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송출권을 사용하는 방법.
"여러분 너굴너굴."
"너굴너굴."
텐션 높은 오프닝이 아니었다.
너굴맨과 현규는 근엄하게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들어오셨으면 얼른 앉아보세요."
"너굴."
크라나 - 랜하? ㅋ무슨 청문회 하는거야? ㅋㅋ
플로나 - 결과 보고이니 틀린 것도 아닌 거 같은데요? ㅋㅋㅋ
ㄴ휴라타 - 인정. 결과. 보고, 진지.
지노스 -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지. 우리는 준비됐다.
진지한 분위기에도 외계 시청자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건 좋은 신호였다.
"성과가 있으셨군요?"
"너굴!"
자신감과 당당함은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다.
크라나 - 내가 대표로 해? ㅋㅋㅋㅋ
ㄴ지노스 - 난 상관없다.
ㄴ플로나 - 저도 상관없습니다.
ㄴ휴라타 - 먼저. 할일. 있음.
"할 일이요?"
보고하기 전에 할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휴라타 - 감사. 보고, 먼저.
"아!! 그렇네요!"
감사 결과 보고는 송출권 결과 보고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세부자료는 인공이에게 넘겨주시고 결과만 말해 주세요. 부정이 있었습니까?"
휴라타- 정리. 내용. 첨부.
보고서에 정리 내용을 첨부한 모양이었다.
- 보고서에 정리된 내용을 읽겠습니다.
인공이가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 감사 결과 부정이나 불법적인 행위는 없었고, 결과가 기발하기는 하나 업을 벌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임.
"잠깐!!!"
부정이 없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결과가 기발한 건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다 쳐도 업을 벌기에 부적절하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업을 벌기 힘들다는 거예요? 아님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크라나 - ㅋㅋㅋㅋㅋ이게 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그건 형이 생각해 봐야 할 듯 ㅋㅋㅋ
ㄴ지노스 -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ㄴ플로나 - 이거 참. 이건 모두 우리형을 믿고 추진한 일입니다.
외계인들의 말이 좀 이상했다.
"이거 분위기가 안 좋은 쪽으로 흐르는 거 같은데요? 마치 앞으로 있을 고생의 복선 같은…"
<크라나님이 100Point를 후원하셨습니다.>
<크라나 - 일단 보고부터 할까?>
말하는 중간에 후원 메시지가 도착했고 현규의 불안감은 한층 더 커졌다.
"아… 진짜 이럴 꺼예요? 이거 진짜 복선 맞는 거 같은데!?"
크라나 - ㅋㅋㅋㅋㅋ아니! 형 기발하다니깐! 일단 우리 결과 보고부터 듣는 게 어때?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크라나, 플로나, 지노스. 이 3개의 종족이 연합해서 도출한 최고의 결과일 테니 '기발하다'라는 단어에 기대해 보기로 했다.
"좋아요. 우선 결과 보고부터 듣겠습니다."
크라나 - 좋지!!!
본격적으로 송출권 결과 보고가 시작됐다.
***
크라나 - 이건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어. 각자 생각한 이상적인 시청자의 모습이 달랐거든 ㅋㅋㅋ 우리는 유쾌하고, 업이 좀 있는 친구들을 원했어.
ㄴ지노스 -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채워줄 수 있는 종족을 원했다.
플로나 - 저희는 무조건! 업! 더 많은 업! 그게 방송이 재밌어지는 요건이라 생각했습니다!
크라나는 유쾌함, 지노스는 정보와 지식, 플로나는 많은 업.
각자 원하는 시청자가 달랐다.
크라나 - 그래서! 우리는 각자 베스트 3를 뽑고, 베스트 1을 추려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경쟁이에요?"
머리를 모으라고 했더니 또 경쟁을 했다.
크라나 - ㅋㅋㅋ아니! 애초에 한 종족을 뽑는 게 아니었거든!
ㄴ플로나 - 한 명을 고르는 게 아닌. 세 종족에게 동시에 송출권을 권할 생각이었습니다.
ㄴ지노스 - 실제로 의견이 모이고, 나중엔 세 종족이 모두 만족하는 종족들이 선정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크라나, 지노스, 플로나는 각자의 이상에 맞는 종족 하나씩 뽑아 총 세 종족을 선정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크라나- 그런데, 마지막에 이 생각이 들더라고.
ㄴ지노스- 크라나 답지 않는 좋은 생각이었다.
ㄴ플로나 - 그건 저희도 동의합니다!!
그러다가 최종 선택에서 마음이 변한 것 같다.
"무슨 생각이셨길래요?"
크라나 - 여긴 랜덤박스다.
ㄴ지노스- 핵심을 꿰뚫는 말이었다.
ㄴ플로나 - 솔직히 조금 오그라들긴 했습니다.
오그라드는 말이 맞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들이 랜덤박스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캬!! 이것이 사랑입니까?"
크라나 -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 기발하고, 더 독창적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좀 더 장기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계속 던졌어.
지식을 모아 기발하고 장기적으로 도움 되는 결과를 도출한다. 나쁘지 않았다.
"결과는요?"
크라나 - 기막힌 결과가 나왔지!!
ㄴ지노스 - 랜덤박스만 할 수 있는 일.
ㄴ플로나 - 게다가 나중을 생각해 봐도 나쁠 게 전혀 없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머지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크라나의 채팅을 본 현규의 표정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랜빡이들아!!! 무슨 짓거리를 한거야!!! 이 악마들아!!!!"
채팅창에 'ㅋㅋㅋ'표시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랜덤박스에 애정을 가지면?
랜빡이가 만들어 진다.
***
방송이 끝나고 2차 회의가 열렸다.
"장난 사절이야. 진지하게 대답해."
- 알겠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해?"
- 발상 자체는 기발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발하다는 걸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또?"
- 얼마나 많은 토론을 거쳤을지 예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외계인으로서의 상식을 버리고, 새롭게 접근한 것입니다.
인공이의 말은 극찬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업을 포기하고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
이건 송출권을 버리는 일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게 통할지도 의문이었다.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어야 했다.
-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데이터가 전혀 없습니다.
"이게 문제야!! 결과는 아무도 장담 못 하는 거잖아!"
- 하지만, 성공했을 경우 얻게 될 이득은 다른 외계인을 합류시켰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이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은 못 가. 스토리가 있어야 돼!"
- 준비해도 간파당하실 겁니다.
"알아."
- 그래도 준비하십니까?
인공이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건 성의의 문제거든."
- 이건 휴먼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인공이의 도움까지 받을 수 없었다.
"미치겠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위험하고, 무모하고, 멍청한 일이었다.
"감이 미쳤나."
하지만 직감은 이것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잡을 수 없는 기회.
"10분만. 나머지 세팅해줘."
- 알겠습니다.
현규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고 인공이는 너굴맨의 도움을 받아 요리와 술을 준비했다.
수십 가지의 요리와 수십 종류의 술이 카트에 한가득 실려 있었다.
- 준비 끝났습니다.
"나도 정리됐어. 다녀올게."
"너굴너굴!"
- 건투를 기원합니다.
인공이와 너굴맨의 배웅을 받으며 현규는 외계로 이동했다.
송출권을 사용할 시간이다.
***
"관리자님! 저 왔습니다!"
밖에서 걱정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현규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녀석, 카트가 무거우니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구나."
"맛있는 녀석으로 준비해 왔습니다."
관리자는 묘한 미소를 흘리며 현규를 쳐다봤다.
"그래서 이렇게 잔뜩 준비한 이유가 무엇이냐?"
관리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이건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고생하셨던 관리자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깜짝 선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선물?"
관리자는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넵!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저희를 지켜주시는데! 제가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그 은혜를 잊을까요?"
현규는 능글맞은 표정을 한 채 노골적으로 아부했다.
"오늘은 요상한 컨셉을 잡고 왔구나."
"컨셉이라뇨! 감사하다는 마음은 진짜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건 진심이었다.
현규의 말에 관리자가 미소지었다.
"재물도 받아보고 공물도 받아봤지만 선물은 처음이구나."
"넵! 선물입니다!"
뭔가 끔찍한 예시를 든 것 같지만 현규는 애써 무시하고 선물을 강조했다.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두근두근하는구나."
"아…"
선물을 기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현규는 말문이 막혔다.
"그 눈빛은 서비스인 게냐?"
"아! 아닙니다! 너무 예쁘셔서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네요."
"서비스가 맞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리 기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 했구나. 준비한 술과 음식을 먹어 보자꾸나."
"좋아하시는 술과 요리로 챙겼습니다."
단순히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게 아니었다. 그건 곧 현규의 수작을 받아준다는 말이었다.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좋구나. 좋아."
드디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잡혔다.
***
"슬슬 선물을 꺼내 보거라."
"송출권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현규의 말에 그녀가 지긋이 쳐다봤다.
마치 선물이라며?'하고 묻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이만한 선물이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무엇으로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인 게냐?"
그녀의 질문에도 현규는 자신이 있었다.
"저번에 고약한 영감들을 이야기하신 적 있으시지요?"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고약한
영감탱이들이지."
고약한 영감들은 다른 관리자를 말했다.
"관리자님께서 그들과 이야기하여 이곳을 계속 관리하게 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네 녀석이 어른은 아니지 않으냐."
여전히 이곳은 그녀의 관리였다.
"관리자님이 계시는데 다른 분들이 이곳을 강제로 훔쳐보거나 엿볼 수는 없겠죠?"
"그렇지. 법을 정해 놓았으니 아무리 영감들이라 해도 불가능하지."
생각대로였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그분들도 이곳이 궁금하겠네요."
"그럴 게다. 영감탱이들이 보지 못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일 테니."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일보다 하지 못하는 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건 손에 박힌 조그만 가시처럼 거슬리고 신경 쓰일 것이다.
"그분들을 시청자로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나는 그 영감들 속이 더 타들어 갔으면 좋겠구나."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관리자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미 현규가 말한 선물을 눈치챈 것 같았다.
"시청자는 관리자님이 마음껏 통제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볼 수 있게 해 주고, 그들을 통제하에 두시면 답답했던 속이 풀리실 겁니다."
시청자가 되는 순간 그들은 관리자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채팅창에서만큼은 동등한 위치가 아닌 상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관리위원회를 뒷배로 두겠다는 것이냐?"
"아이고! 뒷배라뇨. 다만, 그분들도 재미있게 봐주시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설령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관리자님 속이 풀리시기만 하면 저는 좋습니다."
물론 그게 순수한 진심은 아니었지만 관리자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네 녀석은 어찌 이리 이쁜 짓만 하는 것이냐."
"제 선물이 만족스러우십니까?"
"아무렴! 이보다 만족스러운 선물이 있겠느냐?! 이리 오거라. 잔뜩 칭찬해 주마!"
소파에서 일어난 관리자님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잠깐…"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은.
"나는 못 기다리겠구나!"
그녀의 가슴에 파묻혀 말할 수 없었다.
현규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감격할 필요 없다."
감격이 아니었다. 귓속에 비명처럼 위험 경고가 울려 퍼졌다.
"잘했구나…"
현규가 의식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게 적응이 되네."
관리자를 만나 기절하는 것도 이제는 적응이 됐다. 쓰러진 사이 다른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인공아!"
- 축하합니다. 휴먼.
인공이에게서 축하 인사가 나왔다.
"어!? 무슨 일 있었어?"
- 관리자님을 당황하게 한 건 우주 역사상 몇 안 되는 일로 예측됩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겁니다.
어제 현규가 쓰러지고 관리자님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진짜 기분 좋으셨나 보네."
- 그런 것 같습니다.
송출권 사용은 대성공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
- 있었습니다. 관리자님께서 현규님과의 대화를 유튜브에 업로드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왜!?"
- 승리의 기록이라고 하십니다.
오직 채팅창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부터 다른 관리자들은 관리자님의 통제를 받는 것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으셨나 보네."
- 저희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무려 관리위원회가 우리의 뒷배였다.
"오늘은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해 줘도 안 아까울 것 같은데?"
- 해당 발언을 녹음합니다.
"어!?"
기분이 좋아 그냥 던진 말이었다.
- 시청자들의 요청사항이 쌓이고 있습니다. 오늘같이 기분 좋을 때. 처리하길 요청합니다.
"좋아!! 그럼, 오늘 컨텐츠는 '시청자들의 건의사항'으로 가자!"
그냥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콘텐츠라도 뽑아야 했다. 이렇게 오늘의 방송이 급계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