.
‘설마?’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성 안에 있는 이들은 수확 차원 출신이 아닐까.
제국 영토 내의 이터누스 종족은 힘의 결정, 여기서는 힘의 근원은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다. 따라서 매우 병약하게 태어나는데, 유독 저들만 달랐던 것이다.
수한은 그들 사이에서 베일리프를 찾아냈다.
딱 한 명뿐인 초월 진화자라 쉬웠다. 베일리프에게만 정신 감응을 보내 밖으로 불러냈다.
[초월 진화자인가 보군. 난 내 성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내 집무실로 와라.]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앞서 셋보다 의심이 많았다.
거만한 척 뻗대며 한쪽으로 이동했다. 수한도 유령처럼 벽을 통과하여 베일리프를 따라갔다.
베일리프는 자기 집무실에 앉았다. 손을 흔들어 허공을 휘젓더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 할 말이 뭔가?”
두 눈동자가 수한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 또한 감각 계열이나 투시 계열 초능을 초월 진화시킨 모양이었다.
수한은 스스로에게 걸었던 모든 것을 해제했다. 그러자 허공이 일렁이며 용갑을 차려 입은 수한의 모습이 나타났다.
베일리프가 눈을 번쩍였다.
“뭐지? 제국 복색이 아닌데?”
수한은 용갑을 해제했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갑옷이 풀려나왔다. 허공에서 뭉치며 용이로 변신하자, 베일리프의 눈에 어린 광채가 짙어졌다.
“그건 수확 차원에서나 만드는 건데? 가만, 21세기 지구의 이수한이라고? 그럼 수확 차원 출신이겠군!”
원래 차원의 수한이 제국 역사에 크게 영향을 미쳐서일까. 제국인들은 쉽게 수한을 알아보곤 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말하는 수확 차원 출신입니다. 제국에 온지는 얼마 안 됐지요.”
“얼마 전, 칼라트라의 저장소 하나가 박살났다고 들었소. 수확 차원 출신 초월 진화자가 그랬다던데, 그게 당신이오?”
“그렇습니다.”
“허, 놀랍구려.”
베일리프가 수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한은 자연스럽게 베일리프의 앞에 앉았다. 베일리프도 자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 할 이야기라는 게 뭐요?”
“간단합니다. 유폐된 제 999 황녀 비에라를 알고 있겠지요? 그녀가 황도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으면 합니다.”
“거적때기 황녀 말인가? 그녀를 위해 일하나 보오? 그녀가 당신에게 무엇을 보장했기에?”
수한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자신과 동료들이 쿠마 행성에 의탁했음은 물론, 비에라가 복권될 경우 지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겠다고 한 것까지.
베일리프가 수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말을 믿나?”
수한은 픽 웃었다.
“그럴 리가요.”
세계 투시로 본 비에라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말도 있지 않나. 비에라가 변덕을 부릴 수도 있고, 어쩌면 황족 특유의 비술로 수한을 속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연히 대비를 했다.
복권된 뒤에도 수한을 배신할 수 없도록 각종 마법의 계약을 건 것.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가 배신한다면 활용할 계획. 배신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수한은 내심 비에라가 자신을 배신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파악한 베일리프가 자신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정도는 추측하겠지요. 그건 그렇고 내가 거적때기 황녀를 지지한다 해서 얻을 게 있소이까? 내 지지 조건은 알고 있겠지요?”
그럼, 알고 있다.
칼데츠라한 3인방을 누구도 거두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그들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는 황실의 인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선언한 까닭이다.
수한은 그 조건을 수락했다.
“비에라와 이미 얘기를 하고 왔습니다. 당신들의 조건을 수락하기로 했습니다.”
“흥,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오. 거적때기 황녀의 말을 믿으라고? 택도 없는 소리! 분명 우리를 몇 년 간 부려먹다가, 슬그머니 노예 해방을 철회할 것이외다.”
“그럴 테지요. 내가 본 비에라는 상당히 음험한 자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수한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베일리프에게 투사했다.
베일리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진심이오”
“당신들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떻습니까? 잘 하면 내 고향 행성도 안전해지고, 당신들의 평생 숙원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베일리프는 한참이나 수한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은 고향 행성이 곧 멸망할 처지이니 믿을 수 있겠지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단, 배신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시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요?”
“당신들은 순혈 제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도 많다고 들었고요. 그런데 스스로의 육체가 노화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터누스 종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이터누스 종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이유? 간단하오. 그게 옳다고 믿기 때문이오. 비록 이터누스 종족은 이전의 세계에 저지른 과오가 있지만, 매우 아름답고 고귀하며, 지성적인 종족이오. 한낱 건강식품으로 취급 받을 만큼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베일리프가 수한을 경계하며 정신의 벽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좋다.
함께 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