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욕전 -2- >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독토르에게서 출전 요청이 온 것이다.
[급합니다! 포위당했어요! 칼라트라의 초월 진화자들이 총 출동한 것 같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놈들이 차원문 생성 방해 장치를 작동시키려고 합니다!]
화면 안에 위압적인 형태의 기계병들이 가득 했다.
익숙한 존재도 보였다.
천사, 악마, 난쟁이 형태의 기계병.
처음 제국을 공격하고 나서, 수한을 제압했던 칼라트라의 초월 진화자들이었다.
수한의 눈이 번뜩였다.
설욕할 기회가 온 것이다.
당장 용기사에 올라탔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줄랑과 콩코드도 합류했다.
임페리얼을 뛰쳐나간 뒤, 우주에서 차원을 넘었다.
차원문이 열리자 집중 공격이 쏟아졌다.
정확한 정체는 몰라도 지원군이 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무수한 파괴 광선과 강력한 초능이 우주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수한도 그럴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근원 부여를 통해 차원 위상을 변이시킨 뒤 차원문을 통과한 참이었다. 덕분에 집중된 공격이 모두 허공만 갈랐다.
줄랑과 콩코드도 각자 특기를 발휘해 공격을 막거나 피했다. 나오자마자 궁극기가 날아오는 상황이 아니라면, 초월 진화자에겐 이 정도는 효과가 없었다.
[도착하셨군요!]
독토르가 말을 걸어왔다.
기계병이 엉망이었다. 다리는 하나 사라졌고, 전신에 상처가 나 있었다.
베일리프나 다른 이들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수한이 조금만 더 늦게 지원을 왔어도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셋이 도착하자 전투가 잠시 멈췄다.
수한은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잉트리그 쪽 초월 진화자는 고작 네 명인데, 칼라트라는 무려 열두 명이었기 때문이다.
열둘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초월 진화자 일곱을 동시에 둘러쌌다.
익숙한 정신 감응이 날아 왔다.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더니, 뭘 믿고 여기로 기어들어온 거냐? 이번에야말로 붙잡아 힘의 근원을 추출해주마.]
다름 아닌 드미트리였다.
수한은 차갑게 비웃음을 날렸다.
[힘의 근원을 추출하겠다고? 그게 말처럼 쉬울까? 나야말로 네놈의 육체를 부수고 레벨 업 도우미를 흡수하겠다!]
[과대망상도 그 정도면 전문 초능 치료를 받아야겠다!]
드미트리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홀로 용기사를 박살내고 수한을 잡았던 게 겨우 1달 전이었다. 그 사이에 자신보다 강해졌으리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수한이 폐태자를 일대일로 쓰러뜨린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폐태자가 방심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얕볼 수는 없지 않겠나.
용기사가 날개를 떨쳤다.
정지해 있던 용기사가 빛처럼 빠르게 돌진했다. 신속 계열 초능을 초월 진화시킨 상태라, 그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제법이구나!]
그러나 드미트리도 신속 계열 초능을 초월 진화시킨 상태.
천사 기계병이 기민하게 대응했다.
몸을 비틀며 초능을 발동했다. 거대한 몸이 쭉 미끄러지며 한쪽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검에서 붉은 섬광을 수십 번이나 쏘아 용기사를 견제했다.
동시에 정신을 집중했다. 검에 실린 힘이 중첩되더니 공간 저 편으로 녹아들었다. 검이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형체가 사라지고 어떤 이상한 것이 나타났다.
수한이 눈을 차갑게 빛냈다.
본 적이 있는 기술, 허무의 검이었다.
저번에는 무력하게 당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속도를 늦추었다.
광선총을 겨누고, 소멸의 빛을 쏘았다.
형태조차 사라진 검과 무지갯빛 영롱한 빛이 마주쳤다.
폭음 같은 것은 없었다. 충격파도 터지지 않았다.
하나는 존재 자체를 지우는 검. 또 하나는 상대의 특질을 해석하여 실시간으로 소멸시키는 빛.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결국 서로가 상쇄되었다. 허무의 검은 소멸의 빛을 지웠고, 소멸의 빛은 허무의 검을 해체시켰던 것이다.
[아니?]
놀란 음성이 터졌다.
전력을 다해 내친 궁극기였다. 그걸 이렇게 쉽게 파훼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냐.
다시 소멸의 빛을 쏘았다.
빛이 공간을 소멸시키며 날아가자 천사가 급히 몸을 뺐다. 워낙 빨라서 소멸의 빛이 저 멀리 빗나가고 말았다.
수한은 입맛을 다셨다.
소멸의 빛이 일단 맞으면 사기적인데, 초월 진화자는 얌전히 맞아주지 않으니 문제였다. 미래를 예지하거나 몸을 날려 피하는 것이다.
대신 그 뒤통수에 조롱을 날렸다.
[하하, 잘 도망가는구나. 꼭 쥐새끼 같은 걸?]
[건방진 놈!]
노호성이 수한의 뇌리를 때렸다.
섣불리 달려들진 않았다. 소멸의 빛이 가진 위험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초월 진화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드미트리까지 하면 무려 여섯 명.
아군은 모두 몸이 묶여 있었다. 남은 여섯이 각자 하나씩 전담하여 견제하는 것이다.
결국 수한이 수를 내야 했다.
칼라트라의 초월 진화자들이 위협하듯 한 마디씩을 했다.
[아무리 폐태자를 이겼다고 한들, 우리 여섯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궁극기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들을 한꺼번에 어쩔 수는 없다. 각오하도록 해라!]
수한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황태자와 싸우던 당시의 수한이라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뇌룡 질주로 좌충우돌하며 소멸의 빛을 몇 번 쏘고는 격침당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밀 무기인 빛의 질주가 있지 않나.
수한은 일단 광속만 발휘했다. 천사 기계병을 노리고 쫓아가, 광선총을 연거푸 쏘았다.
천사 기계병이 강렬한 안광을 뿌렸다.
[놈!]
여섯 초월 진화자 중 자신만 쫓아오니 자신을 만만하게 봤다고 생각했나 보다.
통상적인 공격인데도 약하지는 않았다. 혼돈이나 천멸, 지옥 속성을 몽땅 중첩시켜 쏘아댔기 때문이다.
천사는 붉게 물든 검으로 용기사의 공격을 하나하나 쳐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파괴 광선이 굴절되며 천사의 주변에서 온갖 속성들이 폭발했다.
때를 같이하여 칼라트라의 초월 진화자들이 달려들었다.
[끝장을 내주마!]
[각오해라!]
빛나는 검이 날아들고, 파괴 광선이 쏘아지고, 온갖 속박 계열 초능이 용기사를 압박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방어막에 혼돈 속성을 부여했지만 곧 깨졌다. 거신 강림도 마찬가지였다. 장비한 방패까지 박살이 났으니, 이제 용기사를 보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용기사의 몸이 한 줄기 빛으로 화했다.
순간적으로, 모든 초월 진화자들이 용기사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들이 경계하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전, 용기사가 천사 기계병의 배후에 나타났다.
소멸의 빛을 쓰지도 않았다.
거대한 벼락이 어린 검을 단번에 찔러 넣었다.
[커헉!]
답답한 신음소리가 났다.
천사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금색 광채가 휘몰아쳤다. 방어막이 강화되며, 용기사가 찌른 검을 밀어냈다.
그러나 용기사의 대처가 더 빨랐다.
검을 통해 소멸의 빛이 발현되었다. 용기사가 검을 휘두르자, 천사가 단번에 두 조각났다.
뒤이어 용기사가 몸통으로 천사를 들이받았다.
천사의 몸이 으깨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드미트리의 몸도 곤죽이 되었다. 언뜻 황금색 빛이 새어나왔지만, 용기사의 몸통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그걸 낱낱이 해체해 버렸다.
이것으로 끝.
글자 무더기가 날아와 수한의 왼쪽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항목이 성장 한계에 도달해 더 강해지는 것은 없었지만, 드미트리의 죽음을 증빙했다.
원래 초월 진화자는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1명이 죽기라도 하면 강력한 후폭풍이 휘몰아친다. 특히 근위대나 친위대, 중앙군 소속 초월 진화자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세가 안정되었을 때의 이야기. 걸핏하면 각 파벌이 내전을 벌이는데 언제나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수한은 마음 놓고 드미트리를 죽여 버렸다.
초월 진화자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소르아님!]
[드미트리! 말도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용기사가 몸을 돌렸다.
빛이 쏘아졌다.
광속에 근접한 움직임.
눈으로 보고 반응해서는 대처할 수 없다.
다섯 기계병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리 치열함이 부족하다 해도 그들 또한 역전의 용사. 진작 서로의 정신을 하나로 묶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투시 계열 초능으로 용기사의 예상 접근 지점을 파악하고, 감각 계열 초능으로 용기사가 접근하는 것을 느꼈다.
즉각 반격이 쏟아졌다.
다섯 중 둘은 궁극기를 날렸다. 셋은 용기사의 공격에 대비했다. 즉석에서 짠 것치고는 훌륭한 대응이긴 했는데, 이걸로 당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빛이 그대로 궁극기를 지나쳤다.
차원 위상을 부여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너무 빨라서 그런 거였다. 궁극기를 발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면, 용기사는 다섯 기계병의 주위를 열 번은 돌고도 남았다.
퍽!
뒤에 처져 있던 난쟁이 기계병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난쟁이 기계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변조, 구현, 투시 계열 초능을 초월 진화시켜 원거리 지원에 특화된 초월 진화자가 타고 있었다. 덕분에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대처하는 게 좀 늦었다.
자신이 공격 목표라는 것을 깨닫고 앞쪽으로 몸을 날렸으나, 용기사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초월 진화자들이 그걸 보고 바짝 긴장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의 초월 진화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건 군주 계급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대체……]
[말도 안 돼!]
수한이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헉, 헉, 헉.”
숨이 가빴다.
전신에서 땀이 질척하게 났다.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는 거였다. 아무리 초월 진화자라고 해도 몸에 무리가 갔다. 소모하는 힘도 힘이지만, 몸에 걸리는 과부하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제 넷.’
수한은 이를 악물었다.
넷만 더 처리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을 상대하러 나선 초월 진화자들을 모두 끝장낸다.
기계병들이 한층 신중해졌다.
한 곳에 뭉친 채 용기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눈을 부릅뜨고 용기사를 살피며, 견제하듯 광선포를 거푸 쏘았다.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는다면 수한으로서는 고마운 일.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그 잠깐의 휴식으로 수한의 몸이 정상에 가깝게 회복되었다. 체력 능력치가 50이 넘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공격해!]
칼라트라의 초월 진화자들도 그것을 눈치 챘다.
공격을 재개하지만, 수한은 또 빛의 질주를 활용하여 빠져나갔다. 멀찍이 돌아가 그들 중 하나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또 당할 줄 알고?]
이번에는 피했다.
그러나 수한의 공격은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투창을 던졌다.
투창이 공허한 우주 공간 한 편에 꽂혔다. 초월 진화자들이 그걸 보고 비웃었는데, 뜻밖에도 맹렬한 폭발과 함께 소멸의 빛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놀란 초월 진화자들이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덕택에 수한이 빛의 질주로 쫓아가 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둘이 죽고 둘만 남았다.
악마 형태 기계병과 육중한 돌격병 형태의 기계병.
당연한 말이지만, 둘만으로는 용기사를 저지할 수가 없다.
다른 기계병들이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한의 동료들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렇게만 해도 승리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몇 번의 공방 끝에, 용기사는 마지막 두 명까지 결딴내 버렸다.
그 대가로 수한의 몸이 흠뻑 땀에 젖었다. 용기사에 장착된 투창 세 자루도 모두 썼다. 최후의 발악에 얻어맞아서 복부에 큰 상처가 남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후퇴! 후퇴!]
칼라트라의 초월 진화자들이 일제히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아군 초월 진화자들이 기를 쓰고 방해했다. 예전에 드미트리가 썼던 차원문 생성 방해 초능과 비슷한 종류의 초능을 쓴 것이다.
결국 남김없이 사냥 당하고 말았다.
초월 진화자들이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이 흘리는 레벨 업 도우미를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하나는 독토르가, 하나는 베일리프가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대부분의 레벨 업 도우미는 수한이 독식했다.
아군 초월 진화자들이 양보하라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무시했다. 미르 공격대 소속의 이능력자도 아니고, 제국인들에게 나눠줄 건 없었으니까.
그 결과, 수한의 손목에 몇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10익급 이종의 레벨 업 도우미 흡수 완료.]
[1000 레벨 성장 한계 확인.]
[초월 진화 초능 3개 확인.]
[군주 계급으로 진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