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새로운 동료들
“젯다에서의 일은 잊어. 여긴 카이로야.”
“감사합니다.”
직설적인 성격답게 손민한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미 업무 분장이 끝난 상태라 지금 조정하기가 애매해.”
“이해합니다.”
“당분간은 사무실 업무를 하며 분위기부터 익혀. 하반기에 보자.”
“알겠습니다.”
“업무 지시는 최 대리에게 받으면 될 거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민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직장 경험이 너무 많았다.
젯다 지사의 일을 알고 있기에, 상반기 동안 하는 것을 봐서 추후 자신의 처분을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 최영재가 막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리님.”
“지금 나가 봐야 하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카심, 갑시다.”
최영재가 처음 보는 아랍 사내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에 김동식이 어느새 다가와 혀를 찼다.
“자식이. 지하철 타고 가면 될 텐데 꼭 카심을 데리고 가네. 나도 오후에 세관에 가 봐야 하는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누구? 아, 카심? 운전사 겸 통역이야. 세차하느라 늦게 올라왔어.”
“세관에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마침 할 일도 없고, 카이로 시내도 익히려고요.”
“그럼 나야 좋지.”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랍어가 능숙하지 않아 상당히 부담스러웠는데…….
김동식의 얼굴이 확 폈다.
그날 퇴근은 김동식 과장과 함께했다.
역 근처의 낡은 5층짜리 아파트가 숙소였다. 규모는 한국의 40평형 아파트 정도였다.
김동식 과장이 룸메이트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아비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확 밀려왔다.
김동식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청소를 한다고는 했는데, 원체 건물이 낡아서.”
“앞으로 청소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럼 내가 미안하지.”
“아닙니다. 제가 후배니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합니다.”
“자식, 자세가 좋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요즘 신세대 같지 않은 모습에 김동식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거실의 낡은 소파에 앉아 있자 김동식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와 마른안주를 꺼내왔다.
“그래도 첫날인데 한잔해야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캬! 이 맛이 여기 근무하는 유일한 낙이다.”
이집트는 다른 중동 이슬람교 국가들과 달리 음주가 허용됐다.
이집트인들에게 맥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였다. 그래서 자체 생산하는 맥주도 있었다.
다만 종교적인 이유로 위스키 같은 독한 술은 자제하는 편이긴 했다.
단숨에 한 캔씩 비우고 김동식이 물었다.
“젯다에서 크게 한바탕했다며?”
“괜한 객기였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무라려고 한 말이 아니야. 난 네가 부럽다. 그 혈기가.”
김동식의 어두운 얼굴에 진혁도 입을 닫았다.
다들 꺼리는 중동 근무를 하고도 차장 진급에서 연달아 물먹었으니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족을 두고 이 먼 이국땅에서 홀로 지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김동식이 새로 캔을 따며 말했다.
“올해는 반드시 진급해서 귀국하고 말 거야. 안 그럼 나도 너처럼 확 받아 버릴 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꼭 금의환향하실 겁니다.”
“자식! 빈말이라도 고맙다.”
캔을 힘차게 부딪쳤다.
이런저런 회사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다 보니 어느새 빈 캔이 탁자 위에 한가득이었다.
“소주 마시자, 소주.”
비틀거리며 냉장고에 다녀온 김동식의 손에 한국산 소주가 들려 있었다.
“취하신 것 같은데 그만 주무시지요.”
“이자식이, 나를 어떻게 보고. 끄떡없어, 인마.”
진혁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는 김동식을 말리지 않았다.
취하면 긴장이 풀리고 본심이 나온다. 중국에서 사업할 때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술을 권하며 진도를 뺐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못해 김동식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최영재, 싸가지 없는 새끼. 실적 좀 한다고 까부는데, 언젠가는 큰코다칠 거야.”
“최 대리님이 능력 있다고 하던데요?”
“능력은 쥐뿔. 오래 근무해서 빅바이어를 죄다 쥐고 있어서 그런 것뿐이야. 내가 그 조건이었으면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어.”
“바이어 분배는 지사장님의 권한 아닙니까?”
“그 양반이야 무조건 실적이 우선이니, 아무래도 중간에 담당자를 바꾸는 게 부담스러우시겠지. 최 대리 말이라면 깜박 죽어. 씨펄. 더러워서.”
“그렇군요.”
“사무실 업무 하란다고 그 말 믿으면 안 돼. 상사원은 누가 뭐래도 실적이 있어야 해. 오더를 쥐고 있으면 지사장 아니라 그 할애비도 함부로 못 해, 인마. 으음.”
결국 김동식이 술에 취해 탁자에 머리를 박고 코를 골았다.
손민한이 왜 김동식이 아닌 최영재에게 빅바이어를 맡겼는지 알 수 있었다.
상사원이 바이어 접대를 하는 것은 다반사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먼저 술에 취하면 안 된다.
설혹 취해도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있다.
진혁은 김동식을 부축해서 겨우 침대에 눕혀 놓고 다시 나와 남은 술을 마셨다.
원래 이렇게 술이 세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로 온 그날 이후 몸이 변했다.
오희준과 술을 여러 번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당이라고 불리며 항상 마지막까지 챙겼던 오희준이 먼저 취하는 바람에 택시를 태워 보낼 정도였다.
그러고도 다음 날 아침에도 아무런 숙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눈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난시가 심해 안경을 썼었다. 그런데 이젠 벗고도 훨씬 더 선명하게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또 다시 마음속에 의문이 일었지만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치고 일어났다. 해답 없는 의문보다는 현재를 슬기롭게 사는 게 우선이었다.
당장 결혼해서 희수를 얼른 만나고 싶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태어날 희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곳에서 사업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희수가 정말 자신의 딸로 태어난다면 말이다.
진혁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술자리의 잔재들을 정리했다. 그 후에야 씻고 빈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카이로 지사에서의 첫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 * *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들어선 직원들은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항상 퀴퀴한 냄새가 진동해서 출근하자마자 창문부터 열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열려 있는 창문으로 상쾌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바닥 청소까지 마친 진혁이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앉아들 계십시오. 제가 아주 맛있는 커피를 타 오겠습니다.”
탕비실로 향하는 진혁의 모습에 김동식이 최영재에게 한 소리 했다.
“너 인마, 그러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웃기고 있네. 퇴근하고 따로 불러서 얼마나 뭐라 했으면 얘가 저러냐. 쯔쯔쯧.”
“어제 퇴근은 과장님이랑 했잖아요.”
“맞아. 그랬지?”
머리를 긁적이는 김동식의 얼굴은 아직도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저 자식은 어제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네.’
탕비실로 소마야가 따라 들어왔다.
“커피는 제가 탈게요.”
“오늘은 다른 사람이 탄 커피를 드셔 보세요.”
“하지만 그건 제 일인데요.”
“아직 업무 시간 전이니 괜찮습니다. 가서 좀 쉬세요.”
진혁은 소마야를 억지로 내보냈다.
그녀는 행정 보조와 안내로 채용된 현지 직원이었다.
앞으로 이곳 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어떻게든 안 좋은 이미지를 탈피해야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청소와 커피대접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 없었다.
이 역시 오랜 인생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였다.
얼마 후 탕비실에서 나온 진혁은 쟁반에서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김동식에게 내밀었다.
“과장님, 정성을 담은 커피입니다.”
“이거, 진혁 씨가 탄 커피는 처음인데. 근데 괜찮아?”
“끄떡없습니다. 앞으로는 모닝커피는 제가 타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고.”
커피를 음미하는 김동식을 두고 나머지 최영재의 자리로 갔다. 이미 컴퓨터를 켠 최영재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건 말건 진혁은 커피를 내려놓고 인사한 다음 카심에게 다가갔다.
“한잔하세요.”
“저도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같은 식구 아닙니까.”
스스럼없이 내미는 커피를 받은 카심도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임시로 채용된 현지인으로, 통역과 운전 등 허드렛일을 맡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 직원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었다.
카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게 뭐 부탁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없는데요. 혹시 그럴 일이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카심 씨도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카심의 인사를 받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역시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마야였다.
진혁은 그녀에게도 웃는 얼굴로 마지막 커피를 건네주고 탕비실로 돌아왔다.
지사장 손민한은 거래처에 들렀다가 오후에 출근한다고 해서 부재중이었다.
탕비실 문을 닫은 진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싸!’
다시 돌아온 인생의 첫 출발이 나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혁을 최영재가 불렀다.
“지사장님께 업무 인수인계받으라는 지시는 들었지?”
“네.”
“이거야.”
책상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너도 본사에서 T-trade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바이어 정보 시스템 말씀입니까?”
“그래. 각 지사별로 관리했던 바이어 리스트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야.”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시스템인데 이쪽 세계에서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최영재의 말이 이어졌다.
“기초 데이터를 입력하는 게 네가 할 일이야. 여기 있는 것은 작년도 자료고, 창고에 있는 과거 자료도 전부 입력해야 해. 이건 매뉴얼이고.”
“…….”
“불만 있어?”
“아닙니다. 제가 입력하지요.”
눈을 치켜떴던 진혁이 얼른 표정을 풀고 순순히 매뉴얼 책자를 받았다.
과거였다면 당장 한판 싸웠을 것이다.
말이 좋아 자료 입력이지, 단순 노가다 업무였다. 이런 일은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처리하는 게 맞았다.
간을 보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서류를 자신의 책상 옆으로 옮겨 놓고 자리에 앉아 매뉴얼을 훑어보던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T-trade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가 마이크로소프트 SQL로 구축되어 있었다. 과거의 진혁이 익숙하게 다뤘던 프로그램이었다.
옆자리의 김동식에게 물었다.
“과장님, 기존에는 바이어 리스트를 어떻게 관리했습니까?”
“엑셀 파일로 했지.”
“그 자료를 좀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알았어. 메일로 보내 줄게.”
메일이 도착하자 파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고 T-trade 시스템에 접속했다.
명령어 창에 능숙하게 실행문을 입력했다.
┖ backup database pubs to disk=‘c:\temp\pubs’ with init
데이터베이스를 백업받아서 구조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받아 놓은 엑셀 화일을 가공했다. 순서와 형식만 다를 뿐, 어차피 들어갈 내용은 다 정리되어 있었다.
샘플 파일을 만들어서 테스트를 해봤다.
┖ LOAD DATA LOCAL INFILE ‘/home/test.txt’
┖ DELETE FROM T_Table
쿼리문을 이용해 데이터를 넣고 삭제하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엑셀 파일의 자료와 T-trade 시스템의 DB를 맞췄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해 보니 능숙해졌다.
김동식이 관리하는 바이어 리스트의 입력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모두 끝낼 수 있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일어나 최영재에게 다가갔다.
“저, 대리님…….”
“나 바빠. 모르면 매뉴얼에 적혀 있는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봐. 신입 사원도 아니고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해?”
말 참 싸가지 없게 하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들은 그냥 죽어 있으면 더 악독하게 굴었다. 본때를 보여 주는 게 좋았다.
진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이 관리하는 리스트…… 이미 다 입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