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46화 (247/254)

< 친정 -1- >

황태자의 권위를 높이 세우는 것.

제국은 강력한 신분제 국가이고, 그 신분은 오직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레벨 업 도우미의 초능 진화 단계가 가장 중요했다.

만약 비에라가 초월 진화자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가 된 즉시 강력한 권위로 치세를 시작했겠지.

그러나 비에라는 그러지 못했고,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블랙 프린스에 입성했다. 자연히 수한이 이토록 분탕질을 쳐도 뭘 해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정무는 세 가신에게 맡기고, 힘의 근원을 챙겨들고 밀실에 들어갔다. 모진 결심을 하고 힘의 근원을 흡수해 나갔다.

비에라가 밀실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

그 사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비에라를 지지하던 유일한 파벌인 몽떼가 멸망했다. 그나마 중립을 지키던 파벌들까지 전란에 끼어들었다. 이제 제국에서 평화로운 곳은 아주 궁벽한 곳들 밖에 없었다.

세 가신이 비에라를 보고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 대성을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초월 진화에 성공하신 겁니까?”

“황태자가 되신지 겨우 두 달 만에 초월 진화자가 되다니, 역시 전하십니다!”

비에라는 입술을 실룩이며 웃었다.

실로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무수한 고통을 견디며 힘의 근원을 흡수했다. 그 결과 10가지 초능 중 1가지를 초월 진화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록 무력으로 따지면 다른 초월 진화자에 비교하긴 힘들어도, 황태자로서의 자질은 증명한 셈이니까.

“대전으로 가겠어요.”

“조회를 여시겠습니까?”

“네. 지금 당장, 제 신하들을 모두 소환하세요.”

“에, 황태자 전하.”

비에라도 당하고만 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농락한 수한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그 시각, 수한은 우주 외곽에서 한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초월 진화자 수십이 뒤엉키고, 전함들이 주포를 쏘아대어 우주가 환하게 변할 정도의 전투였다.

호각이었다.

이터니티 파벌 동맹군, 속칭 황태자군에 수한이 있다면 황녀군은 초월 진화자가 훨씬 많았다. 더구나 그 동안 수한의 전술을 철저히 분석한 터라, 군주 10명이면 수한의 발을 묶을 수 있었다.

사실은 수한이 몇 가지 조합 기술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 거지만.

수한이 제국에서 보여준 조합 기술은 소멸의 빛과 빛의 질주, 천지 돌파와 뇌룡 일격, 거신 강림밖에 없었다.

근원 부여와 무극뢰의 조합인 혼원뢰나, 새롭게 만들었던 암흑 용신은 쓰지도 않았다. 10번째 초능인 용신의 저주도 쓰지 않고 있으니, 언젠가 이게 수한의 구명줄이 될 것이다.

참고로 뇌룡 질주보다 빛의 질주가 효율이 더 좋아 뇌룡 질주는 쓰지 않기로 했다.

수한은 초월 진화자가 탄 기계병 하나를 둘로 쪼갰다. 소멸의 빛을 쏘아 끝장을 보려는데, 주위에서 궁극기에 준하는 공격이 날아와 어쩔 수 없이 살려 보냈다.

그때, 수한의 앞쪽에 미네르바의 형상이 나타났다.

[함장님. 황태자 전하께서 소환장을 보내셨습니다.]

“바쁘다고 해. 못 믿겠다고 하면 내 용기사 시야 공유시켜 주던지.”

[함장님. 이번 소환은 좀 다릅니다. 구두로 명령하신 게 아니라, 정식으로 소환장을 보내셨습니다.]

“뭐라고?”

미네르바의 옆에 홀로그램으로 문서 한 장이 떴다.

황태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 동안 비에라는 화상 통신을 걸어 얘기하거나 가신을 보내 명령하곤 했다. 이렇게 정식으로 문서를 보낸 것은 차원 요새 아포칼립스의 권리장 말고는 없었다.

수한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급히 미네르바에게 말했다.

“혹시 황태자가 초월 진화자에 오른 거야? 소환장 한 번 검사해 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미네르바가 눈을 감았다.

[함장님의 짐작이 맞습니다. 소환장에 초월 진화한 초능이 깃들어 있습니다. 절대 의지 계열의 초능입니다.]

“독한 년……”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를 읊조렸다.

7차 진화자가 된 게 언제였다고 벌써 초월 진화자가 되었다는 거냐?

하긴 증거물을 자기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황제 앞에서 그걸 꺼내는 쇼를 벌인 비에라였다. 지금까진 상황이 여의치 못해 수한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어쨌든 비에라가 초월 진화자가 되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당장 블랙 프린스와 제국 중앙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전까진 명령을 내려도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이젠 그렇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강자를 숭상하고, 황실 혈통을 경배하니까. 초월 진화자는 되어야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소환장을 무시할까? 전투를 핑계 삼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다. 그렇게까지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비에라가 벌써 초월 진화자가 되는 것은 확실히 의외이긴 하다. 최소한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다.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수한은 황녀군 초월 진화자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몇 번 뿌렸다. 그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 후, 경계하며 천천히 후퇴했다.

다른 초월 진화자들에게도 후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전열을 유지하며 물러나자, 휴식을 취하자는 의도로 받아들였는지 황녀군도 군대를 뒤로 물렀다.

기함인 임페리얼에 초월 진화자들이 모여 들었다.

물색 모르는 이들이 크게 떠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초월 진화자가 되시다니, 제국의 홍복이오!”

“황태자 전하의 영도 아래, 제국이 무궁하게 발전할 것이외다!”

“하하하하!”

반면 칼데츠라한의 3인방이나 비에라를 지지했던 3군주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비에라가 취약한 틈을 타 자기 욕심을 채운 셈이니까.

후환이 두려웠다.

수한은 그들과 밀담을 나누었다.

[생각보다 황태자가 초월 진화자가 되는 게 빨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어떻게 하지요? 황태자의 감정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흠.]

현재 황태자군에 속한 초월 진화자는 무려 200명이 넘어간다. 황녀군의 초월 진화자는 그보다 더 많아 250명이나 되는데, 이걸 박빙으로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수한의 공이었다.

그것을 생각하자 수한의 얼굴에 여유가 깃들었다.

이미 피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고, 황제가 아니면 이걸 멈출 수가 없었다.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 황태자와 황녀가 화해하는 것.

그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화해를 하려면 비에라가 수한을 비롯한 초월 진화자들의 돌출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러면 황태자군이 와해되고 만다. 지금의 황태자군은 수한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황녀가 가만히 있겠나. 때는 이때다 하고 비에라를 물어뜯겠지.

늑대를 물리치려 호랑이를 들이는 격.

이젠 죽으나 사나 황녀군을 꺼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수한은 이런 사항에 대해 설명했다. 아울러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황태자군을 온전히 비에라에게 바치자는 것.

베일리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죽 쒀서 개 주는 꼴 아닙니까?]

황태자군은 제국 전력의 대략 1/4을 차지하고 있었다. 실로 막강한 세력이었다.

이걸 만드는데 수한이 가장 고생을 했지만, 칼데츠라한 3인방도 고생을 했다. 독토르 등 세 군주도 마찬가지였고.

차라리 독립하자는 의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터누스 종족 해방이 아닌, 황태자의 존재가 황태자군의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끄응.]

독토르 등 세 군주가 특히 아쉬운 기색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잉트리그의 수장이자 황실의 권신(權臣)으로 그 권력을 우주 전체에 떨쳤을 텐데……

세 군주는 아직 각 파벌의 수장이 되지 못했다. 한 달 정도 뒤에 수장에게 도전할 생각이었는데, 비에라가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일단 비에라의 소환에 응하여 블랙 프린스로 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수한은 밀담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들을 소환하셨으니 응당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당장 블랙 프린스로 가서 인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여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가 전부 빠지면 금방 밀릴 텐데요.”

“황태자 전하께서 초월 진화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황녀군은 상황을 지켜보려고 할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많은 것이 달라질 테니까요.”

“과연……”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불리해질 테니 오히려 역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초월 진화자들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황태자를 친견할 욕심에 애써 무시했다. 성운 몇 개가 황녀군에게 넘어가는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다른 성운을 지키던 초월 진화자들도 임페리얼로 옮겨 왔다. 그렇게 황태자군 소속 대부분의 초월 진화자와 그들의 개인 기계병을 실은 채, 임페리얼이 차원을 넘었다.

원래 비에라가 부른 것은 수한을 비롯한 일곱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수한은 소환장에 써진 신하 운운한 문구를 확대 해석하여, 황태자군의 초월 진화자를 몽땅 끌고 갔다.

실로 지록위마(指鹿爲馬) 식의 해석.

임페리얼이 블랙 프린스 인근에 도착했다. 당연히 온갖 탐지 장치가 임페리얼을 훑었는데, 그 순간 난리가 났다.

[임페리얼 내부에 초월 진화자 192명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맙소사, 반역인가?]

비상이 걸렸다.

초월 진화자 192명이라면 황도 내의 초월 진화자 전력을 상회했다. 근위대에 50명, 친위대에 50명이 전부이니까. 중앙군도 100명 정도는 있지만, 인근 항성계에 퍼져 있고.

비상 연력이 여기저기 갈 때, 수한이 먼저 블랙 프린스로 화상 통신을 보냈다.

화면에 비에라의 세 가신 중 한 명이 나타났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임페리얼의 함교를 가득 채운 초월 진화자들을 봤기 때문이다.

[수한 군주. 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온 이유가 뭐요?]

가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한은 의뭉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으음!]

가신도 수한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정말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되니까.

가신의 얼굴이 풀렸다.

[하하, 그랬지요. 공무가 다망하여 깜빡 잊었소이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소. 모두 들어올 수는 없지 않겠소? 수한 군주를 비롯하여, 몇 명만 들어오는 것으로 하십시다.]

그 말은 당장 초월 진화자들의 반발을 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황녀군을 방어하는 것도 포기하고 먼 길을 왔는데, 황태자 전하를 뵐 수가 없다고?]

[인의 장막으로 황태자 전하를 가리려는 속셈이 아니냐!]

초월 진화자들이 흔쾌히 수한을 따라나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겉에서 보는 것처럼 황태자와 수한의 사이가 돈독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한을 실각시키고 황태자의 측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반대로 수한이 황태자와 성공적으로 대립각을 세운다면 수한에게 빌붙을 수도 있고.

초월 진화자들의 항의에 가신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무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섣불리 대할 수는 없었다. 잘만 구슬리면 앞으로 비에라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알겠소. 잠시 기다리시오. 내 직권으로 황태자 전하께 상신해 보리다. 모든 것은 황태자 전하의 뜻대로 이뤄질 거라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화면이 꺼졌다.

수한은 잠시 기다렸다.

비에라가 초월 진화자들을 들이든, 들이지 않든 대처할 방법이 있었다. 쿠마 행성에서 그녀를 만나던 순간 세웠던 계획도 슬슬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가신이 임페리얼의 중앙 화면에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수락하셨소. 단, 모두 무장은 해제해야 할 거요.]

[그 정도야 뭐……]

초월 진화자들은 작은 수송선에 옮겨 탔다.

임페리얼이나 기계병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벼운 개인 장구만 갖춘 채, 수송선을 통해 블랙 프린스로 들어갔다.

수한도 그러했다. 용이만 대동하고 비에라를 보러 갔다.

도착한 곳은 블랙 프린스의 대전이었다.

비에라는 옥좌에 앉아 수한을 비롯한 초월 진화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전 곳곳에 초월 진화자들이 눈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친위대 소속의 초월 진화자들.

비에라의 수완도 대단했다. 초월 진화자가 되고 얼마나 지났다고, 그들의 충성을 얻었는지 몰랐다.

그래봐야 창졸지간에 모으느라 대전 안에 있는 것은 서른 명 정도.

2백에 가까운 황태자군 초월 진화자들이 들어오자, 당당하던 그들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수한은 정중하게 비에라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오랜만이에요.”

비에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사실 2백에 이르는 초월 진화자를 믿고 방자하게 나올 줄 알았다. 그렇게 나와도 제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친위대의 초월 진화자를 동원하면 축출할 수는 있겠지만, 그간 업적을 보면 죽인다고 장담을 못하니까. 당장 전력이 크게 감소할 테니 황녀군과의 내전에서 밀리지 않겠나.

숙이고 들어오려는 건가?

비에라는 이미 수한을 가만히 놔둘 마음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래도 당장은 아쉬운 게 사실이니,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군세를 크게 키우셨더군요.”

한 마디 일침을 가했다.

수한은 짐짓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의 성덕이 전 우주를 뒤덮은 까닭입니다. 깃발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우주의 영웅들이 몰려들어, 12개 파벌이 전하를 지지하였고 205명의 초월 진화자들이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으음!”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정말 많기는 많다.

비에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수한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직접 세력을 키웠다 한들, 고작 몇 달 만에 이 정도의 결과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신뢰할 수 있는 자라면, 마땅히 대공의 작위를 내리고 부군으로 삼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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