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完] >
10년이 지났다.
2020년, 종족 연합군이 차원문을 넘어 제국의 심장을 공격한 뒤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지난 것이다.
지구는 평화로웠다.
인류는 이미 우주로 진출했다. 임페리얼이 얻어온 제국의 기술을 활용한 덕이었다. 호기심 강한 우주 탐험가들은 벌써 태양계 경계를 넘어갔고, 화성에 한참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부우웅!
서울의 도로를 한 스포츠카가 가로질렀다.
노란색 날렵한 형태의 스포츠카.
한때는 만인의 선망을 사던 고급 스포츠카지만, 요즘은 좀 구닥다리 취급을 받았다. 제국의 기술이 적용된 여러 자동차와 개인용 비행차가 상용화되었기 때문이다. 구입한지 15년이 지난 바에야 더 말해 무엇 하겠나.
그러나 스포츠카의 주인은 스포츠카를 팔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스포츠카에는 애틋한 추억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익.
스포츠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지했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앞.
스포츠카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 구석에 있는 주차장에 대어놓고, 한 묘령의 여인이 스포츠카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미인.
청바지에 흰 티를 입은 게 전부인데, 청초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때마침 주위를 지나던 고등학생들이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차장 근처의 그늘에 모여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이 여인을 보고 반색했다.
“예지 엄마, 오늘도 예지 데리러 왔어?”
“매일 고생이네.”
“오늘은 좀 빨리 온 것 같아?”
“네. 일이 좀 있어서요.”
“아휴, 회사 운영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여인, 새미는 그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다. 스포츠카에서 내린 미모의 여인은 다름 아닌 윤새미였다.
지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임페리얼에 타고 제국을 공격했던 SSS급 이상의 이능력자 중 지구인 생환자는 딱 한 명, 윤새미밖에 없었다. 수한도 생존자로 기록을 남겼지만, 큰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새미는 근처 나무에 기다려 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렸다.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새미를 발견하고 달음박질쳤다.
“엄마!”
“아휴, 우리 예지.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
“응응! 나 오늘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어!”
“어머, 그랬어?”
새미는 여자아이를 안아들었다.
이예지.
새미의 가장 큰 보물이었다.
예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노란 스포츠카 안에서 커다란 짐승 같은 게 고개를 내밀었다.
짐승?
아니다.
금속 생명체였다.
흡사 서양의 드래곤을 작게 축소시킨 것처럼 생겼다. 두 눈은 흑진주처럼 까맣고, 몸은 검은색에 윤기가 좔좔 흘렀다.
짐승이 하품을 하듯 입을 벌리며 말을 걸었다.
[예지 왔어?]
“용아!”
예지가 신이 나서 뛰어왔다.
용이의 목에 매달리자,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너 무거워.]
“헹! 무겁긴 뭐가 무거워?”
예지가 용이의 얼굴에 대고 마구 뽀뽀를 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앞발을 휘두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기는 장난으로 슬쩍 밀어도, 예지는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새미가 예지에게 주의를 주었다.
“예지야, 용이 너무 귀찮게 하지 말랬지?”
“알았어, 엄마.”
예지는 금방 얌전해졌다.
새미는 예지를 스포츠카에 태웠다. 자기도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스포츠카를 출발시켰다.
예지가 신바람을 냈다.
“엄마, 오늘 그 날이지?”
“그래. 그 날이야.”
“신난다! 얼른 아빠 보고 싶어!”
“호호, 그래.”
어째서일까.
새미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혹시라도 딸이 볼세라 얼른 닦아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감쪽같이 원상 복구되었다.
스포츠카는 올림픽대로를 따라 여의도로 질주했다.
10년 사이, 여의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호자 연맹 지부 앞에 늘어서 있던 공격대 사옥들.
각양각색이던 그 건물들이, 이젠 용을 형상화한 건물로 바뀌었다. 다름이 아니라 미르 공격대가 공격대를 몽땅 집어삼킨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이 멸망하고 기계 괴수가 유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기계 괴수와 변이체를 잡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사실 그 때문에 문을 닫은 공격대가 꽤 많았다. 대신 차원 무역에 눈을 돌렸다. 덕분에 이능력자의 수요가 많이 줄어들어서, 이능력자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하던 것도 옛말이 되었다.
새미는 스포츠카를 미르 그룹 제 1 사옥 주차장에 댔다.
주위를 지나던 이들이 새미를 보고 인사했다.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냐아앙!]
[부회장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시오.]
대부분은 미르 그룹의 사원들.
개중에는 외계인도 많았다.
주로 케르베스 행성, 질라 행성, 크람 행성, 가브낙 행성인들.
워낙 미르 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탓에, 사원으로 재직하게 된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새미는 그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건넸다. 예지의 손을 잡고 제 1 사옥 안으로 들어가자, 용이가 높이 고개를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머리가 하얗게 샌 백동기, 주름살이 깊어진 임시규, 여전히 싱글싱글 잘 웃는 마크 사뮤엘이 마중을 나왔다.
“회장님께 가보시는 겁니까?”
“그래야죠.”
“얼른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휴, 곧 좋아지겠죠.”
새미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미르 그룹에서 새미의 공식적인 직함은 부회장.
회장 직함은 수한이 가지고 있었다. 비록 헤븐 행성에서 치료 받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적어도 미르 기업에는 없었다.
수한이 남긴 족적은 말 그대로 거대했고, 누구도 수한을 대체할 수 없었으니까.
한편 백동기는 미르 무역의 사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미르 그룹의 양대 매출을 꼽자면 기계 괴수 공략과 차원 무역에서 나온다. 백동기는 그 중에서 차원 무역을 담당했다.
마크 샤뮤엘은 미르 공격대의 사장이, 임시규는 부사장이 되었다. 그 둘이 잘 협의해서 공격대를 이끌며 기계 괴수를 사냥하고 있었다.
드빌과 뉴팩도 한쪽에 앉았다.
그들은 미르 연구소의 소장을 합동으로 맡고 있었다. 노르헤임 행성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여기가 더 낫겠다며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
“부회장님, 저희 소식도 좀 전해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오늘은 새미가 예지를 데리고 1달에 1번 수한을 보러 가는 날.
수한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 몰려나왔다.
최동휴, 방유미, 권준, 정지훈.
수한이 알바트로스에 입사했을 때 만난 이들이었다. 지금은 미르 그룹 각지에 퍼져 이사 직위에 올라 있었다.
[우리도 얘기 전해줘.]
[친구 보고 싶다.]
다섯 변이체들도 새미에게 부탁을 했다.
10년 동안 다섯 변이체들 모두 미르 그룹에 기여를 많이 했다. 초기에는 공격대 소속이었지만, 요즘에는 우주 탐사 쪽으로 적을 옮겼다.
우주에서도 생존이 가능하니 전투를 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았던 것이다. 그들도 우주를 탐험하는 것을 더 재미있게 여겼고.
슬슬 시간이 되었다.
새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올 때가 됐는데……
어흥!
별안간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사자 한 마리가 빠르게 뛰어왔다. 사원들이 놀랄 법도 하건만 자연스럽게 비켜주었다. 사자는 아름다운 인간 여성으로 변하여, 새미가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그녀를 보고 예지가 환하게 웃었다.
“라오그뉴님!”
“꼬맹아, 잘 있었지?”
라오그뉴가 흰 손으로 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0년이 넘도록 지구에 남아 있었다. 쥬페르 행성에 가봐야 재미도 없으니, 지구에서 신도나 늘리겠다는 의도였다. 지금은 미르 병원의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새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남 쪽을 노려보았다.
“도련님들은 오늘도 늦네요.”
“걔네들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걸? 아직도 철이 덜 들었어.”
라오그뉴가 혀를 끌끌 찼다.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최신형 비행차 두 대가 차례로 날아들었다. 주차장에 대놓고 남자 둘이 내리는데, 어째 수한을 닮은 남자들이었다.
명한과 기한.
수한의 동생들이었다.
둘은 안내를 받아 새미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긁으며 새미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보였다.
“하하, 형수님! 저희가 좀 늦었지요?”
“오다가 한 사장님을 만났지 뭡니까?”
“한 사장님이요? 아, 옛날 타이탄 공격대 사장님 말이지요? 그럼 김 대표님도 뵀겠네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민종은 5년 전에 아예 은퇴를 했다.
공격대 사업이 그렇게 유망한 것도 아니고, 돈도 많이 벌었으니 인생을 즐기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미르 공격대의 법무 이사를 맡고 있던 김미현과 결혼했다.
명한의 첫 여자친구.
지금은 미현도 독립하여 자기만의 법무 법인을 차렸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인데, 미르 그룹과 사이가 좋아서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다.
새미는 명한에게 눈을 흘겼다.
“왜 그때 헤어지자고 하셔서는……”
“하하하.”
명한은 그저 웃어 넘겼다.
그 뒤로 명한은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혼자가 편하다고 했다. 반면 기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갈아치웠다. 새미가 보기에는 둘 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참, 형수님. 그거 들으셨어요?”
“뭐가요?”
“알바트로스 우주 탐험단이요. 다음달에 귀환한대요.”
“아, 들었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뭐, 미르 그룹이야 임페리얼 사용하면 알파 센터우리는 금방 다녀오겠지만, 알바트로스는 순수 지구 기술로 다녀오는 거잖아요.”
“그렇죠.”
알바트로스 공격대도 공격대 업무를 접었다.
대신 우주 탐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갈태수 사장과 네 임원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세계 최초로 알파 센터우리의 유인 왕복을 성공시키는 중이었다. 차원문 생성 장치도 설치했다고 하니, 앞으로가 더 기대 되었다.
이것으로 올 사람은 다 왔다.
굳이 예전처럼 수호자 연맹 지부로 갈 필요는 없었다. 미르 그룹 제 1 사옥에도 소형 차원문 생성 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니까. 그것도 헤븐 행성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장치였다.
새미, 예지, 용이, 라오그뉴, 명한, 기한, 이렇게 여섯만 차원문을 통과했다.
“아빠!”
예지가 크게 소리를 쳤다.
여섯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방 안.
수한의 병실이었다.
큰 나무가 방을 가득 채우고, 나무의 줄기 중앙에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작다고는 해도 성인 남자 하나는 수용할 크기였다. 바로 그 홈에 한 남자가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파리한 안색의 남자. 머리칼은 잿빛이고, 얼굴은 다소 푸석푸석했다. 눈 밑이 검은 게 건강이 과히 좋지는 않은 듯했다.
예지가 남자에게 달려가지만,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의식불명 상태.
벌써 10년 째였다.
10년 전 그날, 잠시 정신을 차렸던 이후 남자는 줄곧 잠을 자고 있었다. 예지가 태어나던 날도, 돌을 맞이했을 때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순간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예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우리 아빠가 오늘 깨어나는 거 맞아요?”
[그래, 맞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세라프가 대답했다.
마니엘라.
새롭게 개편된 세라프 최고 의회의 의장.
기존의 최고 의원들은 모두 죽었다. 칼라트라를 멸망시키고 찾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결국 세라프 종족은 일대 변화를 맞이했다.
모두 말없이 수한을 쳐다보았다.
차원문이 출렁이더니 몇 명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엘른과 히메르아, 그리고 뮤시아.
또 있었다. 질라 행성에 머무르던 아르텔라도 도착했다.
“아, 다들 잘 계셨습니까?”
“마엘른님! 오랜만이에요! 아르텔라님도 오셨네요?”
“당연히 와야지요.”
잠시 인사를 나누느라 소란스러워졌다.
금방 정숙해졌다.
수한의 입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방해할까봐 모두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꽤 지나고, 이거 뭔가 잘못된 건가 싶을 때 수한의 얼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으음……”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눈꺼풀이 올라갔다.
흰자위가 보이고, 검은자위와 동공이 드러났다. 천장의 빛을 보고 눈이 부신지 몇 번 찌푸리더니, 이내 또렷하게 초점을 맞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오빠!”
새미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정신이 들어? 내가 누군지는 알겠어?”
수한의 두 눈이 새미를 직시했다.
“우리 예쁜 마눌님이잖아.”
새미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예지도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엄마 울지 마. 엉엉.”
수한의 눈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예지의 얼굴을 직시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눈이 커졌다.
“자기야, 이 아이 혹시……”
새미가 울다 말고 환히 웃었다.
“맞아, 우리 딸이야.”
수한은 떨리는 손을 예지에게 뻗었다.
예지가 겁을 먹었는지 새미의 뒤로 숨었다. 새미는 웃으며 예지를 수한에게 밀어주었다.
“예지야, 아빠야. 지금까지 계속 봤잖아?”
“응, 으응.”
예지가 엉거주춤 앞으로 밀려나왔다.
수한의 손이 예지의 뺨에 닿았다.
보드라웠다.
따스했다.
놀랍도록 포근하면서도 연약한 느낌이 수한의 손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름이 예지야?”
“응, 이예지. 이쁘지?”
“이쁘다. 정말 이뻐……”
수한은 홀린 것처럼 예쁘다는 말을 읊조렸다.
그 말을 들은 예지가 방긋 웃었다.
꽃송이가 피어난 것 같았다.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예지를 끌어안았다. 예지는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수한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전 처음 안긴 아빠의 품이 좋은지 수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강아지처럼.
혹은 예전에 새미가 그랬던 것처럼.
새미가 다가왔다.
뒤에서 예지를 껴안았다. 그러면서 수한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수한과 새미의 눈이 마주쳤다.
많은 감정이 교차되었다.
고마움, 사랑, 믿음, 희망, 행복……
둘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10년 만의 입맞춤이었다.
둘의 입맞춤은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 사이에 안겨 있던 예지가 엄마 아빠 뭐해? 라고 하고 나서야 겨우 떨어졌다.
“그렇구나. 10년이 지났구나.”
이야기를 듣고,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는 처음으로 안긴 아빠의 품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미가 아빠 힘들 거라고 을러댔지만, 떼어놓으려고 하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떼를 썼다. 결국 수한이 계속 안고 있어야 했다.
그 상태에서 새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새미는 옛날 모습 그대로인데, 두 동생이 나이가 많이 들어 좀 놀랐다. 이젠 수한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이다.
새미가 활짝 웃었다.
“뭐 어때?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왔는데.”
수한은 한쪽 뺨을 긁적였다.
사실 건강하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영혼의 결손이 남긴 상처는 컸다. 예전의 광대했던 힘은 모조리 소실되었고, 이젠 일반인만도 못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 얘기했지만, 새미는 뭐 어떠냐는 반응을 보였다.
“초능력 좀 없으면 어때? 그렇다고 오빠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먹여 살리면 돼. 미르 공격대는 지금 미르 그룹이 됐는데, 돈 엄청나게 벌고 있어. 오빠 한 명 건사하는 건 일도 아니야.”
“하하, 그래?”
수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텔라가 수한을 살피더니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자님께서 무사하게 회복되셔서 다행입니다.”
“염려해주신 여러분 덕분이지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세계수 열매로도 도저히 회복이 되지 않았었는데요.”
마엘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사실 수한도 그게 궁금했다. 영혼의 상처는 회복이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무슨 수를 썼나 싶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묻자, 마니엘라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제국에서 만났던 자들 중, 베일리프와 줄랑, 콩코드를 기억하느냐?]
칼데츠라한의 3인방이라 불렸던 이들.
이터누스 종족과 결혼하여 이단아로 취급 받았지. 성생활도 불가능한데 어째서 결혼했을까 하고 수한이 궁금해 한 적도 있었고.
갑자기 왜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마니엘라가 뒤이어 설명을 했다.
[그들과 교류하면서 몇 가지 들은 게 있다. 우리 종족의 육체는 육체의 영생을 보장하고, 우리 종족의 정신은 정신의 영생을 보장한다고 했지. 제국인들은 지나치게 오래 사는 나머지 정신이 피폐해지기 일쑤인데, 그 셋은 미치기 직전에 이르러 그런 우리 종족의 능력을 알아냈다. 강제로 정신을 교류하여 자기
들의 정신을 치료했는데,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상대에게 반한 모양이다.]
“아!”
수한은 탄성을 질렀다.
이곳에 있는 동안 수한은 어떤 존재가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게 세라프 종족이었나 보다.
치료 효과는 탁월했다. 유리잔처럼 깨져나간 정신을 치유함은 물론, 너덜너덜해진 영혼도 조금씩 치료가 되었다. 예전의 모습을 완벽히 되찾지는 못했어도 일반적인 인간 정도로는 돌아갔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이터누스 종족 해방도 해야 한다고 했나 봅니다.]
[그랬던 것 같다. 제국이 그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지. 우리도 잘 몰랐던 내용이다만, 정신의 교류라는 게 기분이 퍽 좋더구나. 꼭 다른 종족들이 성행위를 할 때 느끼는 쾌감을 좀 더 부드럽게 느끼는 것 같았다.]
응? 나는 그런 것 못 느꼈는데?
수한이 그런 얼굴을 하자, 마니엘라가 피식 웃었다.
[그대는 모를 것이다. 정신의 교류로 발생한 힘 모두가 그대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쓰였으니까.]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지난 10년, 세라프 종족이 제게 베푼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그대가 한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는 우리 종족을 구원했으니까.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한 목숨을 저버리더라도 결코 아깝지 않겠구나.]
[하하,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당분간 얘기를 나누다가 모두 물러갔다. 수한이 피곤하다며 자리에 누웠기 때문이었다.
예지가 아빠랑 더 있겠다고 떼를 썼지만 새미에게 진압 당했다. 꿀밤 하나를 얻어맞고 엉엉 울며 끌려 나간 것이다.
모두 방을 나가기 전, 수한은 새미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왜, 오빠?]
[한 가지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예전에 황제랑 싸웠을 때 말야……]
황제가 죽으면서 뭐라고 그랬나.
결국 제국은 재건될 거라고 했지. 다름 아닌 수한의 자손들에 의해서.
게다가 제국의 역사 속 수한보다 현재의 수한이 가진 영향력이 더 크지 않나. 단순히 거대 기업의 회장이 아닌, 영웅 중 영웅이자 지구의 구원자이니까.
어쩌면 더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이 세워질 수도 있었다.
새미의 감정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듣고 보니 그렇다.]
자손들이 저지른 짓을 익히 보고 느낀 둘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방지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수한은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임페리얼을 세라프 종족에게 양도하면 어때?]
[임페리얼을?]
[응. 제국이 성립하는데 임페리얼이 정말 큰 역할을 했거든. 나중에는 시공 요새까지 됐잖아?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이젠 제국의 기술들까지 수집해서 지구의 과학 기술과 엄청나게 동떨어져 있다며. 우리가 계속 갖고 있다가 우리 후손들이 임페리얼을 자기 욕심대로 쓰기 시작하면, 역사가 반복되고 말
거야.]
[정말 그렇겠다. 그런데 왜 세라프 종족이야?]
[간단해. 임페리얼이라도 있어야, 세라프 종족이 인구를 유지할 수 있거든.]
10년 내내 정신의 교류를 해서일까. 수한의 머릿속에 세라프 종족에 대한 지식이 가득했다.
세라프 종족은 멸종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인공 자궁에서 자라는 세라프 태아들에게 줄 힘의 결정이 모자라서였다. 제국이 온전할 때야 힘의 결정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게 불가능했다.
이들에게 임페리얼을 양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힘의 결정만은 못해도 충분히 양질의 힘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럼 그것으로 현상 유지 정도는 가능했다.
새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현재 미르 그룹에서 임페리얼이 차지하는 비율은 컸다. 임페리얼만 빠져나가도 매출이 얼마나 빠질지 몰랐다.
아깝지만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렇게 하자.]
[이해해줘서 고마워.]
[아냐. 안 그래도 나도 고민하던 문제였는걸.]
둘이 의논한 사항을 마니엘라에게 알렸다.
마니엘라는 깜짝 놀라 달려왔다.
[임페리얼을 저희에게 주신다고요?]
[예. 저희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제국이 또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임페리얼을 얻으면, 인공 자궁에서 죽어가는 세라프 아기들을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
소식을 들은 세라프들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수한은 그들을 보며 당부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세라프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페리얼 정도의 물건을 그냥 넘겨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건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수한은 세라프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처럼 공정하고, 정의롭고, 정명한 성품을 종족 차원에서 잃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세라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수한은 부연 설명을 했다.
[만약 임페리얼을 제가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제 사후, 임페리얼은 제 자식에게 상속될 테고 그건 제 자식 세대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게 계속 상속이 된다면 결국 제국이 다시 생기지 않겠습니까? 고생하여 제국에 쳐들어가고, 황제를 쓰러뜨린 보람이 없어집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봤던 여러분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한 번 실패했고, 그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세라프들이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실 결론은 진작부터 나와 있었다.
마니엘라가 수한에게 정중히 말했다.
[조건을 수용하겠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수한도 화사하게 웃었다.
이 조치가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제국 성립에 영향이 없을 수도, 반대로 세라프 종족이 타락하여 예전의 사악한 종족으로 변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호출을 받은 임페리얼이 헤븐 행성으로 넘어왔다. 그것을 세라프 종족에게 넘기고 나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헤븐 행성에서 며칠을 더 쉬었다. 그런 다음에야 새미의 부축을 받으며 지구로 돌아가기로 했다.
왕년의 인원들이 다 모였다.
수한, 새미, 용이, 라오그뉴, 마엘른, 아르텔라.
여기에 더하여 수한의 동생들까지.
하지만 이제는 작별해야 할 때.
마엘른이 먼저 나서서 수한에게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세요.”
“사자님. 저도 먼저 가볼게요.”
“예아르텔라님도 몸 조심하세요.”
마엘른은 숲 엘프 중 최고수로 세계수 지킴이가 되었다. 아르텔라는 질라 행성의 클로아 휘하 교황에 올라섰다. 당연히 둘 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뮤시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안녕!]
[그래. 잘 가렴!]
수한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출발한 후 귀환했다.
수한의 귀환 소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제 1 사옥의 꼭대기에 위치한 회장실에서 내려다보니, 수한을 환영하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와 있는 게 보였다.
수한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들 뭐야? 뭐가 저리 많아?”
사옥 앞을 조금 채운 정도가 아니고, 여의도의 그 큰 도로를 꽉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교통경찰들까지 동원되어 도로의 차량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새미가 빙긋 웃었다.
“지금은 많이 줄어든 거야. 10년 전엔 정말 대단했어.”
“그래? 그런데 어째 풍경이 이상하다. 다른 공격대 사옥들 다 어디 갔어? 타이탄도 없어지고, 알바트로스도 없어졌네.”
“호호, 글쎄?”
새미는 짤랑짤랑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지난 10년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수한은 때로는 감탄하면서, 때로는 분노하면서,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그 얘기를 들었다.
가냘픈 팔로 새미를 꽉 안아주었다.
“자기 고생했어. 이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나만 믿어.”
새미가 수한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앞으로도 내가 고생해야 할 것 같은데?”
“하하하하.”
“나도 나도!”
수한이 웃자 뭐가 그리 좋아 보이는지 예지가 끼어들었다.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기도 안아달라고 웅얼거렸다.
수한은 새미와 예지를 동시에 껴안았다. 새미는 팔을 내려 예지를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셋이 하나가 되었다.
맞닿은 몸을 통해 뜨듯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졌다.
전신을 감싸는 포근한 느낌에, 수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 속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안온한 감정이 소담스럽게 피어올랐다.
언젠가 다짐한 적이 있었지.
새미와 뱃속의 아기를 지키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불지옥에 떨어져도 좋다고.
결국 해냈다.
어둠뿐이던 세상을 헤쳐 나와 드디어 평화로운 일상을 손에 넣었다.
눈을 떴다.
네 개의 눈이 자신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호수처럼 맑은 그 눈동자.
딸아이의 눈이 아내의 눈을 꼭 빼닮았다. 그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몰랐다.
수한은 딸아이의 앙증맞은 입술에 쪼옥 뽀뽀를 했다.
예지가 헤헤 웃었다.
새미의 얼굴에도 꼭 그와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어느덧 수한도 그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셋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언제까지나.
지금 이 순간을 영혼에 각인시키며.
행복감에 젖은 채.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이 작은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