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40화 (241/254)

< 황제 -1- >

황도.

하나의 태양계를 통째로 일컫는 단어다.

1개의 항성과 8개의 행성으로 구성된 곳.

수한에게도 낯이 익었다.

다름 아닌 수한의 고향 태양계였던 것이다.

놀랍지는 않았다. 진작 예측했고, 쿠마 행성에서 열람했던 정보에도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런데 수한의 고향 지구와는 많은 점이 달랐다.

위성이 1개가 아니었다.

달 크기의 인공 구조물이 지구를 공전하고 있었다. 그것도 3개나 되어서, 24시간 내내 지구를 외부로부터 방어했다.

더구나 화성과 목성 사이, 유성대에 커다란 금속 행성이 보였다. 화성보다 약간 더 큰데, 금속 특유의 반질거림이 섬뜩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행성이나 위성과는 다르게, 길쭉한 직육면체 형상이라 좀 특이했다.

시공 요새 임페리얼.

이름이 의미심장했다. 다름 아닌 전함 임페리얼이 오랜 시간 동안 개보수를 거쳐 변모한 거였다.

차원 요새에서 벌어진 소요는 여기까지 전해진 뒤.

크고 작은 전함 십여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정지 하십시오. 친위대 제 15 원수 가르소 폰 데테라고 합니다. 999 황녀 저하의 존안을 뵐 수 있겠습니까?]

[허락하겠어요.]

[잠시 그쪽으로 건너 가겠습니다.]

함대는 정지하고, 소형 우주 비행기만 몇 척 전함을 빠져나왔다. 수한은 임페리얼의 격납고를 열게 하여 그것들을 받아 들였다.

흑인 혼혈로 보이는 건장한 여성이 앞장 서서 함교에 입장했다. 제국군 복색을 갖추고, 얼굴의 반만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두 눈이 칼날처럼 매섭게 빛났다.

가르소는 함교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귀빈석에 앉아 있는 비에라를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그 날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예, 강녕하셨는지요?”

비에라가 한 손을 내밀자, 가르소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오신 거지요?”

“맞아요. 부탁드릴게요.”

“영광입니다, 황녀 저하.”

그 뒤에는 쉬웠다.

가르소의 함대만 아니라 몇 개의 함대가 더 붙었다. 그들이 임페리얼을 호위하듯 인도하자, 아무런 방해 공작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에겐 아직 충분한 힘이 남아 있었다. 비에라의 말처럼 치명적인 증거가 비에라에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비에라가 황도에 닿는 것을 저지해야 했다. 한 판 전투에서 밀렸다고 포기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베일리프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를 내칠 생각이신 것 같소.”

“이들에게 황제의 입김이 닿았다는 겁니까?”

“그렇소.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하긴 지존은 2인자를 만들지 않는 법이고, 황태자의 치세가 수천 년이 넘어 파탄이 드러나고 있으니…… 그건 그렇고 이제 당신도 황제 폐하와 황녀 저하께 존칭을 붙이시오. 이터누스 종족들 간수도 잘 하고. 나나 다른 이들은 상관없지만, 당신들에겐 사지나

다름없으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수한은 베일리프의 말을 알아들었다.

제국 정계에 한바탕 피바람이 휘몰아칠 모양이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황태자를 그냥 내칠 수는 없으니, 비에라가 내밀 증거를 핑계 삼을 듯했다.

비에라도 그것을 눈치 챘다. 입가에 득의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베일리프가 다시 속삭였다.

“우리도 나중 일을 생각해 봐야겠소. 황족들은 자기들 말이 금으로 된 행성보다 무겁다고 주장하지만, 자기들한테 이득이 된다면 교묘하게 말을 바꾸는 무리니까.”

수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 말씀드린 대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걱정 마시오.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으니까.”

이윽고 황궁이 위치한 행성에 도착했다.

지구.

제국에서는 그저 황궁이라고 부르는 태양계의 3번째 행성.

수한이 보던 지구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푸른 바다가 행성의 표면을 덮고 있고, 육지에서는 노란 빛들이 반짝였다.

그 중에서도 우주에서도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굵고 높은, 원통형 탑 하나.

여의도를 중심으로, 서울 전체보다 큰 탑이었다. 그 높이가 어마어마하여 성층권을 돌파하고 있었다. 궤도 엘리베이터를 통해 우주 정거장과 연결되어 있는데, 우주 정거장의 크기도 커서 항공모함 수십 척을 모아 놓은 듯했다.

저곳이 바로 황궁.

황제와 비빈들, 그리고 시종과 시녀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수만 1억이 넘는데, 그 많은 수가 황제 단 한 명을 위해 사는 것이다.

임페리얼을 호위하던 함대들이 멈췄다.

[저희에게 허락된 공간은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뜻을 이루시길……]

임페리얼만 홀로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작은 무인 방어 기지들이 감시의 눈길을 번뜩였다. 몇 개는 아예 임페리얼이 들러붙었다. 내부를 철저히 감시하며, 황궁의 우주 정거장을 향해 인도했다.

쿠웅.

우주 정거장에 정박하자 육중한 진동이 일었다.

비에라와 함께 임페리얼에서 내렸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임페리얼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근위대가 마중을 나왔다. 초월 진화자 스무 명으로 이뤄진 막강한 집단이었다. 혹시라도 난동을 부릴까 봐 나온 건데, 이게 근위대의 전부가 아니라고 하니 실로 무시무시했다.

“저흴 따라오십시오.”

대장이라는 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둥근 구슬 같은 것을 타고 이동했다.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순식간에 우주 정거장을 지나쳐 궤도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다.

지상에 도착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내이지만 공기가 싱그러웠다. 나무들도 곳곳에 있었다. 겉에서 볼 때는 회색 건물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밖이 다 투과되어 보였다. 그 덕에 실내가 아닌 실외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녀들이 비에라와 일행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시간이 되면 황제 폐하께서 부르실 겁니다. 기다리고 계세요.”

“예법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 무장을 해제해야 했다.

수한은 몸에 주렁주렁 찬 무구들을 내려놓았다. 시녀들 또한 강력한 초능력자여서, 이능이 걸린 물건이라면 반지 하나 장신구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이능 장비를 모두 해제하는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목욕을 할 때라도 근처에 장비를 놔두었으니까.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알현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 초월 진화자들이 모여 알현을 청해서 이 정도이지, 1년 2년씩 미뤄지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과연 제국의 황제는 어떤 인물일까.

수한은 속으로 기대감을 가졌다.

시녀들의 인도를 받으며 대전으로 갔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엄청나게 거대한 문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몰라도 인력으로 여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초능력자 시녀들이 수십 명도 넘게 달라붙어 힘겹게 문을 열었다.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꼭 고대 그리스 신전을 보는 듯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고, 둥근 기둥이 곳곳에 서 있었다. 천장에서는 별빛과 같은 조명이 있어 대전 안을 환하게 밝혔다.

지독하게 화려했다. 다이아몬드와 흑진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루비 등 온갖 보석으로 벽과 천장, 바닥과 기둥을 장식해 놓았다.

저 앞, 대전의 끝에 거대한 옥좌가 보였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형체는 없이 빛 무리만 어려 황홀한 빛을 뿌렸다.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워낙 밝아 알아보기는 힘든데, 옥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화려한 황금옷에 황금관을 쓴, 자신이 황제라고 웅변하는 듯한 남자였다.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비에라와 다른 초월 진화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위대하시고 지고하시며 우주와 모든 은하, 시간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오체투지의 자세.

수한도 엉겁결에 따라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더러웠다.

따지고 보면 제국의 황제는 수한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작자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릎까지 꿇은 거 아닌가.

어쩔 수 없었다.

복수를 달성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분이 더럽다고 절을 하지 않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다. 처음 보는 자도 있고, 몇 번 본 자도 있구나. 호오, 수확 차원 출신도 있군. 비에라, 준비를 많이 했나 보구나.”

“과찬이십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비에라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고할 것이 있다고?”

“예, 황제 폐하. 3백 년 전 벌어진 789 황녀 시에라의 죽음에 대해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비에라는 흉중에 품고 있던 말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갑작스러웠던 시에라의 죽음. 석연치 않다 생각하여 그 뒤를 캐던 나날들. 그렇게 수집한 증거……

황제는 듣고 있다가 한 마디를 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나 네 말만으로 황태자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증거를 갖고 있느냐?”

“예, 황제 폐하. 잠시 소신이 초능을 발현해도 되겠습니까? 대전에 피를 좀 뿌릴 것 같은데, 윤허해 주신다면 즉시 증거를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네 신체에 증거를 보관한 거냐? 흥미롭구나. 나도 그러는 이들이 있다는 건 말로만 들었거늘…… 그리 해보아라.”

어차피 비에라는 6차 진화자에 불과하다. 반신 진화자인 황제와는 하늘과 땅 정도가 아닌, 우주 전체와 모래 한 톨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황제는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듯한 심정으로 비에라의 요청을 허락했다.

비에라가 일어나 앉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시행하겠습니다.”

오른손을 들어 쭉 뻗었다.

왼손은 이마에 가져갔다. 왼손에서 흐린 빛이 새어나와 머리 전체를 감쌌다.

다음 순간, 오른손을 칼날처럼 이용하여 자기 두개골을 도려냈다.

“헉!”

“황녀님!”

초월 진화자들이 아연실색했다.

수한도 적잖이 놀랐다.

비에라는 자기 두개골을 허공에 띄워 놓았다. 오른손을 투명하게 만들어 자기 뇌를 헤집었다. 그 끝에 작은 칩 같은 게 하나 딸려 나왔다.

두개골을 다시 자기 머리에 덮더니 흰 왼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상처 났던 부위가 말끔하게 사라지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수한을 비롯한 초월 진화자들이 질린 얼굴로 비에라를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증거물을 자기 뇌 안에 숨기고 있었나 보다. 두개골 안에 봉인하고 모종의 수법으로 감추니, 황태자도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제법이구나.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칩에 네가 수집한 증거가 들어 있느냐?”

“예, 황제 폐하.”

“가져와 보거라.”

비에라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비에라의 머리칼도 피떡이 졌지만, 은근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모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비에라는 대전을 걸어갔다. 황제의 앞에서 정지하여 손을 내밀자, 어느새 말끔해진 칩이 둥실둥실 떠서 황제를 향해 접근했다.

황제는 칩을 받아들었다.

스스로의 초능으로 칩을 살펴보더니, 격노한 음성을 터뜨렸다.

“입실리온 이 놈! 제국을 통치하라고 황태자 직을 맡겼거늘, 감히 자기 누이를 암살해? 지온 대장!”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비에라와 초월 진화자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근위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근위대장을 보며 노성을 질렀다.

“근위대 1개 분대와 친위대의 1개 군단의 소집 권한을 주마. 당장 이 패륜아를 잡아오도록 해라! 이 패륜아를 일벌백계하여, 황실 혈통의 무거움을 전 은하와 모든 차원이 알게 할 것이다!”

“황명을 받드나이다!”

근위대장이 씩씩하게 대전을 빠져나갔다.

황제는 아직도 엎드려 있는 초월 진화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도 이제 편히 앉도록 해라. 어디 보자, 비에라와 그대들 덕에 패륜아를 축출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대들에게도 포상을 내려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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