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41화 (242/254)

< 황제 -2- >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저희는 패륜아를 몰아낸 것으로 족하옵니다. 바라옵건대, 황제 폐하의 옥체가 영원토록 빛나기를 기원할 뿐이옵니다.”

비에라의 가신 중 하나가 얼른 아첨을 했다.

다른 여섯 명은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지만 미처 말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대가를 받기로 하고 지지한 것이니 발언권은 아무래도 좀 약했던 것이다.

황제가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고마운 일이로구나. 그대들의 충정은 금방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을 것이다.”

얼마간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대전의 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제국인들이 입장했다.

하나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각자의 자리에 가서 섰다.

제국의 상층부, 무슨 대신이니 장군이니 하는 이들.

수한은 폭탄을 터뜨려 이들을 싸그리 몰살시켜 버리는 망상을 했다.

그렇게만 해도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텐데.

금방 고개를 저어 망상을 쫓아 보냈다. 제국인 초능력자들에게 마음을 읽히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황제의 시선이 훑듯이 수한을 한 번 보고 지나쳤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찬 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한 경각심이 수한을 일깨워서, 아까 그 생각은 물론 제국에 대한 적대감까지 지워 버렸다.

수십 명의 제국인이 들어온 뒤로도 시간이 꽤 지났다.

뭘 기다리는 건가 싶어 슬슬 지겨워지는데, 살짝 열린 대전 문 사이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라! 감히 누구에게 더러운 손을 대는 것이냐?”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근위대 초월 진화자들이 양쪽에서 황태자의 팔을 붙잡고 끌고 오고 있었다. 황태자가 악을 썼지만 온갖 봉인 초능이 억압하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 황태자의 가신들과 근위대가 따라오는 중이었다. 가신 중 몇몇은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었지만 대부분은 침착했다. 사전에 황제에게 언질을 받아, 진작 충성의 대상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근위대가 황태자를 대전 중앙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미 죽은 사람을 보는 듯 눈초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느낀 황태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신경 쓸 곳은 근위대들이 아니었다.

황제의 준엄한 말이 떨어졌다.

“네 이 놈! 제국의 통치를 맡겨 놓았더니 감히 제 누이를 살해해? 네가 그러고도 제국의 황태자라 할 수 있느냐? 마땅히 황태자의 위를 폐하고, 불가포식형(不可飽食刑)에 처하여 추하게 늙어 죽게 해야 할 것이다!”

“황제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옵소서! 소신이 잘못했사옵니다!”

황태자가 눈물로 호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황제가 노성을 지르며 황태자를 폐위시켰다. 우주의 끝에 있는 공허의 경계로 유폐한 뒤, 이터누스의 종족의 피와 살을 포식하는 것을 엄금했다.

단순히 명령만 내린 게 아니었다. 자신의 초능을 이용해 황태자의 영혼에 강력한 제한을 걸었다.

이제 황태자는 스스로의 입에 이터누스 종족의 피와 살이 들어오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심각한 증상을 나타낼 것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데려가라!”

“안 돼!”

황태자가 울부짖었다.

소용없는 짓.

근위대 초월 진화자들이 황태자를 끌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황태자는 지금 이 길로 우주의 끝으로 추방되어, 늙어 죽을 때까지 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수한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천수를 다해 죽는 게 형벌이라니?

21세기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주위 초월 진화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제국인 입장에선 무거운 형벌인 것 같았다.

대전의 문이 닫히고, 황태자가 일으키는 소란이 일단락되었다.

제국인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아무리 초월 진화자에 뭇 우주에 영향력을 드리운 은하대신, 수많은 함대를 거느린 장군이라 해도 반신 진화자인 황제 앞에선 파리 목숨에 불과했다.

무슨 핑계를 대며 자신을 숙청할지 몰랐다. 이럴 때는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최선이었다.

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의 위가 비었으니 채워야겠군. 추천할 자가 있나?”

제국에서 황태자는 일종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일을 수행했다.

황제는 기본적으로 정무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주 전체의 미녀를 수집하고 그들과 더불어 쾌락을 즐기는데 골몰했다. 제국 전체가 결딴 나도 황도와 시공 요새 임페리얼만 온전하면 상관없다는 투였다.

황태자는 그런 황제가 잘 놀 수 있게 모든 정무를 처리했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근위대와 친위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때때로 황태자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반역을 방지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제국에서 황태자는 양날의 검이었다.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것은 분명 매혹적이지만, 언젠가 이렇게 숙청당하여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황제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느냐?”

수한은 슬쩍 목을 가다듬었다.

뜻밖의 상황이지만 좋은 기회였다. 비에라를 만나면서 머릿속으로 구상한 계획을 더 빨리 성사시킬 수 있을 테니까.

궁전에서 주입 받은 지식대로, 제국 예법에 따라 발언했다.

“21세기 지구 출신 초월 진화자 이수한입니다. 이번 일에 공헌한 제 999 황녀, 비에라 저하를 추천합니다.”

“호오, 비에라를?”

“예. 비에라 저하께서 이번 일에 보여주신 용기와 집념, 지혜는 제국의 황녀로서만이 아니라 황태자로서도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비에라 저하라면 폭정을 저지른 황태자가 제국에 남긴 상처를 금방 치료하고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가열 겁니다.”

저 앞쪽에 선 비에라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수한은 무시했다.

새롭게 세운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비에라가 황태자의 자리에 앉는 게 필수적이었으니까.

비에라를 지지한 초월 진화자들도 흥미롭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신들의 표정은 좋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기대 섞인 얼굴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태자가 되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도 기쁜 일이니까. 그 끝이 무조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수한의 말을 들은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재미있구나. 무료한 삶에 이 정도 흥미를 주다니, 실로 대단하다. 하긴 그렇겠지. 홀로 유폐된 처지에서 수확 차원의 초월 진화자를 끌어들여 황태자를 실각시킬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느냐? 비록 비에라가 6차 진화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다만, 그야 힘의 근원을 충분히 흡

수하면 될 일이니 아무래도 좋지. 황녀 비에라는 앞으로 나오도록 하라!”

“예, 황제 폐하.”

비에라는 화사하게 웃었다.

얼굴 구석에 꺼려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황제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

4명의 반신 진화자가 아니고서는 그 명을 티끌만큼도 어길 수 없었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죽어야 했다.

비에라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창대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제 999 황녀 비에라를 제국의 황태자 위에 봉한다. 새로운 황태자는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제국에 봉헌해야 할 것이다.”

“영혼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좋다. 황태자는 블랙 프린스로 가보도록 해라. 전 제국이 황태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국에서는 남녀 불문 황태자가 될 수 있나 보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좌 앞에 우뚝 선 채 대전을 굽어보자, 대전에 모여 있던 이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참 즐거운 날이다.”

황제가 흐릿한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유폐되었던 황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복귀한 것도 놀랍지만, 그 중심에 수확 행성 중 21세기 지구 출신 이수한이 있다는 것도 놀랍구나.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기대가 된다. 그대, 이수한은 고귀한 황실 혈통의 시작이기도 한 인물이니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과찬이십니다, 황제 폐하.”

수한은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황제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꼭 수한이 세운 계획을 꿰뚫어 본 것 같은 말.

그것을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황제의 몸이 빛으로 변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전 안의 제국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폈다.

그들이 수한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황제가 언급하기 전까진 몰랐지만, 듣고 나니 수한의 정체를 눈치 챈 것이다.

수군거리는 그들을 지나, 비에라가 수한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이봐요! 대체 무슨 생각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물어요?”

비에라가 따지듯이 쏘아붙였다.

황태자가 됐다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수한은 씩 웃었다.

“좋지 않습니까? 이 거대한 제국에서 2인자의 위치에 올라섰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저나 칼데츠라한의 3인방에게 약속한 것을 시행하려면 그 정도 위치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베일리프님?”

“그 말이 맞소. 일개 황녀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애당초 둘이 밀약하기를 비에라를 황태자나 그에 준하는 지위로 올리기를 목표로 했다. 그걸 이렇게 빨리 달성할 줄은 몰랐지만, 모로 돌아가도 서울만 가면 될 일이었다.

둘에게 약속했던 것을 떠올린 비에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한에게 약속한 것은 그래도 어렵지 않다. 황태자가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명령서 하나 쓰고 도장만 찍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칼데츠라한 3인방은 다르다.

이터누스 종족 해방은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섣불리 그런 걸 선포했다가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것은 물론, 언제 어떻게 암살당할지 몰랐다.

결국 핑계를 댔다.

“제가 황태자가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은 제대로 권위를 발휘하기는 힘들어요. 제국의 불문율처럼 최소한 초월 진화자가 되고, 초월 진화자급의 가신을 스무 명 정도는 거느려야 무리 없이 제 명령을 관철시킬 수 있을 거예요.”

“초월 진화자? 스물 이상의 가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닙니까?”

베일리프가 욱 했지만 수한이 소매를 잡으며 말렸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베일리프님도 생각을 해보세요. 지지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야심차게 일을 추진해봐야 간단히 엎어지고 말 겁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한 다음 단번에 휘몰아쳐야하지 않겠습니까? 고작 1, 2년 동안 지속시켜 봐야 아무 효과가 없으니까요.”

“으음, 그대의 말이 옳소.”

베일리프는 겨우 진정했다.

애초에 자신의 숙원이 쉽게 해결될 거라고 보진 않았지만, 지지한 황녀가 황태자가 되자 잠시 흥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베일리프를 진정시켜 놓은 뒤 비에라에게 말했다.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유폐 당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전하의 영지는 영락했고, 외가인 몽떼 파벌은 전하에 대한 지원을 끊었습니다. 허울뿐인 황태자 자리라도 없으면, 전하께서 예전의 영화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국인이 아니니 잘 모르지만, 힘

을 잃은 황족의 처지는 그리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고요.”

“음…… 일리가 있네요.”

황태자를 끌어내린 상태에서 비에라가 일개 황녀로 남았다고 생각해 보라. 실각한 황태자의 가신들이 그냥 있으려고 하겠나.

당분간은 몸을 움츠리겠지만, 원한을 품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하지만 황태자가 되어 있으면 감히 뭔가 수작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뜻을 알아들은 비에라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건 그러네요. 알았어요. 하지만 제가 황태자가 된 이상 여러분이 저흴 좀 더 도와주셨으면 해요. 지금 제가 믿을 거라곤 좋으나 싫으나 여러분 밖에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수한은 흔쾌히 비에라의 제안을 수락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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