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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7화 (7/307)

7화. 첫 오더

지사 생활을 오래한 터라 관행적으로 정보료가 오고 간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던 진혁이 동작을 멈췄다.

정보료를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진 다음의 이야기였다.

만약 중간에 일이 틀어져 오더가 취소되면 좋았던 관계마저 나빠졌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카심은 그 모습에서 진혁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공한 다음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말만 전하고 돈만 받아먹을 정도로 도둑놈은 아닙니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속마음을 들킨 진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심이 모른 척 물었다.

“내가 뭘 해 주면 됩니까? 돈 받으려면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되잖소.”

“맞습니다. 무조건 성공시켜야지요. 일단 바꿀 거래처가 취급했던 품목을 알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기존 납품 가격을 알면 더 좋습니다. 그래야 오더 낼 때 도움이 됩니다.”

“알았어요.”

적극적으로 나서는 카심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느라 막차를 놓쳐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희망이란 놈이 육체적인 피곤을 멀리 날려 버렸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저녁, 카심의 전화를 받았다.

진혁은 바로 노점으로 달려갔다.

짐짓 무관심한 척 회사에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피했지만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시장도 일부러 멀리 둘러보고 있었다.

카심이 날카롭게 생긴 청년을 소개했다.

“여긴 모하메드 상회의 파티. 이쪽은 내가 말한 미스터 서야.”

“태후물산의 서진혁입니다.”

“파티입니다. 지난번에 가게를 찾아왔었죠?”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진혁은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눴다.

그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워낙 넓어 이제 겨우 시장의 모든 가게를 한 번씩 돈 것뿐이니, 기억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파티가 간식을 사 온다고 잠깐 나온 것이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료는 가져왔습니다. 얼마나 줄 수 있습니까?”

“얼마를 원하십니까?”

“1%는 받아야겠소. 내가 정보를 넘긴 사실이 알려지면 쫓겨날 겁니다.”

“그건 최악의 상황이고, 그 금액을 주면 우리도 남는 게 없습니다.”

상대가 내민 조건을 단번에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진혁이 버팅기자 파티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이 일만 10년 차라 당신들 원가 구조는 빠삭합니다. 그리고 내가 마진이 괜찮은 것만 골라 왔는데 이럼 안 되죠.”

“저도 위에 보고하고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내 상사는 리베이트에 대해 빡빡하거든요.”

이후 이런저런 신경전이 이어졌다. 경험이 많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 듯 파티도 협상에 능숙했다.

진혁도 계산해 봐야겠지만 1% 정도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카심의 몫이 없었다.

갈수록 진혁이 밀리는 분위기라 옆에 있던 카심이 나섰다.

“거래가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미리부터 힘 빼면 안 돼지. 미스터 서, 커피 한잔하고 오셔.”

“알겠습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진혁이 두말없이 일어나며 슬쩍 손가락 한 개를 얼른 폈다 접었다.

카심과 사전에 이야기된 행동이었다.

상담이 교착에 빠지면 카심이 맡아서 하기로 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수료의 폭을 신호로 알린 거다.

조정된 금액만큼 카심이 갖기로 했다.

가까운 노천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자 한참 만에 카심이 찾아왔는데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날 놈입디다. 0.8% 이하면 차라리 안 하겠답니다.”

“그래서 갔습니까?”

“간다는 것을 겨우 붙잡아 놨습니다. 내 몫이 줄겠지만 어쩌겠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갑시다.”

진혁이 카심과 함께 다시 가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파티가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진혁은 거기서 희망을 봤다.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다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로 받아들이려던 애초의 마음을 누르고 다시 한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0.8%는 무리입니다.”

“됐습니다. 당신하고 더 이상 상담은 않겠습니다.”

“거래선을 바꾸는데 기존 가격을 고수할 수는 없잖습니까. 못해도 3%는 낮춰야 하는데, 거기에 리베이트까지 크면 어렵습니다.”

“그건 당신이 고민할 부분이고. 아저씨와의 인연을 생각해 낮춰 줬는데도 계속 이럴 거면 그만둡시다. 상사원이 당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카심이 혀를 내두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파티의 태도가 완강했다. 그만큼 파티 입장에서도 물러설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막 진혁이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카심이 끼어들었다.

“0.6%로 해.”

“에이. 안 된다니까요, 진짜.”

“빳빳한 달러로 준비하라고 할게.”

화를 내며 돌아서려던 파티가 주춤했다.

세계 어디건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후진국일수록 그 차가 컸다.

이집트는 20%였는데, 지금도 그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파티의 반응을 보고 카심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동안 얼굴 본 세월이 얼마인데, 이대로 가면 섭하지.”

“그래도…….”

“내가 서비스 많이 줄게. 이번만 좀 도와줘.”

배고픈 수습사원 시절, 비록 팔다 남은 거라지만 식은 옥수수를 챙겨 줬던 카심이었다.

그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파티도 더 이상 자신의 욕심만 부릴 수는 없었다. 결국 파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습니다. 0.6%, 달러로 합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저씨 얼굴 보고 양보한 겁니다. 나중에 아저씨께 서운하게 했다는 소리 들리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먼저 자료부터 봅시다.”

파티가 옆에 놓아둔 낡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네줬다. 대만의 중견 의류 업체인 진성물산과의 계약서였다.

진혁은 그 자리에 앉아 계약서를 검토했다. 총 열네 개 스타일에 60만 달러 규모였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원가를 계산했다.

평생 해 왔던 일인데 계산기를 꺼내 두드려야 한다면 이 일을 접는 게 나았다.

얼마 후 진혁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겨우 가격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 다행이네.”

혹시 거래가 불발될까 잔뜩 긴장했던 카심이 내쉬는 한숨 소리에 진혁은 속으로 미안했다.

진성물산의 단가는 괜찮았다.

보통 이런 거래의 마진은 10% 전후에서 결정 나는데, 14~16% 남은 가격이었다.

물론 그 속에 리베이트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괜찮았다. 가격을 3% 낮추고 리베이트로 1%를 줘도 평균은 됐다.

실적에 목매달고 있는 손민한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거다.

파티가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사장은 10시쯤 나오니까 11시쯤 찾아오면 될 겁니다. 가게에서는 절대 먼저 아는 척하면 안 됩니다.”

“그 정도는 압니다.”

“카탈로그 줘 봐요.”

진혁이 가방에서 의류 관련 카탈로그를 꺼내 주자 파티가 그중에 몇 개를 지적해 주며 말했다.

“이 스타일들이 비슷하니 가격을 내 와요. 물론 진성물산보다 3% 낮은 가격으로.”

“알겠습니다.”

“며칠 전 당신이 찾아와 카탈로그를 주고 갔고, 내가 그걸 보고 전화로 상담해서 부른 것으로 합시다. 사장한테는 내가 미리 언질을 해 놓겠습니다.”

몇 가지 더 주의 사항을 말하고 파티가 서둘러 돌아갔다.

둘만 남자 진혁과 카심이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목표에 한 발 더 다가갔다.

* * *

다음 날, 11시 정각에 회색 양복을 갖춰 입은 진혁이 모하메드 상회에 들어섰다.

3층 건물에 1, 2층은 매장이고 3층이 사무실이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제품의 질도 좋았다. 서민보다는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여성들을 상대하는 가게였다.

진혁이 지나가던 여직원에게 물었다.

“파티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상담 전화를 받고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여직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자 파티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그는 진혁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모른 척 둘러보다가 다가왔다.

“태후물산에서 왔습니까?”

“전화로 상담했던 서진혁입니다.”

모른 척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건넸다.

“따라오시오.”

계단을 오르며 파티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어제 내가 말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사장이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마무리를 잘하세요.”

“알겠습니다.”

진혁도 앞만 보며 답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3층의 사장실 앞에 섰다.

파티가 노크를 하는 모습에 진혁은 옷차림을 다시 한번 점검하면서 심호흡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부리부리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모하메드네.”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의 서진혁입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지.”

자리에 앉자 모하메드가 테이블 옆에 카탈로그를 가져다 놓고 표시된 곳들을 펼쳐 가며 물었다.

“이 스타일을 상담한 가격에 맞출 수 있겠나?”

“추가적인 네고만 없다면 가능합니다. 어렵게 맞췄습니다.”

“저가 원단을 쓰는 건 아니고?”

“태후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거래입니다.”

허리를 세우고 자신 있게 말하는 진혁의 모습에 모하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 그룹이라면 나도 잘 알지. 한국에서 꽤 큰 회사지요?”

“글로벌 기업입니다.”

“그런 큰 회사가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우리 회사는 고객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둘 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배신한 전 매니저를 염두에 두고 한 말들이었다.

“전에 우리 가게에도 들렀었다고?”

“여기뿐만 아니라 시장의 모든 가게를 돌았습니다.”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아. 직접 발로 뛰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지. 요즘 젊은 것들은 한 방을 좋아하며 이런저런 꼼수를 부리는데, 그러다 한 번에 훅 갈 수도 있어.”

파티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진혁은 모하메드가 어쩌면 뒷거래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하메드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왔다.

“이번 거래를 잘 마무리 지어 봐. 그럼 내가 자네를 내 주 거래선으로 삼아 주지.”

“감사합니다. 반드시 만족스러운 거래가 되게 하겠습니다.”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모하메드가 같이 일어난 파티에게 지시했다.

“이야기한 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와 옆에 마련된 회의실로 들어가자 파티가 한숨을 내쉬었다.

“노친네. 눈치챈 줄 알았네.”

“여러 가지로 예민해져 있을 테니까요.”

“스타일 하나가 추가되어 65만 달러 오더가 됐습니다.”

파티가 서류를 내밀었는데, 어제 봤던 내용에 한 스타일이 추가되어 있었다.

가격은 이미 결정된 터라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시 사장실로 가서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나오자 파티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고생했습니다, 미스터 서.”

“고맙습니다. 모두가 파티 씨 덕분입니다.”

“약속은 잊지 마시오.”

리베이트 이야기였다.

“걱정 마십시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이 미스터 서를 잘 본 것 같습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될 겁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진혁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희수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딴 오더였다.

이 기쁨은 상사원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동이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희수를 위한 여정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게 기뻤다.

진혁은 흥분된 마음을 안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심은 김동식 과장을 따라 나가고 없었다. 최영재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손민한은 자리에 있었다.

바로 지사장실로 가려던 진혁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아무리 급해도 보고서는 만들어 가야 했다.

얼마 후, 진혁은 지사장실에서 손민한과 마주 앉았다.

이렇게 독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영업 회의 때 보고드린 모하메드 상회와 정식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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