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법 펜던트의 비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과 방금 전 다시 되살아난 희준의 예전 모습을 떠올린 그는 피식 웃었다.
“에이, 좋다 말았네. 내가 지금 개꿈을 꾸고 있는가 보군.”
희준이 살아 있어서 참 좋았는데, 너무 아쉽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신은 죽었는데.
그럼 죽지 않고 잠을 자는 중……?
혹시 병원?
그러면 안 되는데. 희수에게 주려던 선물이 물거품이 될 텐데.
‘아얏.’
뺨을 꼬집자 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진혁은 뺨을 쓰다듬으며 거울을 다시 보았다. 똑같은 얼굴, 뺨에 꼬집힌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설마…….’
책에서만 봤던 일이 일어나기라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말이 돼?’
찬물을 뒤집어써 봤다.
‘믿을 게 따로 있지.’
미친놈처럼 제자리 뛰기도 해 봤다.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다 물기 때문에 미끄러져서 뒤로 벌렁 넘어졌다.
우당탕탕.
“아흐…….”
엉덩이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
문이 덜컹 열리더니 희준의 고함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 새끼, 씻으라니까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야?”
진혁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서 희준을 쳐다보았다.
“희준아, 내가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뭐? 에라이!”
딱!
희준의 꿀밤이 제대로 이마에 꽂혔다.
골이 띵하니 아팠다.
그제야 진혁은 자신이 진짜 과거로 돌아온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
경비 일을 하면서 시간 나면 가끔 봤던 판타지 책 속의 ‘회귀’ 같은 거 말이다.
눈이 반짝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꿈이어도 상관없어. 이제는 어디서든 절대 희수를 보내지 않을 거야!’
진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콩나물해장국집에서 마주 앉았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미소 띤 얼굴로 배를 두드리는 진혁에게 희준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혁아, 너 진짜 전근 신청할 거야?”
“……!”
“네 기분 모르는 것은 아닌데, 난 좀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
과거에 희준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한 귀로 흘리고 자기 고집대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희준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지금껏 다들 기피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젯다 지사에서 술도 못 먹고 무더운 더위와 싸워 가며 3년을 버텼다.
대리 진급에서 물먹은 것은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 근무도 아니고 급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이집트 카이로 지사로 발령 내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이건 누가 봐도 그냥 사표 쓰고 떠나라는 말이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진혁은 지사장과 대판 싸운 후 일방적으로 연가를 내고 귀국했다.
당시 국내영업부로 옮기기 위해 알아봤는데 반응이 호의적이었다.
알아주지도 않고 일만 많아 다들 기피하는 곳이니 항상 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진혁이 가만히 있자 희준이 말을 이었다.
“넌 깡이 있는 놈이니 국내영업부에서도 잘해낼 거야. 하지만 우리 해외사업부에서 근무한 지 이제 겨우 3년이잖아. 대학에서 4년 공부한 것보다 짧아. 난 아직은 여기서 배울 게 더 많다고 생각해. 옮기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갈 거야.”
“빌어먹을 자식. 네 고집을 누가 말리겠니. 이 고집불통.”
“미친놈. 이집트 간다고!”
“뭐? 카이로 지사로 가겠다고?”
“그래, 인마.”
희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 이내 얼굴이 환해졌다.
“잘 생각했다. 정말 잘 생각했어.”
“웃기고 있네. 너 내 얼굴 보기 싫어서 해외로 밀어내는 거지?”
“그래, 이 자식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맘을 졸였는데. 어제는 또 어떻고. 아우,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번에 떠나면 아예 돌아오지도 마.”
“알았다. 사막에 뼈를 묻을 거야.”
“자식, 뭔 말을 못 하게 해.”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처음 생각한 대로 무역에 비전이 있는 게 맞아. 내가 초심을 잃었다. 난 반드시 무역으로 성공할 거야.”
“그래. 넌 할 수 있어, 서진혁!”
하이파이브를 하는 진혁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과거에는 자신의 고집대로 국내영업부로 옮겼었다.
물론 그곳에 가서는 다시 밀리는 게 싫어 죽기 살기로 일해 인정받고 핵심부서인 기획실로 영전했었다.
하지만 치이는 업무에 가정을 소홀히 했고, 그것이 희수를 잃은 원인이 되었었다.
이제는 이전과 다른 길을 갈 작정이었다.
그 전에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한 가지 알아봐 줄 게 있어.”
“뭔데?”
“김……. 그러니까…….”
“왜 갑자기 말을 더듬거려? 너 어제부터 좀 이상한 거 알지?”
“잠시만…….”
진혁은 답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살을 부대끼고 살았던 여자인데 이름은 물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의 기억들이 진흙탕처럼 뒤죽박죽 엉클어져 혼란스러웠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희준이 다시 물었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야. 잠시만…….”
재촉하는 희준을 말리고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두통만 밀려왔다.
‘회귀하면서 문제가 생겼나?’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잊고 싶은 상대였고, 특히나 희수에게는 최악의 엄마였다. 희수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엄마를 찾아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미련을 버리니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희준에게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굴 찾아보려고 했는데,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만 가자.”
“정말 이상하네. 진짜 괜찮아?”
“괜찮다니까. 이집트에 가려면 짐부터 싸야 하니까 얼른 가자.”
서둘러 계산하고 아직도 표정이 풀리지 않은 희준을 억지로 택시에 태워 보냈다.
혼자 남은 진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지, 집이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진혁의 눈에 지하철역이 보였는데,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쪽으로 걸어갔다.
2호선과 8호선이 만나는 잠실역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혁은 8호선을 타고 천호역에서 내렸다.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5호선으로 다시 갈아타고 상일동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전철에서 내린 진혁은 다시 한번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출구가 네 개나 됐는데, 어디도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잠시 서성이던 진혁은 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과거로 돌아온 것은 좋은데 기억이 흐린 게 문제였다. 계속 신경 쓰며 길을 찾다보니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한참 동안 앉아 있으며 느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익숙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진혁은 각각의 출구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2번 출구 앞에 서자 익숙함이 다시 느껴졌다.
언제 또 사라질지 몰라 그 느낌을 따라가자 어느새 주공 2단지 210동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맨 꼭대기 층인 501호의 문 앞에 선 진혁이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진혁이니?”
“예.”
문이 열리자마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엄마!”
“대체 어디서 잔 거야? 전화는 대체 왜 안 받았어? 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
얼굴을 보자마자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진혁은 그마저도 정겹게 느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어머니는 자식의 연이은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한숨만 내쉬던 모습이었다.
“어서 들어와라.”
먼저 들어가려는 어머니를 진혁이 뒤에서 껴안았다.
“미안해요.”
“다 큰 놈이 징그럽게. 어여 떨어져.”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게요.”
평소와 다른 아들의 모습에 김영숙은 가슴이 아려 왔다.
얼마간 더 그렇게 있던 진혁이 팔을 풀었다.
“오랜만에 희준이 만나서 술 마셨어요.”
“그럼 미리 전화라도 했어야지.”
“죄송해요.”
“희준이는 잘 지내지?”
친구의 안부를 묻는 김영숙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그늘에 진혁은 마음이 무거웠다.
대리가 된 희준과 달리 진급에서 누락됐다고 울분을 토하던 자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밥 먹어야지?”
“아버지는요?”
“아직 퇴근 전이시지.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오시면 같이 먹을게요. 그동안 조금 쉴게요.”
“그렇게 해라.”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세월이 흔적이 묻은 천장의 벽지와 익숙한 형광등이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은 확실했다.
다만 기억이 흐린 게 문제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진혁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때 노인이 나타났다.
얼굴 가득 자잘한 주름이 있는 백발노인이었는데, 흰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한손에 들고 있는 긴 지팡이를 흔들자 탁자와 의자가 생겼다.
“이쪽에 와서 앉거라.”
진혁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노인의 맞은편 의자에 앉혀졌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진혁의 상태를 무시한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이름은 베송이라고 한다.”
베송은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대마법사였다.
그런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은 딸 얀느였다.
베송은 마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천성적으로 몸이 약한 얀느는 마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민하던 베송은 마법 펜던트를 만들었다.
“세계 4대 보석인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반지, 팔찌, 귀걸이, 목걸이를 만들어 딸을 보호케 했지.”
덕분에 얀느는 큰 위험 없이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네가 이 영상을 본다는 것은 내 딸 얀느와 인연이…….”
찌짓……. 찌지짓.
중요한 순간에 베송의 모습이 흔들리며 잡음에 말소리마저 묻혔다.
진혁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어르신!”
다행히 노인의 모습이 다시 보이고 말이 들렸다.
“인연이 있다는 방증이겠지. 다시 찾은 인생 행복하게 살게.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찌지지짓, 찌짓, 팍!
잠시 선명했던 영상과 목소리가 흔들리며 꺼져 버리자 베송이 만들어 놓은 탁자와 의자도 함께 사라졌다.
그 바람에 진혁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윽!”
엉덩이에 느껴지는 아픔으로 인해 눈이 번쩍 떠졌다. 모양새는 딱 잠꼬대하다 침대에서 떨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든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이 확실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대마법사인 베송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얀느가 죽고 나서 마법 펜던트는 차원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떨어진 곳은 지구.
하지만 지구에는 마법 펜던트를 작동시킬 룬어를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베송의 역작이 평범한 장신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혁이 얻은 에메랄드 펜던트는 그중에 강도가 가장 약한 보석이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약해져 금이 간 상태였다.
그 부분을 진혁이 만지면서 누르자 마나가 흘러나와 룬어 없이도 작동한 게 행운이었다.
다만, 그로 인해 기억이 온전하게 이어지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말았다.
“역시 그 목걸이 때문에 내가…….”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오셨다. 밥 먹게 일어나.”
아버지…….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진혁이 얼른 밖으로 나가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버지 서명수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