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 -1- >
이로써 필요한 초월 진화자 10명이 모두 모였다.
수한의 기계용에 7명이 탑승했다. 이제 비에라의 가신들에게 들러 편지만 전달하면 될 터였다.
새롭게 세 초월 진화자가 합류하자 기존의 세 초월 진화자들은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칼데츠라한 성운의 3인방은 제국 전체에서 경원시되는 인물이니까. 그들이 초월 진화자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진작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을 것이다.
수한은 그들을 각자에게 소개시킨 후 말했다.
“이제 비에라 황녀의 가신들만 데리고 오면 됩니다. 그것으로 초월 진화자 10명이 모두 모입니다.”
“초월 진화자 10명이라, 황태자도 무시하지 못하겠군.”
“황도에 간 다음 조심해야 할 거다. 예전에는 비에라 황녀가 힘이 없었으니 유폐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이젠 직접적인 수단을 쓸지도 모른다.”
독토르가 수한에게 경고를 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암살, 습격, 직접적인 공격, 그 모든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수한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7명을 기계용 곳곳에 착석시킨 후, 차원문을 열어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몽떼 파벌의 영토 구석.
비에라 황녀의 외가가 바로 몽떼 파벌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가신도 몽떼 파벌에 속해 있었다. 유폐된 지금도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에라 황녀의 편지를 전달한 즉시 흔쾌히 대역을 남겨 놓고 수한을 따라나섰다.
“드디어 고난의 시간이 다 지나갔구나! 알겠소. 기꺼이 황녀 저하의 명을 받들겠소. 우려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나, 영특하신 분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초월 진화자 10명을 모두 모으는데 딱 이틀이 걸렸다.
모두 대역을 자기 자리에 남겨둔 상태. 오랫동안 이목을 속이진 못하겠지만, 비에라의 정적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무렵엔 상황이 종료된 뒤일 것이다.
쿠마 행성에 귀환했다.
방어 기지들의 탐지 장치를 피해 비에라의 궁전으로 내려갔다.
소식을 들은 비에라가 깜짝 놀라 찾아왔다.
“벌써 10명을 다 모았다고요?”
최소한 몇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겨우 이틀 만에 초월 진화자들을 데려왔으니 놀랍기도 할 터였다.
세 가신이 비에라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황녀 저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황태자의 억압에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멍청해서 그랬는 걸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
비에라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시에라의 타살 증거를 찾아 헤매던 당시, 조금만 여유를 가졌으면 황태자가 암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터였다.
그러면 자신의 가신들을 지키는 한편, 더 빨리 흉수의 정체를 밝혔겠지. 그 경우 유폐 당하는 것은 비에라가 아니라 황태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모두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10명의 초월 진화자만이 아니라 연합군의 주요 인원들도 동석했다. 새미와 라오그뉴, 마엘른, 아르텔라는 물론 마니엘라와 몇몇 세라프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초월 진화자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독토르 등 먼저 포섭한 이들과 비에라의 가신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나중에 포섭한 베일리프 등은 세라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터누스 종족 언어로 이름을 묻는가 하면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비에라가 고무적인 얼굴을 하고 말했다.
“10명이 모인 이상, 더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바로 황도로 복귀하지요.”
“좋습니다.”
수한은 임페리얼의 상태를 확인했다.
수리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처음 차원 요새 공략을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더구나 제국의 장비를 도입해서 그런지, 수한의 초능을 더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초월 진화자들이 임페리얼을 살펴보고 인상 깊다는 듯 말했다.
“수확 차원에서 만든 전함 치고는 상당한데?”
“각 파벌의 기함 정도는 되는 것 같아.”
모두 임페리얼에 탑승했다.
속도와 은밀함이 가장 중요했다. 황태자 측에서 비에라의 복귀를 알아채기 전 모든 것을 끝내야 했으니까.
차원 위상을 부여하고, 온갖 탐지 방해를 건 뒤 천천히 하늘로 부상시켰다.
예전보다 들어가는 힘의 양이 확실히 줄었다. 이젠 서너 시간 동안 임페리얼의 차원 위상을 변이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비에라가 수한을 보며 말했다.
“황도는 12개의 차원 요새와 시공 요새 임페리얼에 의해 보호 받고 있어요. 아무리 차원 위상 변이라고 해도 그곳을 뚫고 가지는 못할 거예요.”
“황태자가 차원 요새의 총사령관이라고 하셨지요?”
“맞아요. 차원 요새 사령관 중에는 황태자의 가신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강하게 영향을 받아요.”
“어쩐다……”
수한은 머리를 굴렸다.
미네르바가 복사해 놓은 제국의 정보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임페리얼을 조종했다. 세 개의 방어 기지가 그리는 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우주를 향해 나아갔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쿠마 행성에서 충분히 벗어난 후, 차원 도약 준비를 했다.
비에라가 질문했다.
“어떻게 하려고요?”
“강행돌파 하겠습니다.”
“뭐?”
듣고 있던 독토르가 깜짝 놀랐다.
“농담이겠지요? 차원 요새의 사령관은 모두 원수 급입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시공 요새에서 대기 중인 근위대가 출격하곤 하지요. 그들은 전원이 초월 진화자이니, 아무리 초월 진화자 10명이라도 진압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아, 그렇게 무모하게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그랬다가 황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 받으면 우린 끝장이니까요. 12개의 차원 요새 중 블랙 프린스를 통과하겠습니다.”
“블랙 프린스? 아, 무슨 계획인지 알겠습니다.”
블랙 프린스는 12개의 차원 요새 중 가장 후방에 위치했다. 차원 요새 총사령관이 머무는 곳으로, 대대로 제국의 황태자들이 담당하곤 했다.
수한의 구상은 간단했다.
비에라를 유폐한 것은 황태자였다. 자신의 권력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제국의 황태자인 만큼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황제도 반신 진화자도 아니니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황태자의 가신 중에는 초월 진화자가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들은 우주 전역에 흩어져 있으니, 일시에 블랙 프린스를 돌파한다면 뭘 어쩔 것인가.
독토르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중앙군을 공격하지 않고 황태자의 사병들만 공격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런 거라면 해볼 만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명분이 중요하지요. 황녀님이 모습을 비춰야 합니다. 황실의 권력 투쟁으로 국한지어서, 중앙군이나 근위대가 개입하는 것을 막아야 하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비에라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새롭게 합류한 초월 진화자 중 정신 계열 초능을 초월 진화시킨 인물이 있었다. 그 능력을 활용하면 블랙 프린스는 물론 12개 차원 요새 모두에 비에라의 말을 전달하는 게 가능하다.
베일리프가 턱 아래에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블랙 프린스에는 초월 진화자 다섯이 있다고 알고 있소. 그 중 둘은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지만, 셋은 황태자의 가신이외다. 그리고 인근 차원 요새와 행성에서 지원 올 초월 진화자가 다 합치면 열 명 정도가 되오. 미리 대비를 해야 할 거요.”
“이미 생각은 해두었습니다.”
“설마 소멸의 빛을 쓰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다 상대가 죽기라도 하면 후폭풍이 엄청납니다. 제국에서 초월 진화자는, 거의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니까요.”
독토르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다른 걸 쓸 테니까 보기나 하세요.”
“다른 거라고요?”
소멸의 빛은 근원 부여와 세계 투시의 조합이다.
상대의 힘과 반대되는 힘을 실시간으로 부여하여,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그렇다면 상대의 차원 위상과 반대되는 차원 위상을 실시간으로 부여하면 어떻게 될까. 수한이 감옥함에서 당했던 것처럼, 끔찍한 공허의 감옥에 갇히게 되겠지.
제압용으로 수한이 구상한 조합 기술.
봉인의 빛.
수한이 정면 돌파 하겠다고 선언한 자신감의 근간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초월 진화자라 해도 여기엔 쉽게 대응하지 못할 터였다.
일단 초월 진화자들이 잠깐 해산했다. 각자 본거지로 돌아가 자신의 개인 기계병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임페리얼에도 남는 기계병은 있지만, 그 성능이 너무나 떨어졌다. 초월 진화자끼리의 격전에서는 기계병의 성능이 큰 부분을 차지하니, 출발하기 전 모두 가져와야 했다.
노획한 기계병을 일단 타고 다들 차원을 도약했다. 본거지에 들러 자기 기계병에 탄 후, 대역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 임페리얼로 돌아왔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
걱정과 우려 섞인 시선을 받으며, 수한은 미네르바에게 차원 도약을 명령했다.
[도약 지점은 블랙 프린스 인근의 달탄 항성입니다.]
황도의 차원 요새는 모든 차원문 생성과 차원 위상 변화를 감지했다. 따라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도착한 뒤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달탄 항성 인근에도 소형 방어 기지가 꽤 많았다. 은신 상태의 우주선을 발견하는 기뢰도 무수히 떠다녔다.
하지만 근원 부여와 세계 투시로 무장한 수한을 어쩔 수는 없었다. 때로는 사각지대를 파고들고, 때로는 단거리 공간 도약을 하며 블랙 프린스를 향해 날아갔다.
블랙 프린스가 보였다.
왕관 두 개를 상하로 겹친 후, 삐죽삐죽 작은 가시돌기를 꼽아 놓은 것 같은 형태.
보기만 해도 흉물스러웠다. 짐승의 송곳니 뭉치를 보는 듯했다. 크기도 커서 지구의 절반은 되고, 주위에는 호위 함대들이 송사리 떼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블랙 프린스를 가시거리 안에 둔 뒤 정지했다.
수한은 세계 투시로 블랙 프린스를 살폈다.
거대한 장벽이 블랙 프린스로부터 뻗어 나와 있었다. 그물망처럼 주변의 우주를 감쌌다. 몰래 그 장벽을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뚫고 가거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황태자가 블랙 프린스를 관리하는 이상 허가를 받기란 불가능하다. 수한은 비에라에게 눈짓을 했다.
“시작하지요.”
“좋아요.”
비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은 모든 속성을 임페리얼에게서 거두었다. 그러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블랙 프린스에서 폭발하듯 푸른빛이 뿜어졌다. 인근의 방어 기지들이 여태 침묵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전함이 탐지 장치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뭔가 행동을 취하기 전, 수한이 손짓을 했다. 임페리얼 함교 내부의 카메라가 비에라를 비추고, 한쪽에 앉아 있던 퀴그가 자신의 초능을 발현했다.
영상 하나가 블랙 프린스를 향해 쏘아졌다.
단순히 블랙 프린스 내부로만 투사되지 않았다. 블랙 프린스 내의 정보망을 통해 인근 차원 요새와 호위 함대, 방어 기지 전부 공유 되었다.
비에라가 나타났다.
제국 전통 복식을 차려 입고, 화사하게 꾸며 입고는 그들에게 호소했다.
[반갑습니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장병 여러분. 저는 위대하고 지고하신 황제 폐하와 주엘 황비 전하의 소생인 제 999 황녀, 비에라입니다.]
화면에 비친 그녀는 아름답고 고귀했다.
과연 제국의 황녀다운 자태라고 할까.
수한에겐 그저 악의 무리 수괴로만 보이지만 제국 병사들에겐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계 투시로 살펴보니 그들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면서도 비에라를 경외시하는 게 느껴졌다.
비에라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유폐당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증거는 없었다. 그저 말뿐이었다.
그래도 제국 병사들은 비에라의 말에 관심을 갖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도 청초하면서도 천진해 보이는 비에라의 외모가 큰 영향을 미쳤다. 황태자의 소문이 썩 좋지는 않다 보니 반사적인 이익을 얻은 것이다.
한참 비에라가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강렬한 정신 감응이 임페리얼의 함교를 뒤흔들었다.
[어처구니없군! 감히 진실을 왜곡하다니!]
임페리얼 전체가 진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함교의 중앙 화면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나타났다. 은색의 옷에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왕관 모양의 금속 장식을 여기저기 매달고 있었다.
궁전의 인명 정보에서 본 얼굴이었다.
황태자.
그 자신도 강력한 초월 진화자이자 군주 계급이었다. 벌써 2천 년 이상 황태자의 위치에 있으며, 폭군이자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했다.
황태자가 나타나자 비에라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