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정 -2- >
비에라가 말이 없자, 수한은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바라옵건대, 때가 되었으니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친정을 하시길 깊이 소원하옵니다! 황태자 전하의 깃발로 모여든 이 군대를 이끌고, 감히 황태자 전하께 역심을 품은 100 황녀와 그 무리들을 쳐 죽이고 황태자 전하의 위엄을 우주 만방에 떨치옵소서!”
“우주 만방에 떨치옵소서!”
황태자군 초월 진화자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친위대 초월 진화자들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황태자의 친정?
황녀군과 어우러지며 벌어질 거대한 전장은 그들에게도 기회의 장이었다. 계급을 올리는 것도 그렇고, 전공을 세워 영전한다면 더 큰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에라도 혹한 표정을 지었다.
“친정이라고요?”
지금 황태자군의 사령관은 누가 뭐래도 수한이었다.
그 자리를 비에라에게 넘기겠다는 거 아닌가.
명분은 비에라에게 있으니, 그 경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실권을 장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수한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황태자 전하께서 그 위엄을 떨칠 때이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전면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역도의 무리는 그 기세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옵니다. 그들을 처단하여, 전하께 부족한 단 하나를 공고히 하시옵소서!”
부족한 단 하나?
비에라는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다.
황족이라 10익급 레벨 업 도우미를 가지고 있었고, 힘의 근원을 물처럼 펑펑 쓸 수 있었다. 고통만 참으면 초월 진화자까지는 쉽게 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있으니 바로 계급이었다. 비에라는 여전히 영관 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황녀군과의 전쟁은 비에라에게도 기회였다.
계급을 올리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도 가능했다. 내전에서 황태자로서의 자질을 증명한다면, 향후 수천 년 간 폐태자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초월 진화자들도 비에라의 친정을 부추겼다.
특히 세 가신들은 눈이 벌게져서 친정할 것을 강권했다. 누가 뭐래도 자기들이 비에라의 심복이니,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한 것이다.
비에라는 금방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여러분의 의견대로 친정하도록 하겠어요. 이의 있으신 분이 있나요?”
있을 리가 없다.
되레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우주 전체가 무릎을 꿇을 것이라느니, 항성들이 그 아름다움에 놀라 빛을 잃을 거라느니 하며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늘어놓았다.
비에라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도를 지킬 최소한의 원수만 남기고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겠어요. 감히 제국의 황태자에게 반기를 든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겠어요.”
비에라는 능숙하게 자리를 분배했다.
총사령관의 자리에는 본인이 직접 앉았다. 접전 지대를 크게 3등분한 후, 그 책임자를 방면 사령관이라 명명하고 자신의 가신을 앉혔다. 그러고는 선심 쓰듯 수한에게 군수 사령관 직책을 주었다.
말이 좋아 사령관이지, 일은 많고 권력은 없는 자리였다. 군수 사령관은 군대의 보급을 총괄하는데, 직접적인 무력 투사를 숭상하는 제국에서는 다소 천대했던 것이다.
거기다 보급 호위 함대를 줄여 전면에 배치하는 게, 보급이 중간에 끊기기라도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수한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황태자 감은 아니네.’
독하긴 하지만 도량이 너무 작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기 가신만 챙기니 벌써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나. 최소한 황태자군의 군주들을 방면 사령관에 임명했어야 했다. 가신들에겐 실속 있는 자리를 주고.
수한에게 준 군수 사령관 자리도 그렇다. 수한이 비에라의 입장이라면 적당한 한직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군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군수 사령관이 아니라.
‘뭐, 나야 알 바 아니지.’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비에라가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목적한 바를 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수한은 블랙 프린스에 임페리얼을 정박시켰다.
군수 사령관으로서의 업무는 블랙 프린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보급을 하려면 황태자군의 모든 정보를 알아야 하니까.
비록 블랙 프린스의 모든 것을 뜻대로 조종할 수는 없지만, 중앙 컴퓨터 접근 권한은 주어져 있었다. 제국의 극비 문서를 열람하는 것도 가능했다.
새미가 졸린 눈을 비볐다.
“휴, 폭풍 같은 나날이었어.”
“피곤하지? 좀 쉬어. 아마 당분간은 한가할 거야.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겠지만.”
[제국놈들 때려잡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아깝다.]
“조만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평화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화면으로 비에라 황녀가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얼굴에 욕심이 가득한 게 100 황녀의 상대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 종족은 임페리얼에서 쉬고 있겠다. 제국인들은 우리 종족을 보기만 하면 납치하려고 하니, 그게 나을 것 같구나.]
“그렇게 하세요, 마니엘라님.”
수한의 동료, 그리고 연합군의 이능력자들이라고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임페리얼을 지켰다.
황태자군 총사령관의 기함으로 활용된 임페리얼이었다. 당연히 황녀군이 1순위 목표로 삼고 달려들었다.
수한이 없을 때는 이능력자들만으로 헤쳐 나와야 했다. 노획한 기계병을 변형시킨 기계용으로 대항했다. 레벨 업 도우미가 없으니 기량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기계용을 계속 개량하여 만회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래도 블랙 프린스까지 내려가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제국인들이 보내는 멸시의 시선이 싫어서였다.
수한과 새미만 마음 놓고 돌아다녔다.
“자기 이제 사령관이 됐다고 했지?”
“응. 초능 6개는 7차 진화시켰고, 7번째랑 8번째 초능 개발 중이야.”
“7번째면 64일 걸리겠네. 빨리 개발 끝나야 할 텐데.”
내전 중, 새미도 레벨 업 도우미를 이식 받았다.
8익급 레벨 업 도우미였다. 수한의 아내이고, 부관 역할을 하고 있어 그것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는 구현, 감각, 신속, 의지, 정신, 강체 이렇게 6가지 계열을 7차 진화, 즉 SSS급까지 향상시켰다.
원래 SSS급 이능력자여서일까. 새미는 300 레벨에서 시작했다. SSS급 구현 계열 이능은 7차 진화 초능 뇌정 해일로 대체되었다.
현재는 500 레벨, 8익급 레벨 업 도우미의 성장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초월 진화자의 레벨 업 도우미를 흡수시켜 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워낙 다른 초월 진화자들이 아귀처럼 달려든 까닭이었다.
새미가 주위를 살피더니 한국어로 속삭였다.
“오빠도 성장 한계에 도달했다고 했지? 레벨 업 도우미 진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돼?”
“아마 12익급을 흡수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제국에서도 다섯 밖에 없대. 그래서 고민이야. 그 다섯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고……”
제국에 존재하는 12익급 레벨 업 도우미는 딱 다섯 개.
반신 진화자인 황제와 4명의 대군주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려받거나 죽이고 흡수하는 방법 외에 12익급을 얻는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수한은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12익급 레벨 업 도우미를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제국이라고 처음부터 다섯 개의 12익급 레벨 업 도우미가 있진 않았을 테니까.
새미가 수한의 손을 꽉 잡았다.
“다 잘 될 거야.”
“그래, 고마워.”
군수 사령관이어서 블랙 프린스의 중앙 컴퓨터 접근 권한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군수 사령관으로서의 업무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12익급 레벨 업 도우미에 대한 정보를 탐색했다.
그렇다고 군수 사령관의 업무에 소홀하진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초월 진화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초능력자들이나 우주 전함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든 전장에 초월 진화자가 갈 수는 없는 거니까.
황태자군의 보급을 책임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르 공격대를 운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나마 회계에 능통한 문관들이 많아 다행이었다. 수한은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제 큰 맥락에서의 방향만 결정해 주면 되었다.
군수 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내전의 전체적인 흐름이 눈에 보였다.
비에라가 친정을 시작한 직후에는 황태자군이 유리했다. 성난 해일처럼 황녀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새롭게 초월 진화자가 늘어났어도, 황녀군의 세력이 아직도 더 크다는 게 문제였다.
100 황녀가 전장 전체를 조율하며 맞섰다. 우위에 있는 초월 진화자의 숫자를 이용하여, 황태자군의 영역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수한은 혀를 끌끌 찼다.
황태자군은 여기저기서 삐걱 대고 있었다.
방면 사령관 셋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게 컸다. 자기 휘하의 초월 진화자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군주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을 빚기 일쑤였다.
비에라가 잘하냐면 그렇지 않았다. 전략 전술에 대한 식견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전공을 독식하려고 했다. 특히 상대방 초월 진화자는 꼭 자신이 결정타를 날렸다.
수한처럼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죽이고 다녔으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자기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안전한 후방에 있다가, 초월 진화자를 제압시켜 끌고 오게 한 후 자기가 죽였다.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제국에서 초월 진화자의 위상은 아주 컸다. 지금은 내전 중이니 죽여도 상관없지만, 안정 시기에는 죽이기만 해도 후폭풍이 엄청 났다. 아무리 내전 중이라 해도 제압한 초월 진화자를 죽이는 것은 삼가야 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초월 진화자를 잡는 족족 자기 손으로 죽였으니, 황태자군과 황녀군은 물론 제국 전체에서 원성이 들끓었다.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르뜨아 파벌과 아큐아 파벌이 황녀군에게 넘어갔답니다!”
단순히 그 영역이 넘어간 게 아니라, 파벌 전체가 통째로 투항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월 진화자 스물 이상이 일거에 넘어갔다는 뜻.
수한의 눈이 깊어졌다.
원래도 황태자군의 객관적인 전력은 황녀군에 비해 밀렸다. 수한이 그렇게 되도록 은근히 조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벌 두 개가 완전히 넘어갔다면,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다.
이제 머지않았다.
1달 안으로, 황태자군은 완전히 궁지에 몰릴 것이다. 지금 세력이 이미 6:4 정도가 되었는데, 그때쯤은 8:2가 될 테니까.
당연히 수한은 한 가지 공작을 하고 있었다. 황녀군의 승리로 끝나면, 수한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전황은 수한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황태자군은 모든 전역에서 밀렸다. 한때 제국의 1/4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으나, 이젠 1/20로 쪼그라들었다.
초월 진화자들의 이탈도 심해서 황태자군의 초월 진화자를 다 합쳐봐야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황녀군의 초월 진화자는 3백여 명이 넘으니, 돌이킬 방법은 없어 보였다.
수한이 기다리고 있던 때가 온 것이다.
비에라가 수한을 불렀다.
독토르와 베일리프 등, 다른 초월 진화자들이 연판장을 돌려 비에라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자 비에라도 어쩔 수 없었다.
군수 사령관으로 좌천당했던 것을, 총사령관으로 당당하게 복귀하게 되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임페리얼의 함교로 가는데, 새미가 우물쭈물하며 수한을 보았다.
“할 말 있어?”
“응, 오빠. 나……”
새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달싹였다.
수한은 새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그럴까 싶어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새미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자기 배를 어루만졌다.
배가 고픈 걸까? 방금 아침을 먹었는데……
아니, 잠깐만.
퍼뜩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저절로 세계 투시가 발동했다.
새미의 배를 투과해서 살폈다. 내장을 모두 꿰뚫고 자궁 안을 보았다. 배란기를 맞이하여 두터워진 자궁 벽 안에, 아주 작은 세포 덩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새미의 배를 만졌다.
“설마, 설마…… 자기 임신한 거야?”
“모르겠어. 날짜가 지나긴 했는데 검사를 어디서 하는 줄 몰라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임신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 작고 어여쁜 몸에 자신의 2세가 숨 쉬고 있다니……
새미가 묘한 눈으로 수한을 보았다.
“나 임신한 거 맞아?”
“응? 아, 으응. 여기 안에 있어.”
수한이 새미의 배를 가리키자, 새미가 수한의 어깨를 톡 쳤다.
“아하하, 안에 있는 게 뭐야!”
“그, 그런가?”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제국을 농락하며 대규모의 내전을 벌일 때는 영민하게 돌아가던 두뇌가, 꼭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어리벙벙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수한은 새미를 와락 껴안았다.
새미의 부드러운 몸이 나긋나긋하게 수한의 품에 안겼다.
혹시라도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까 봐 배와 엉덩이는 뒤로 뺐다. 그러자 새미가 왜 그러냐며 깔깔 웃었다.
“자기 이제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게 좋겠다.”
“위험하면 어쩔 수 없잖아. 오빠가 임페리얼을 계속 지켜줄 수는 없으니까. 우리 아이는 내가 지킬 거야.”
기계용을 탄 상태라면, 새미가 임페리얼에서 수한 다음 가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니, 수한도 뭐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저 묵묵히 머리만 끄덕였다.
대신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거, 찾았어.”
“그거?”
“저번에 내가 찾고 있다고 한 거.”
“찾고 있다고 한 거? 아! 그거?”
주위를 의식해서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새미는 금방 알아들었다.
12익급 레벨 업 도우미.
수한은 새미에게 속삭였다.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 겨우 찾았어. 잘 하면 몇 달 내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잘 됐다.”
“그럼, 잘 됐지. 잘 됐고말고.”
12익급이 되어야, 황제를 비롯한 4명의 대군주를 상대라도 해볼 수 있을 테니까.
수한은 새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국을 무너뜨려야 할 이유가 늘었다.
새미의 뱃속에 든 아기.
아직 아기라고 부르기도 힘든 작은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작은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한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