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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8화 (8/307)

8화. 카심 (1)

반색한 손민한이 서류를 검토했다.

“총액 65만 달러에 평균 마진이 10%면 첫 실적치고는 나쁘지 않군.”

“감사합니다. 카심 씨의 도움이 컸습니다.”

“카심이?”

진혁은 모하메드 상회의 매니저가 딴살림을 차려 거래처를 바꾸는 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과정을 밝혔다.

물론 카심이 노점을 한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개인의 사생활이었다.

숨길 일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현지 직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을 개선했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다.

“카심이 큰일을 했군.”

“같이 다니면서 느낀 건데 의외로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알겠어. 그 부분은 내가 따로 고려해 보지. 그런데 리베이트가 1%네?”

예상한 질문이기에 진혁이 준비해 간 답변을 했다.

“중개인의 요구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추가 오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중개인의 요구라면 어쩔 수 없지. 이곳저곳 돈 받아 처먹지 않는 놈이 없군.”

이집트 사회의 부패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손민한이었다.

덕분에 리베이트 문제가 쉽게 풀렸다.

어느 정도 업무 이야기가 끝나자 손민한이 편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밤마다 시장을 돈다더니 헛짓만은 아니었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열심히 하니까 따라오는 거야. 이번 오더는 자부심을 가져도 돼.”

“감사합니다.”

“이런 바닥 오더가 진짜 오더인데, 무조건 총 금액으로만 평가하니 다들 정책 오더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지. 쯧쯧.”

손민한이 혀를 차며 회사 평가 제도의 문제점을 성토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상사원의 위세는 대단했다.

한국의 상사맨들은 전 세계를 발로 뛰며 열사의 사막에서 난로를,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냉장고까지 팔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IMF 사태가 많은 것을 바꿔 버렸다.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각 계열사들은 더 이상 종합 상사에 대행료를 주면서 수출하기를 꺼려했다. 그 대신 자가 수출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상사원들도 변해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정책 오더였다.

정관계 인맥과 리베이트를 이용해 정책적인 오더를 받아내는 것이다.

금액이 크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상황에 따른 변수가 컸다. 게다가 음성적인 리베이트로 인해 실제 계약된 것과는 달리 역마진으로 손실을 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현장에서는 평가 제도 개선을 누차 요구했지만, 내실보다는 외형을 중시하는 한국의 분위기 때문에 무시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진혁 역시 손민한의 말에 동조하는 것도 모자라 더 열변을 토하며 광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세파만큼 인내심이 축적됐다. 떠든다고 바뀔 것이 아니니, 거기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더 생산적이었다.

손민한이 결재판을 돌려주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그동안 너를 믿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들도 있었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이렇게만 가자. 그럼 좋은 일이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이대로 결재를 올려.”

“알겠습니다.”

“첫 오더니만큼 끝까지 신경 써서 잘 마무리하도록 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생했어.”

인사를 하고 지사장실을 나온 진혁의 입이 찢어졌다. 손민한으로부터 처음으로 속내를 들었고 칭찬도 받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근에서 돌아온 최영재가 지사장실로 들어갔다가 오더니 벌게진 얼굴로 나와 물었다.

“한 건 했다며?”

“말씀드렸던 모하메드 상회 건…….”

“됐어. 절차 다 무시하고 지사장에게 달려가 생색내 놓고는.”

“자리에 안 계셔서……. 아무튼 죄송합니다.”

진혁은 사과부터 했다. 어쨌든 회사 선배였다.

하지만 최영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가 버렸다. 당연히 사무실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얼마 후 김동식이 돌아왔다. 진혁이 얼른 일어나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어.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진혁은 오늘의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말했다.

“최 대리님에게 먼저 말씀드리고 지사장님께 보고드렸어야 하는데 성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한 거 없네. 그러니까 죄송할 것도 없어.”

“과장님!”

반발하고 나서는 최영재를 노려보며 김동식이 말했다.

“너는 나한테 보고하고 지사장실에 들어갔냐?”

“저랑 쟤랑은 다르지요. 어떻게 저런 햇병아리랑…….”

“내가 보기에는 너도 마찬가지야, 인마. 후배가 첫 오더를 땄으면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초를 치면 안 되지.”

“에이씨.”

화를 참지 못한 최영재가 성질을 내며 일어나 나가는 모습에, 김동식이 뒤통수에 대고 버럭 화를 냈다.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의 새끼. 너부터 나한테 잘하고 그런 소리를 해, 자식아!”

“그만하십시오.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진혁이 쫓아 나가려는 김동식을 겨우 말려 자리에 앉혔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지만 말고. 넌 저런 것은 배우지 마라.”

“알았으니 화 푸세요.”

“그래. 네가 너 보고 참는다. 아무튼 축하한다.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감사합니다.”

“축하주는 이따 숙소에서 하기로 하고, 난 지사장실에 들어갔다 오마.”

어깨를 두드려 준 김동식이 지사장실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다.

“저 양반이 어쩐 일이지?”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오늘 회식하자네. 그것도 바자르에서.”

바자르는 타흐릴 광장 근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당연히 가격도 비쌌다. 저렴한 한국 식당에서 회식했던 것과는 달랐다.

“여섯 명으로 예약해.”

“누가 더 온답니까?”

“카심과 소마야도 참석하라신다.”

“이번 오더는 카심의 도움이 컸습니다.”

진혁의 말을 들은 김동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군. 봉투도 준비하라고 하시더라.”

“좋은 일이네요. 예약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손민한이 자신의 생각대로 현지 직원을 배려하는 결정을 내리자 진혁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예약을 마치고 소마야에게 알리자 예상대로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러나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청소하고 있던 카심이 회식 이야기를 듣고 보인 반응은 달랐다.

“장사해야 하는데 귀찮게 왜 나까지 참석하라고 합니까?”

“첫 회식인데 오늘 같은 날은 하루 쉬세요.”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마인데.”

“이번에 큰돈 들어오잖습니까.”

카심의 주급은 25달러였다. 이번 모하메드 상회와의 거래로 그가 받을 금액이 2,600달러니 1년치 연봉의 두 배였다.

그런데 진혁의 말을 듣고 카심의 얼굴이 당장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깟 눈먼 돈보다 내 손으로 번 1파운드가 더 소중하고 떳떳합니다. 날 그런 속물로 봤다면 다음부터는 미스터 서와 대화하지 않겠소.”

카심의 강경한 태도에 진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 인생에서 돈만 쫓다가 후회스러운 삶을 살아 놓고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카심의 생각이 맞았다. 돈도 중요했지만 어떻게 벌었는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었다.

바로 허리를 굽혀 정중히 사과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소. 이번만 참석할 테니 올라가 보시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올라가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카심의 표정은 풀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근무한 한국 직원들은 현지인들을 무시했다. 자신들이 잘못해놓고도 거꾸로 화를 내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진혁은 달랐다.

그의 사과는 군더더기가 없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퇴근 후 바자르 레스토랑에서 열린 회식은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비싼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같이 고생한 동료들이 모두 참석했다는 게 더 의미가 있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진혁의 오더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최영재는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놓고 투덜대지는 못하고 괜히 음식 타박만 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김동식이 나섰다.

“지사장님, 한 말씀 하시지요.”

“좋은 자리니까 짧게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 이번에 오더를 딴 서진혁 씨뿐만 아니라 직원들, 물론 거기에는 카심 씨와 소마야 씨도 포함됩니다. 앞으로도 서로 합심해서 카이로 지사가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카이로 지사, 파이팅!”

기분에 취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던 진혁은 아무도 동조하지 않자 무안함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 모습을 손민한이 웃는 얼굴로 보고 말을 이었다.

“성과에는 보상이 따라야지요. 카심 씨, 약소하나마 받아 주십시오.”

“뭘 이런 것까지.”

말과는 달리 카심은 김동식이 대신 들고 있던 봉투를 얼른 받아 챙겼다.

그 모습에 소마야가 입을 열었다.

“제 친척 중에 한 분도 사업을 하시는데, 소개해 드리면 저도 봉투를 받을 수 있나요?”

“당연히 줘야죠. 소개만 시켜 주십시오. 제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변한 손민한이 다시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진혁이 급히 물었다.

“지사장님, 저는 없습니까?”

“없어.”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받고 싶다면 줄 수 있어. 대신 연말 인사 고과는 기대하지 마.”

“에이, 무슨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십니까? 내년에는 꼭 서 대리로 불리게 해 주십시오.”

“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

진혁의 재치 있는 임기응변에 폭소가 터졌다.

그 자리를 계기로 진혁은 카이로 지사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회식이 끝나고 다들 헤어졌다.

그런데 기어코 2차를 가자는 김동식에 붙잡혀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한 진혁은, 억지로 그를 떼어 놓고 얼른 전철을 탔다.

카릴리 시장 입구에 가자 변함없이 카심이 옥수수를 굽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구워진 옥수수를 하나 들고 베어 무는 진혁의 모습에 카심이 피식 웃었다.

“아까 그렇게 먹고 더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요. 사 먹는 음식이라 금방 꺼지네요.”

“이것도 돈 주고 사 먹는 겁니다.”

“정성이 담겨 있잖습니까, 정성.”

진혁의 말도 안 되는 언변에 카심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르면서도 입 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옥수수 하나를 다 먹은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영업하러 가 보겠습니다.”

“김 과장에게 시달려서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지 그래요.”

“성과급 받아 챙긴 분도 더 벌려고 이렇게 나와 있는데, 빈손인 제가 쉴 수는 없죠. 그럼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뒤돌아 가는 진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카심이 갑자기 소리쳤다.

“돈 내고 가야지, 돈!”

“외상입니다, 외상!”

진혁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들어 보이더니 멀어져 갔다.

진혁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늦은 밤이라 한가했다.

홀로 노점을 지키고 있던 카심이 차가운 물을 내놓았다.

“카! 역시 땀 흘리고 먹는 시원한 물이 최고입니다.”

“오늘은 좀 어땠소?”

“매일 좋은 일만 있으면 금방 떼 부자 되게요.”

너스레를 떨던 진혁이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해 보쇼.”

“화 안 낸다고 먼저 약속부터 해 주십시오.”

“뭔 말을 하려는데 이렇게 사설이 깁니까?”

“약속부터 하시라니까요.”

“알았수다. 약속하죠.”

확답을 받은 진혁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 있잖습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당장 카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받은 터라 진혁은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돈은 금액이 아니라 가치로 따져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진심입니다.”

“계속 해 보쇼.”

“하지만 돈의 가치는 쓰는 사람이 정하기도 합니다. 한국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거나 ‘돈은 더럽게 벌어도 깨끗이 쓰면 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보고 이걸 접고 그 돈을 쫓으라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돈도 포기하시지 말라는 말입니다.”

카심이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난 관심 없으니까 그만하시오.”

“대가 없는 돈이라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잖소. 우연히 미스터 서의 일에 편승에서 받은 돈인데, 그걸 계속 바라면 안 되지. 그렇게 허황된 꿈을 좇다가 망가진 이들을 많이 봤소. 괜히 바람 넣지 마시오.”

“가치 있는 돈으로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허황되지 않게 내실을 다지면 되고요. 능력이 없다면 모르지만, 가진 능력을 썩히는 것은 죄악입니다.”

거듭된 진혁의 자극적인 말에 카심이 잠시 노려보다가 물었다.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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