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란 >
일단은 임페리얼의 함교로 갔다. 비에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려는 의도였다.
[참 많은 일을 벌이셨네요.]
비에라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얼굴이 꽤 초췌했다. 근래에 들어 심력을 많이 소모한 모양이었다.
수한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6차 진화자였는데, 불과 1달도 안 되어 7차 진화자가 되었다. 하도 업신여김을 많이 받아 본인의 성장에 주력한 모양이었다.
수한은 씩 웃었다.
“전하께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으니 제 나름대로 자구책을 취하는 수밖에요. 전하를 지지했던 열 명 중 여섯은 제가 포섭한 이들 아닙니까? 저에게도 그들에 대한 책임이 좀 있지요.”
[뭐, 좋아요. 제가 황태자가 된지 얼마 안 돼서 모든 분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지킬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 약속한 것은 먼저 지키겠어요. 차원 요새 아포칼립스를 드릴 테니까, 당신 고향 차원으로 가져가세요. 앞으로 제국의 모든 이동은 아포칼립스를 통해서만 가능할 거고, 당신이 원한다면 아예 차원 봉쇄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수한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비에라가 수한의 얼굴을 살피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래, 언제쯤 아포칼립스로 이동할 건가요?]
“전함 정비와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것들만 처리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차원 요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애초에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죠. 하여튼 더 이상은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포칼립스의 권리장은 곧 보내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비에라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용이가 고개를 들더니 수한을 쳐다보았다.
[정말 가려고?]
“응, 가야지. 할 일은 다 해놓고.”
수한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용이는 이해를 못했다.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주변 인물들의 얼굴에는 수한의 것과 비슷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퀴그의 통신이 들어왔다.
당장 날아갔다. 보이는 모든 초월 진화자를 끝장냈다. 두 파벌이 뭉쳐 수가 굉장히 많았지만, 바츠의 초월 진화자들까지 지원을 와서 승리할 수 있었다.
많은 이가 죽었다.
여기서 죽은 초월 진화자의 수만 30명을 훌쩍 넘었다.
수한은 그 중 태반의 레벨 업 도우미를 흡수했다. 군주 계급의 성장 한계에 도달한 만큼 눈으로 보이는 이득은 없었지만, 퀴그와 핌이 군주가 되었다는 게 고무적이었다.
이로써 수한과 손을 잡은 군주만 무려 3명. 그들 모두 장래에는 한 파벌의 수장이 될 수도 있었다.
뒤늦게 비에라가 통신을 연결하여 방방 뛰었지만 무시했다. 아포칼립스를 회수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면 차원 요새를 줄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자 비에라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비에라는 수한의 협력을 얻어서 유폐에서 풀려났다. 소중히 간직한 증거를 이용해 황태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자신이 한 것을, 다른 황족이 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어디 있나.
게다가 수한이 떨어져 나가면 독토르와 퀴그, 핌도 떨어져 나간다. 셋은 이미 각 파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지지기반이 취약한 지금 파벌 셋과 척을 지는 셈이다.
비에라는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화사하게 웃었다.
[호호호, 그래요. 언제든지 편할 때 가져가도록 하세요. 기왕이면 빨리 가져가시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화면이 꺼지고, 비에라가 사라졌다.
수한은 함장석에 털썩 몸을 묻었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비에라와는 결별한 거나 다름이 없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못해 그냥 보고만 있지만, 비에라의 마음 속 주적은 수한이 되었을 것이다.
새미가 수한의 어깨를 주물렀다.
“오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전을 일으킬 거야.”
“내전을?”
“응. 민간인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칼라트라, 에센가드, 비뚜 세 파벌의 멸망을 본 다른 파벌의 엉덩이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었다. 암중에서 조금만 부채질을 해도 불이 붙어 우주 전체를 태워버릴 것이다.
필요한 계획은 진작 세워놓았다.
수한은 칼데츠라한의 3인방을 찾아갔다.
임페리얼 내에서 무위도식하는 중이었다. 아차원 통신기를 붙들고 있는 게, 이터누스 종족 아내들과 통화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터누스 종족은 위축된 질과 불완전하게 발달한 남성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성행위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애처가로 소문 나 있으니, 수한에게는 참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마도 거기에 칼데츠라한의 3인방이 이터누스 종족의 노예 해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유가 있겠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베일리프가 아차원 통신기를 수습하며 수한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세 번째 단계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세 번째라…… 이제 머지않았습니다그려.”
“그렇지요.”
비에라를 황태자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올리는 게 첫 번째. 세 명의 초월 진화자를 각 파벌의 수장이 될 자격을 갖추는 게 두 번째.
세 번째부터 본격적인 혼란이 시작된다. 그 안에서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되겠지.
베일리프는 물론, 줄랑과 콩코드도 수한을 직시했다.
“지금 바로 시작하지요. 임페리얼의 함교로 와주세요. 독토르 군주와 핌 군주, 퀴그 군주도 초대할 생각입니다.”
“조촐하네요.”
“전함 1척만으로 파벌 선포는 좀 모자랄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이 개척한 영지도 있고, 황태자가 제게 선사한 차원 요새도 있으니 구색은 맞을 겁니다.”
“아직 수령하지 않으셨는데요?”
“그걸 수령했다간 즉각 지구 차원으로 쫓겨날 겁니다. 황태자가 충분히 힘을 비축하기 전까진 이쪽에서 아예 문을 걸어잠구겠지요. 그 다음에는 분명 재침공을 할 테니, 저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하기야……”
파벌 선포에는 딱 1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군주 계급의 초능력자.
하지만 파벌이 파벌다우려면 몇 가지가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장군 역할을 할 초월 진화자들이나 군주가 웅거할 차원 요새, 강력한 함대 같은 것들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갖춘 게 딱 49개였다. 나머지는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선포 후 다른 파벌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곤 했다.
모두 함교로 이동했다.
초대 받은 세 군주가 차원을 도약하여 임페리얼로 왔다. 넷의 이야기를 들은 후, 미친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터누스 종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파벌을 만들겠다고요? 농담이시죠?”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제국 전체가 파벌의 적이 될 겁니다!”
제국은 거대하다.
칼라트라나 잉트리그 같은 파벌이 49개나 있다.
이제는 수가 줄어 46개가 되었지만, 이 중 잉트리그와 트리모, 바츠를 제외한다 해도 43개에 달한다.
그들이 일거에 휘몰아치면, 신생 파벌 따위 단번에 찢어져 나갈 터.
수한은 빙긋 웃었다.
“제국 전체와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겁니다.”
“다른 목적이라니요?”
“이건 일종의 도발입니다. 물론 베일리프님과 줄랑님, 콩코드님께 약속한 게 있으니 이 파벌에 속한 행성에서는 이터누스 종족을 해방시키긴 하겠지만, 그게 궁극의 목적은 아닙니다.”
수한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터누스 종족 해방을 표방한다고 하면 당장 제국의 모든 세력이 공격해 올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러기에는 수한이 이룩한 업적과 등 뒤에 있을 황태자가 염려스러웠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겉에서 보기엔 수한과 비에라의 관계는 여전히 끈끈했으니까. 오죽하면 귀한 차원 요새를 선사하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수한을 쉽게 쓰러뜨리기도 힘들고, 뭔가 얻을 것은 없고, 약해빠진 황태자라 해도 무시할 수는 없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전에는 공격해 올 무리는 드물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있다면 단 한 부류.
비에라의 정적들.
힘없는 황태자를 끌어내리고 싶은 존재들은 많고도 많으니까.
그런 이들에게 이터누스 종족 해방 운운은 좋은 명분이 된다. 역설적으로, 그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면 수한은 황태자의 방패이자 강력한 족쇄가 될 것이다.
도저히 포기할 수도, 잘라낼 수도 없는 그런 존재가.
수한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파벌 차원에서의 지지 선언이나 불가침 선언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기존의 강력한 황족들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큰데, 그때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그랬던 것처럼요.”
“으음.”
군주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계급을 올릴 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게 하면 저희가 이터누스 종족 해방을 찬성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건 좀……”
“제가 파벌과 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있어서요.”
수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조합 기술을 배울 때만 해도 쓸개라도 꺼내줄 것처럼 굴던 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젠 조합 기술을 다 배워간다고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전형적인 제국인의 표상.
하긴 그게 어디 제국인 뿐인가. 제국은 곧 지구의 후예이니, 저것은 거울에 비친 지구인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감정을 겉으로는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설득했다. 언젠가 각 파벌의 수장에게 도전할 때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또한 이들의 협력을 받으면 제국의 고위직을 얻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 말까지 들은 다음에야 세 군주가 지원을 약속했다. 그것도 파벌 자격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지원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후, 함교에서 새로운 파벌의 성립을 선언했다.
참가자는 수한과 베일리프, 줄랑, 콩코드, 이렇게 네 명의 초월 진화자.
영지는 칼데츠라한 성운. 다른 차원계로 이동하는데 쓰일 차원 요새는 아포칼립스. 군주의 기함은 임페리얼. 여기에 세 군주가 불가침 선언을 했으니 최소한의 구색은 맞췄다.
파벌의 이름은 이터니티.
새로운 파벌이 출범하는 모습을 우주 전역으로 방송했다.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는데, 대부분은 미쳤다느니, 수확 차원 출신 군주와 미치광이 원수들이 뭉쳐 헛짓거리를 한다느니 하는 통신을 보냈다.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19 황자와 100 황녀.
과거 폐태자가 치세할 때에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이름을 떨쳤다. 휘하에 거느린 초월 진화자도 많고, 유력한 파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터누스 종족의 해방이라니, 황태자는 미쳤다!]
[999 황녀는 황태자의 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999 황녀를 황태자의 위에 놔두는 것은 제국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다!]
말로만 떠들지 않았다.
막강한 군대를 파견하여 이터니티 파벌을 공격했다.
먼저 쳐들어온 것은 19 황자.
전력이 엄청났다. 초월 진화자는 스무 명이나 되고, 그 중 군주도 두 명이나 있었다. 우주 전함도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다들 이터니티 파벌의 멸망을 점쳤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전혀 반대되는 결과가 나왔다.
이터니티 파벌이 승리한 것이다.
수한은 이번 전투를 위해 3인방에게도 조합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들도 더 강해졌고, 소식을 들은 세 군주가 급히 지원을 왔다.
하지만 이 여섯 보다 더 활약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수한.
최근 물이 오른 수한이 날뛰며 날뛰면서 초월 진화자들을 쓰러뜨렸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결과였다.
19 황자는 놓쳤다. 사실 잡을 기회는 있었지만 일부러 놓아주었다. 대신 다른 모든 초월 진화자를 죽여 버렸다. 덕분에 레벨 업 도우미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100 황녀의 본거지로 쳐들어갔다.
100 황녀는 수한의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비록 초월 진화자 몇을 죽이기는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터니티 파벌은 100 황녀를 몇 번이나 공격했다. 다소 간의 피해는 봤을망정, 100 황녀는 착실하게 막아냈다. 그러자 반 황태자 세력이 100 황녀에게 결집했다. 도망친 19 황자도 숙이고 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수한의 무력을 탐낸 세력들이 이터니티 파벌에게 모여들었다. 동맹에게 이터누스 종족 해방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포를 한 뒤의 일이었다. 그 선포를 듣고 이터니티 파벌을 칼데츠라한 성운의 확대판으로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파벌 한두 개가 끼어들었다. 갈 곳 없는 황족들도 몇 명이 발을 담갔다. 그렇게 규모가 계속 확장되더니, 나중에는 제국의 절반이 전란에 휩싸였다.
이 전쟁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다른 파벌과 황족들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있었다. 황태자는 허수아비이고, 자신의 세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전부 수한의 계략 때문이었다.
전쟁의 규모가 커진 것은 물론, 다른 파벌들끼리 싸우는 것 모두 수한이 유도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제국 어디를 가도 피와 죽음이 넘쳐흘렀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지만 비에라의 능력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황궁에 처박혀 노는 황제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의 목이 달아날 테니까.
이때, 비에라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