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카심 (2)
“좀 더 적극적으로 무역 일을 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간은 단편적인 일만 했는데, 모하메드 상회의 오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 봤으면 합니다. 그럼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
“근무 시간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퇴근 후에는 이 일을 계속하시고요. 저도 시장을 도는 것은 계속할 겁니다. 부족한 것은 이렇게 만나서 채우면 됩니다.”
진혁의 열정을 느꼈는지 카심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하지만 확인할 부분이 있었다.
“좋소. 그런데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요? 계속 정보를 달라는 거요?”
“그 부분에 대한 생각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와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같이 일하잖소?”
“엄밀히 따지면 태후물산의 일을 함께하는 것뿐이지, 같이 하는 일은 아니지요.”
“설마……!”
카심은 태후물산에 근무한 경력이 적지 않았다. 그동안 거쳐 간 지사원은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들었다.
그중 몇몇은 욕심을 부려서 좋은 직장에 사표를 쓰고 나가 오퍼상을 차렸다가 패가망신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혁이 그 길을 가려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젯다 지사에서 진급에 누락돼 이곳으로 밀려나자 부서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나 놓고 보니 잘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카심을 만났고, 이집트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그 꿈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내게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태후물산은 상사원들의 근무지를 3년마다 이동시킵니다. 최영재 대리 같은 예외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면 그냥 가야 합니까? 카심 씨는요? 모하메드 상회는요? 앞으로 인연을 맺을 사람들은요?”
“……!”
“제가 욕심이 많습니다. 저와 인연을 맺는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습니다. 제가 못 하면 그 일을 카심 씨가 대신해 주셨으면 합니다. 발령 나서 가게 되면 어떤 놈이 올지도 모르는데, 나를 믿고 거래를 터 준 분들을 무책임하게 떠넘기고 갈 수는 없잖습니까.”
한번 맡으면 끝까지 책임진다. 진혁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카심이 결국 승낙했다.
“알겠소. 당신의 그 생각이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랑 같이 공부하시는 겁니다.”
“참나, 내가 이 나이 먹어서 공부해야 한다니.”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도 모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나 많이 하시고. 얼른 들어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아차 하면 막차가 끊긴다.
인사를 하고 진혁이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달렸다.
* *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진혁은 서점에 들려 무역 실무 관련 책을 몇 권 사 왔다.
한가한 오후에 회의실에서 카심과 마주 앉았다.
“경험하셨듯이 계약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모하메드 상회와의 거래는 신용장거래 방식이고 지급 조건은 3개월 유산스입니다. 그건 여기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진혁은 책과 계약서를 펼쳐 놓고 설명했다.
한참을 설명하던 진혁이 이번에는 다른 서류철을 꺼내 펼쳤다.
“지금까지는 이곳에서 처리할 일들에 대해 설명한 것이고, 이제는 한국에서 할 일입니다.”
“한국의 일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물건은 한국의 태후패션에서 만듭니다.”
“그러니까 그건 태후패션에서 알아서 할 일이잖습니까?”
카심의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빠개지려고 하는데.
“맞습니다. 하지만 모하메드 씨는 나를 믿고 오더를 주신 겁니다. 카심 씨가 저를 믿고 일을 맡겼는데 제가 남에게 그 일을 떠넘기고 이익만 챙긴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좋지는 않겠지요.”
“그럼 다음 거래는 없습니다. 아니, 그 전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책임 소재를 따져서 손실분에 대해 담당자는 유무형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정확한 작업 지시서와 함께 일정도 체크해야 합니다.”
진혁은 따끔한 어조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명을 했다.
물론 카심이 오늘 당장 전부를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줄 수는 없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지만 특히나 무역은 치열한 생존 경쟁의 세계였다.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보이면 잡아먹히고 만다.
그래서 기본이 중요했다.
기본이 튼튼하면 난관에 봉착해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카심과 함께 회의실을 나온 진혁은 한국에 보낼 작업 지시서를 작성했다.
* * *
다음 날, 조금 일찍 출근한 진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졸음이 잔뜩 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무역 1팀 오희준입니다.
“지금 잠이 오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바짝 군기 잡힌 목소리로 변했다.
“업무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어디십니까?
“여기 카이로 지사야.”
-야이……. 서진혁!
“크크크, 잘 지내지?”
-어제 늦게까지 바이어 접대가 있었어. 지금 아주 죽을 맛이다. 넌 어때?
한국은 지금 오후 2시 반이니 잠이 올 만도 했다.
이후 시답잖은 농담을 이어가다 진혁이 말했다.
“내가 보낸 작업 지시서가 팩스로 들어갔을 거야.”
-무슨 작업 지시서?
“일단 봐.”
-잠깐 기다려.
얼마 후 희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너 한 건 했구나. 근데 이건 패션으로 바로 보내면 되지 않아?
“첫 오더야. 무조건 잘돼야 해. 네가 신경 좀 써 주라.”
-알았어. 팩스 보내고 한 선배에게도 따로 부탁해 놓을게.
오희준은 성격이 좋아 인간관계가 폭 넓었다.
그의 친한 대학 선배가 패션에 근무하고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었다.
“고맙다. 그리고 중동 쪽으로 괜찮은 아이템 있으면 샘플도 함께 보내 달라고 해 줘.”
-맨입으로?
“나중에 한국 가면 술 살게.”
-술만?
“이 자식이 아주 발가벗기려고 드네.”
-싫음 말구.
“끙, 2차까지 책임질게.”
-콜!
“대신 잘못되면 죽을 줄 알아.”
-걱정 마, 인마. 한국은 내가 꽉 잡고 있으니 넌 이집트 일이나 신경 써.
“고맙다. 또 통화하자.”
최영재가 들어오는 모습에 진혁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날 이후로 최영재는 업무 지시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꽁생원 같은 놈.
* * *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카심의 무역 실무 교육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에 진혁이 각 단계마다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경험하게 했다.
한국에서도 오희준이 자신의 일처럼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어서 걱정은 없었다.
항공 화물로 받은 샘플에 모하메드도 만족했다.
그동안 시장을 돌며 팸플릿과 명함을 나눠 준 게 효과가 있었는지 상담전화도 몇 통 받았다.
하지만 가격이 맞지 않았다.
서민들의 지갑이 얇으니 철저한 가격 우선이고 품질은 뒷전이었다. 그 바람에 중국산 저가 제품이 시장을 잠식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진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디든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를 준비하면서 차근차근 바닥을 다져 갔다.
* * *
관광지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왕조의 수도로 이집트 제2의 도시다.
진혁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것은 전날 저녁.
호텔에서 하루 묵고 바로 항구로 달려갔다.
관광을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
마침내 모하메드 상회의 물건이 도착하는 날이었다.
화물선에서 내리는 컨테이너를 바라보는 진혁의 마음은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이룬 첫 성과물이었다.
“여기까지 나오시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웃는 얼굴의 파티가 옆으로 다가왔다.
맞는 이야기였다. 신용장거래라 한국에서 무사히 선적하는 것으로 진혁의 역할은 끝났다.
비록 3개월짜리 어음이지만 대금도 받은 후였다.
“모하메드 씨가 저를 믿고 맡긴 일인데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요. 물론 파티 씨의 도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미스터 서의 이런 진솔한 태도가 마음에 듭니다. 사장님께도 좋은 거래처를 섭외했다며 칭찬을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결정은 사장님이 하시겠지만, 이렇게만 하신다면 좋은 일이 이어질 겁니다. 하하하하하.”
파티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리베이트를 챙긴 데다 사장에게 칭찬까지 들었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꼼꼼하게 검수까지 해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카이로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진혁은 쉬지 않고 바로 모하메드 상회를 찾아갔다.
“이상 없다는 보고는 받았네. 피곤할 텐데 좀 쉬지 않고.”
“시장에 오면 저절로 활력이 생깁니다. 손님을 위해 늦게까지 열심히 사시는 상인들을 보면 피곤이 달아납니다.”
“훌륭한 자세군. 우리를 이해하고 동화하는 게 중요하지.”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는 진혁을 보고 모하메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이렇게 급히 찾아온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좋은 물건을 확보해서 괜찮을 것 같지만, 손님의 취향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니 일단 반응을 지켜보고 추가 오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도 바로 추가오더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마음에 드실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진혁이 컨테이너에 함께 실려 온 가방을 내놓았다. 원피스부터 바지와 치마는 물론 속옷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모하메드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뭔가?”
“본사에 부탁해서 그간 중동 지역에서 인기가 있었던 제품들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상품 구상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제품들을 꼼꼼히 훑어보던 모하메드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시즌에 내놓으려고 생각하고 있던 제품들과 비슷한 스타일이 여럿 보였다.
모하메드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미스터 서가 이 일을 한 게 3년인 게 맞나?”
“정확히는 4년째입니다.”
“10년이라고 해도 믿겠네. 적기에 오퍼를 낸 것도 그렇고, 거래가 종료되기도 전에 다음 오더를 준비하는 모습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상사원보다 능숙해.”
“첫 거래를 해 주신 데에 대한 고마움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아무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예의 바르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고소를 지었다.
지금 과거로 와서 그렇지, 모하메드가 예상한 것의 세 배나 되는 30년간 무역업을 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상사원에게 신규 바이어를 개척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초짜 시절 진혁도 그 기분에 취해 기존 바이어를 소홀히 했다가 거래가 끊긴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한번 잡은 바이어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 단물까지 쪽쪽 빼먹는 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얼마간 대화를 더 나눈 진혁은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모하메드의 인사를 받고 나왔다.
오늘은 카심의 노점에 들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피곤이 몰려와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미스터 서! 미스터 서!”
카심이 귀신같이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발걸음을 돌려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좋은 정보를 알아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