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6화 (6/307)

6화. 카릴리 시장 조사

그날부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진혁은 카심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업무를 봤다.

덕분에 두세 번 갈 일들을 한 번에 처리하게 되면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퇴근해 숙소로 돌아온 진혁은 편한 검정 스니커즈로 갈아 신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가 찾아간 곳은 카이로의 남대문 시장으로 불리는 카릴리 시장이었다.

1382년에 만들어진 카릴리 시장은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최대 교역장이었다.

카이로 여행의 필수 코스로 알려져 상인과 손님에 관광객들이 뒤섞여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졌다고는 하지만 한낮에 사막을 달군 열기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혼잡한 인파를 뚫고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저절로 흘렀다.

가게마다 들러 팸플릿과 명함을 돌렸다.

쫓겨나고 무시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진혁은 꿋꿋이 자신을 알렸다.

시장이 넓고 길어 하루에 한 블록을 다 돌기도 벅찼다.

12시가 넘어가자 집으로 돌아와 샤워로 땀을 씻어냈다. 김동식의 방이 조용한 것을 보니 이미 잠든 듯했다.

자기 전에 수첩을 꺼내 놓고 오늘 방문한 곳들과 특징을 기록했다.

인간의 기억은 유한하다.

그날의 일은 당일 기록하는 게 최선이었다.

더불어 내일의 계획도 세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기록을 마친 진혁은 오늘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와 같이 12시가 넘어 조심스럽게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서던 진혁이 걸음을 멈췄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고, 김동식이 소파에 앉아 자작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맥주와 안주거리들이 놓여 있었다.

“들어왔으면 와서 앉아.”

맞은편에 앉자 그가 캔 맥주부터 내밀었다.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시간까지 바이어를 만나는 것이 아니면 갈 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땀 좀 흘렸을 텐데 먼저 한잔해.”

진혁이 시원하게 캔을 비우고 내려놓자 김동식의 말이 이어졌다.

“상사원이 사무실에서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으니 힘들었겠지. 그래서 어떻게든 실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찾아간 곳이 카릴리 시장이고.”

“돗자리 까셔도 되겠습니다.”

“나도 해 봤어. 여기 첫 발령 받아 온 놈들은 모두 거쳤던 길이라고 하더라. 근데 몸만 축나. 고생하는데 힘 빠지는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

김동식이 들고 있던 캔을 비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이로 지사에서 실적을 만들려면 대통령 라인을 잡아야 해.”

“무바라크 대통령 말입니까?”

“맞아. 3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모든 이권이 그쪽에 몰려 있어.”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는 1981년에 권좌에 올라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권력은 물과 같아서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었다.

두 아들을 포함한 측근들이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부패한 곳이 지금 이집트의 현실이었다.

진혁이 창고에서 본 서류들을 기억해냈다.

“큰 아들 알리 쪽은 지사장님이 맡고 있고, 둘째 아들 자밀은 최 대리님 영역 같던데, 틈이 있겠습니까?”

“빌어먹을. 그래서 내가 물먹은 거야. 카이로 지사는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떠나지 않으면 답이 없어.”

아무리 회사에서 직원끼리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고 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동료 간에는 서로의 영역을 지켜 주는 게 불문율이었다.

동료의 밥그릇을 넘봤다가는 실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비난이 쏟아져 직장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너도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고 적당히 하면서 기회를 노려. 두 사람이 평생 이집트에 있을 것은 아니니까.”

“그렇기는 하지요.”

“카릴리 시장 상인들은 대를 이어 오기 때문에 거래처를 바꾸기 힘들어. 설혹 거래를 튼다고 해도 규모가 작아. 큰 건을 잡아채는 게 중요해.”

“그것도 방법이겠군요.”

말과는 달리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기회는 오는 게 아니다. 기회는 만드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진혁이 시장을 도는 것은 단순히 영업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 조사를 하며 돈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느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김동식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도, 이해시킬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각자의 생각과 삶이 있다.

그래서 다음 날에도 퇴근한 진혁의 발걸음은 시장으로 향했다.

* * *

오늘도 변함없이 퇴근 후 시장을 돌아다닌 진혁이 숙소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시장 입구에서 지하철까지 가는 길의 양편은 노점상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야시장을 구경 나온 관광객들과 늦게까지 일하는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거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진혁이었는데 오늘은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저녁을 일찍 먹는 바람에 배가 고팠다. 집에 가 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이 시간에 혼자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도 귀찮았다.

여기서 요기를 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숯불에 구운 옥수수를 파는 노점상이 눈에 띄었다.

문득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옥수수 하면 강원도였다.

아버지가 약속대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백두산 관광을 다녀왔다는 것은 안부 전화를 했을 때 들었다.

문자로 보낸 기념사진에서 천지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진혁은 가슴속 무거운 짐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생각에 잠긴 진혁이 잘 익은 옥수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 얼마……. 어? 카심 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이네.”

“한국의 가족을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가족.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죠.”

새 옥수수에 소스를 발라 숯불에 올려놓는 카심의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절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옥수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이거 맛이 괜찮네요.”

“그럼. 누가 만든 것인데.”

“여기를 직접 운영하시는 겁니까?”

“그럼 이 코딱지만 한 걸 사람 두고 합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장사하시면 안 피곤하세요?”

카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는 미스터 서는?”

“예?”

“사무실 일도 힘든데 밤마다 시장 돌면서 영업하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김 과장 입이 가볍습니다.”

진혁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카심이 컵에 물을 담아 내밀며 물었다.

“오더는 좀 했습니까?”

“그냥 시장 조사차 다니는 겁니다.”

카심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동에서 제일 큰 시장이었다.

첫 부임한 영업 사원이면 어김없이 대박을 노리고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알기로 진혁은 벌써 한 달째 하루도 쉬지 않고 이곳을 찾고 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진혁이 화제를 돌렸다.

“몇 시까지 하십니까?”

“앞으로 두 시간은 더 해야 해요.”

“어휴, 대단하시네요.”

“대단은 무슨. 자주는 아니지만 여기서 번 돈으로 가족들이 둘러앉아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합니다.”

말하는 카심의 입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벌써 세 개나 먹었다. 카심이 구운 옥수수는 개당 5파운드로 저렴했다.

뒷주머니에서 반지갑을 꺼내 20파운드 지폐를 내밀자 카심이 두 손으로 정중히 받았다.

“뭘 또 그렇게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건데 당연히 소중히 다뤄야지요.”

거스름돈으로 건네는 1파운드 지폐 다섯 장 모두 빳빳한 상태였다.

새 돈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때가 묻고 닳았지만 반듯이 펴져 있었다. 카심이 돈을 얼마나 소중히 관리하는지 느껴졌다.

돈을 받아 반지갑에 넣으려던 진혁이 멈칫하다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에 곱게 넣었다. 반지갑이라 구겨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은 내일, 아니 오늘 사무실에서 보자며 인사를 하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온 진혁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오늘 시장에서 본 카심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가장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피곤을 잊고 적은 돈이라도 소중이 여기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전의 자신은 오히려 피 땀 흘려 모은 돈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져다 흥청망청 썼었다.

오늘따라 유독 희수가 더 보고 싶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빨리 성공해야 했다.

진혁의 손은 마법이 풀린 에메랄드 목걸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 * *

생각이 바뀌어서인지 아님 사적인 인연을 맺어서인지, 다음 날부터 카심과 함께 외근을 나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사적인 이야기는 민감한 부분이라 주로 회사와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단연코 성공담이었다.

진혁은 자신의 경험과 선배들로부터 들은 무역 거래의 성공 사례들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진혁의 놀라움이 커졌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카심이 크게 공감했다.

“카심이 무역 실무에 이렇게 밝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에서는 식당 똥개도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던데, 내가 여기서 근무한 지가 몇 년인데 그러십니까.”

“아무리 오래 해도 관심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지요.”

“딱히 관심이라기보다는, 어차피 하는 일인데 통역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주의 깊게 들은 것뿐입니다.”

카심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인지 전체적인 흐름을 잡지는 못하고 있는 듯했다.

대신 경험이 풍부했다.

거기에 현지인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함께 일 처리할 때 이런저런 업무 지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뒤로는 퇴근 후 시장을 돌고 들어갈 때 카심에게 들르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진혁이 지친 표정으로 카심의 노점으로 향했다.

여름이 시작되는지 갈수록 날이 더워졌다. 그에 비례해서 흘리는 땀도 많아졌다.

육체적인 피로도 피로지만, 두 달 가까이 돌아다녔는데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자 정신적으로 지쳐 가고 있었다.

피곤에 전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카심이 물부터 내놓았다.

“시원하게 한잔해요.”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힘드네요.”

“힘들 만도 하지.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을 해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게 맞는지 회의가 드네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에 카심도 마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카심은 요즘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진혁과 함께 다니며 무역 실무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사무실에서나 통역 때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을 알아 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렇게 밤에 열심히 일하고 나서 나누는 대화 시간도 즐거웠다.

그 시간이 끝나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때 카심의 머리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

“가끔 들러 간식으로 옥수수를 사 가는 종업원 놈이 있어요. 일하는 가게 매니저가 이번에 독립해서 새로 가게를 냈답디다. 그런데 바로 앞 건물이라 사장 기분이 완전 저기압이어서 일하기 힘들다고 투덜대더라고.”

“그 사람도 참. 사정은 있겠지만 그래도 바로 코앞에 가게를 내는 것은 상도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근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사장이 그 싸가지 없는 놈이 소개했던 거래선을 싹 다 바꾸는 중이라고 하던데.”

“그 가게가 어딥니까?”

진혁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에 카심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괜찮은 정보지요?”

“괜찮다마다요. 이건 특급 정보입니다, 특급!”

“그럼 소개료가 꽤 책정되겠는데…….”

카심이 말끝을 흐리며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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