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44화 (245/254)

< 군주 >

원수와 군주 계급의 차이는 크다.

가장 큰 차이점은 3개가 아닌 6개의 초능을 초월 진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만큼 더 강해진다.

또 제국의 주요 직책을 맡으려면 군주 계급이어야 했다. 대표적으로 황태자나 각 파벌의 수장, 우주 군단을 거느린 대장군이나 시공 요새 사령관이 그러했다.

애초에 군주 계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원수 수십 명을 꺾었다는 것이니 어딜 가도 대접을 받았다.

당장 독토르와 베일리프를 비롯한 초월 진화자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군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놀랍습니다. 군주가 되실 줄이야!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예의만 차렸다면, 이젠 진심으로 존경심을 보이고 있었다.

무려 6대 1의 전투를 단신으로 이겨낸 인물이었다. 수확 차원 출신이건 뭐건, 존경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니까.

온갖 찬사가 쏟아지지만, 수한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초월 진화자들과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았을 뿐이다. 인간적인 유대감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어떤 찬사를 받아도 기쁘지가 않았다.

[바로 진격합시다. 이 기회에 아주 요절을 내지요.]

[좋습니다. 칼라트라를 잡아먹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초월 진화자들이 눈을 빛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 시점에서 황태자가 중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비에라는 황태자 업무를 파악하기도 바빴다. 더구나 앞장 서서 칼라트라를 공격하는 게 자신을 지지했던 이들이다 보니, 강제로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막 인근의 잉트리그 함대와 합류하여 칼라트라의 영역으로 진군하려고 할 때였다.

기계병 하나가 차원문을 열고 나타나더니 으르렁거렸다.

[지금 뭣들 하는 거요?]

비에라의 세 가신 중 하나였다.

자신은 블랙 프린스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가신을 하나 보내 막으려는 것이다.

칼라트라가 멸망하게 내버려 두면 수한을 제어할 수단을 잃게 된다. 급격히 부상하는 수한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비에라에겐 칼라트라가 필요했다.

수한은 짐짓 의아하다는 듯한 정신 감응을 보냈다.

[독토르 원수가 도움을 청해서 지원을 왔습니다만, 뭐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느냐니?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고작 며칠 전이요. 헌데 황태자 전하를 돕지는 못할망정 이런 사고를 치면 어쩌자는 거요? 당신들 때문에 제국 전역에서 각 파벌 간의 전쟁이 격화되고, 황태자 전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거 아니오?]

사실 그게 수한이 노리는 거였다.

제국을 거대한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

그 혼란 속에서라야, 수한이 노리는 최종 결과를 빚어내는 게 가능할 터였다.

독토르가 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래서 지금 우리 잉트리그를 방해하겠다는 거요? 비키시오! 1만 년 만에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칼라트라의 숨통을 끊어놔야겠소!]

[정녕 황태자 전하의 권위를 짓밟을 참이오?]

비에라의 가신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지만, 독토르나 다른 초월 진화자들은 그저 코웃음만 쳤다.

[제국의 권위는 실력에서 나오는 법! 황태자 전하께서 본인의 권위를 높이 세우려면 먼저 초월 진화자부터 되야 할 거요. 계급도 고작 영관에 불과한데, 화려한 의자에 앉아 목소리를 높여 봐야 공허할 뿐이지.]

[내가 비록 황태자 전하를 따르기는 하지만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약속한 게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 약속을 지키시기 전에는 황태자 전하를 지지할망정 충성을 바치지는 않을 거요.]

[이익!]

초월 진화자들의 의도는 간단했다.

비에라가 폐태자처럼 철권을 휘두르기 전,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집단화하겠다는 것.

그 목표가 잉트리그, 트리모, 바츠, 이렇게 세 파벌.

독토르처럼 각 파벌의 수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초월 진화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쟁 파벌과 전쟁을 벌여 각자의 발언력이 높여, 궁극적으로는 파벌의 수장 자리에 앉히고자 했다.

가신이 몇 번 더 설득하려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압적으로 전진하자, 가신이 겁을 집어먹고 꽁무니를 뺐다.

승전보가 순식간에 잉트리그 전역으로 퍼졌다.

잉트리그의 군주가 위협을 느끼고 회군을 명령했다. 그러나 독토르는 무시해 버렸다. 잉트리그 전역으로 참전 요청을 보내며, 칼라트라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라고 선전했다.

초월 진화자들이 사병을 끌고 속속 참전했다. 인근의 잉트리그 함대도 합류했다.

이제 칼라트라에게 남은 것은 초월 진화자 여섯 뿐.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대세가 진작 넘어왔다. 이때 누굴 따라야 할지는 명백했다.

파죽지세였다.

초월 진화자가 열 명이 넘게 참전한 상태였다. 잉트리그의 함대가 칼라트라의 영역 전체를 휩쓸었다. 채 며칠 지나지도 않아 수도 행성이 위치한 항성계 말고는 모두 잉트리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수한은 그 와중에 뜻하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지구가 위치한 차원과 연결된 차원문 생성 장치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즉시 차원문 생성 장치를 파괴했다. 아직 동기화 전이라, 당분간은 지구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듯했다.

비에라가 재차 자기 가신을 보냈다.

[이제 그만 두시오. 황태자 전하의 명이오.]

[거부하겠소.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 해도, 49개 파벌의 전쟁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걸 잊은 거요?]

독토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때를 위해, 수한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칼라트라의 군주는 독토르에게 넘기겠다는 것. 그러면 독토르도 군주 계급이 되어 잉트리그의 군주에게 도전할 기회를 얻는다.

그런 상황인데 물러나라는 비에라의 말이 귀에 들어오겠나. 겉으로야 황태자 전하라고 경칭을 붙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거적때기 황녀라고 업신여기고 있는데.

결국 잉트리그의 함대가 칼라트라의 수도 행성 파트라를 불태웠다.

남은 여섯 명의 초월 진화자들이 분투했으나 소용없었다. 모조리 수한의 레벨 업 도우미에 흡수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사로잡힌 이들은 잉트리그의 무인병기인 기계 요괴에 태워져 수확 차원으로 보내질 것이다.

[크윽, 원통하다!]

칼라트라의 군주도 수한에게 죽었다.

원래는 독토르가 일대일을 했으나 좀 밀렸던 것이다. 아무리 조합 기술을 배워 궁극기가 예리해졌어도, 수천 년 이상 쌓은 전투 경험과 노련함을 당해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수한이 개입했다. 빛의 질주로 우주를 누비며 소멸의 빛을 쏜 후, 모든 무장을 해체한 후 독토르에게 던져주었다.

글자 무리가 독토르의 기계병에 흡수되는 것이 보였다.

독토르가 다가오더니 수한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수한 군주님. 덕분에 군주 계급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잉트리그의 군주에게 도전할 수 있겠네요.]

[아직은 모자랍니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솔직히 일대일로 싸우면 충분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붙어보니…… 초능도 얼른 더 진화시키고 조합 기술도 더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잉트리그는 철저히 칼라트라를 짓밟았다.

제국에서는 승기를 잡으면 상대를 완전히 끝장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자칫 자비를 베풀었다가 부활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팠다.

모든 무장 세력이 파괴 당했다. 병사라면 모를까, 위관 이상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민간인들도 피해를 보았다. 대규모 약탈을 벌인 탓이었다. 전함이 대기권으로 낙하하여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붓는가 하면, 도시까지 내려가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만으로도 제국의 야만성을 알 수 있었다. 초월 진화자들을 죽인 시점에서 전쟁이 사실상 끝났는데, 굳이 행성 표면에서까지 분탕질을 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독토르가 키득거리며 수한에게 정신 감응을 보냈다.

[이야, 이 년 정말 탱글탱글한데, 한 번 맛 보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공간 이동시켜서 그쪽으로 보내지요.]

[됐습니다.]

입맛이 썼다.

인권 따위는 이미 사라진 세상.

제국은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고, 하층민들은 하루하루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다. 독토르도 하층민 출신이라면서 저렇게 마음껏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게 지구의 미래 모습이라니……

게다가 제국이 성립하는데 수한 자신이, 그리고 수한과 새미의 자손들이 큰 역할을 했다지 않나.

어서 이 사악한 악의 제국을 파멸시켜야겠다는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임페리얼로 돌아왔다.

새미가 수한의 얼굴을 보더니 말없이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수한이 기계 괴수에게 부모님을 잃었다면, 새미도 친척들과 친구들을 잃었다.

칼라트라는 둘의 원수.

초월 진화자들을 죽이고 군주를 꺼꾸러뜨릴 때까지는 좋았다. 아주 신이 났다. 그런데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보니, 마음 한 편이 불편해졌다.

“정말 제국이 우리의 후예일까?”

새미가 수한을 안은 채 물었다.

수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우리의 후예는 아냐. 어디까지나 평행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제국의 시조인 이수한과 윤새미는 2004년까지는 우리와 같은 존재였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 이후엔 전혀 다른 존재야. 우리 후손들이 이런 사악한 집단을 만들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겠지?”

“그럼.”

수한은 좋은 말로 새미를 위로했다.

한 가지 희소식이 있었다.

칼라트라의 모든 차원문 생성 장치를 부순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칼라트라 중앙 컴퓨터의 차원 좌표도 복구 불가능하도록 삭제해 버렸다. 이제 지구가 속한 차원의 좌표를 아는 것은 수한, 딱 한 명이었다.

각 수확 차원의 좌표는 극비리에 관리되니 가능한 거였다. 예전의 잉트리그 소속 제국인도 차원 좌표를 알아내 침투한 게 아니라, 차원 요새의 장교를 매수해 기계 괴수 안에 숨어 들어갔던 거니까.

그 얘기를 들은 새미와 동료들이 낮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됐네! 지구가 안전해졌어!”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역시 그대를 믿고 따라온 보람이 있다.]

[이제 제국놈들을 박살내기만 하면 되겠는 걸?]

“용신님의 뜻대로, 사악한 제국은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예요.”

[다 죽여버리자구!]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수한은 임페리얼의 밀실에서 미리 챙겨 두었던 힘의 근원을 추가로 흡수했다.

세 가지 계열.

구현, 거력, 강체.

초월 진화자가 된 이상은 개인의 무력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의지 계열과 정신 계열은 뒤로 밀렸다.

힘의 근원을 아낌없이 흡수하자, 세 개의 초능이 추가로 초월 진화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격통을 견뎌야 했지만, 웃으면서 버텼다.

그렇게 얻은 세 초능은 각각 무극뢰, 무적 신체, 종말의 힘이었다.

덩달아 수한의 조합 기술도 강해졌다.

용기사 갑옷에 박힌 동력핵이 세 개에서 여섯 개로 늘었다. 군주가 되기 전과 비교하면 최소 2배는 강해졌다고 수한은 스스로 자부했다.

이 정도라면 황제를 비롯한 반신 진화자가 아니면 누구든 상대할 수 있었다. 설혹 10명 이상의 초월 진화자가 덤벼도 마찬가지였다.

밀실에서 나오자, 미네르바가 수한의 앞에 나타났다.

[함장님. 제국의 황태자가 찾고 있습니다. 함교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지. 참, 트리모는 어떻게 하고 있지?”

[퀴그님께서 트리모의 초월 진화자를 규합하여 에센가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에센가드는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조금씩 후퇴하는 중입니다.]

“흠, 조만간 지원 요청이 오겠지?”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비뚜 파벌도 함께 참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가만히 있으면 핌 원수를 통해 그들을 공격할 테니……”

에센가드와 비뚜 두 파벌을 합치면 초월 진화자의 수가 서른이 넘어간다.

그러나 수한은 미리부터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이다.

지구에 있을 때는 물론, 제국에 넘어온 뒤로도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은 수한이다.

그런 수한이 이 정도 어려움에 지레 겁을 먹을 리 없지 않은가.

입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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