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0화 (10/307)

10화.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흥분한 카심에 비해 진혁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리베이트를 받은 후로 당연하게 카심의 태도가 적극적이었다. 돈을 직접 만져 보니 그도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보가 실속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오늘 두 놈이 옥수수를 먹으러 와서 투덜대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번에 납품받은 중국 제품에 문제가 있다더군. 그런데 그쪽에서 배 째라고 하나 봐.”

“중국 놈들이야 항상 그렇죠. 클레임 처리하고 대금을 미지급하는 선에서 끝내야 할 겁니다. 그놈들에게 돈을 받아내기는 힘들어요. 난감은 하겠지만 그 정도면 큰 손해는 아닐 겁니다.”

“그렇기는 한데 문제가 복잡한가 봐. 가격을 낮추려고 다른 가게 것까지 모아서 한곳에 모두 맡겼나 보더라고. 그쪽에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려는 모양이야.”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호기심이 생겼다.

“품목이 뭡니까?”

“남성용 양복이라고 하던데.”

“음.”

진혁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양복이라면 단가가 셌다. 그렇다면 중국 제품과 가격 차가 더 커진다는 의미였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진혁의 반응을 읽은 카심의 표정도 시무룩하게 변했다.

“역시 힘들겠지?”

“아무래도.”

“빌어먹을. 무역이라는 게 알면 알수록 더 어렵네.”

카심이 놓아두었던 책을 들었다.

진혁이 사다 준 무역 실무 책이었는데, 군데군데 해지고 까맣게 때가 묻은 게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이대로 차 버리면 카심의 실망이 클 거다.

“가게가 어디랍니까?”

“가 보게?”

“가서 이야기나 들어 보죠.”

다시 신이 난 표정으로 카심이 상호는 물론 위치까지 자세히 알려 줬다.

경험이 있어 이제는 미리 파악해 둔 것이다.

얼마 후 진혁은 ‘Kazaz’라고 쓰인 허름한 간판 앞에 섰다.

남성복 전문 매장답게 양복과 와이셔츠는 물론 신사화도 보였다.

제품의 질이 떨어지고 조잡한 게, 주 고객층이 서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손님은 별로 없고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진혁이 건넨 명함을 본 남자 종업원이 손부터 저었다.

“지금은 상담할 분위기가 아니니 나중에 오시오.”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도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요. 후회하실 겁니다.”

진혁이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무조건 고개를 숙인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뒤돌아 세 걸음도 떼지 않았을 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종업원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40대 중반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남자 종업원을 쳐다봤다.

“누구신가?”

“사장님을 찾아오신 상사원이랍니다.”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 그게…….”

“제가 억지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진혁이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 명함부터 내밀었다.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의 서진혁입니다.”

“가리라고 하오. 태후물산이면 한국 유명한 기업으로 아는데, 괜한 걸음을 했습니다. 우리와는 단가가 안 맞을 겁니다.”

“그럼 차나 한잔 마시고 일어나겠습니다. 설마 그것도 안 됩니까?”

“……차를 내오고 나가 봐라.”

진혁의 넉살에 잠시 쳐다보던 가리가 어쩔 수없이 소파로 걸어 나왔다.

“곤란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앉으려던 가리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시장에 이미 소문이 다 퍼졌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옆에 있는 비닐 봉투에서 물건을 꺼내 놓았다.

“물건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계약금까지 떼먹으려고 하다니…….”

“중국 제품이 다 그렇죠, 뭐.”

진혁이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원단을 아끼려고 시접을 짧게 잡은 데다 마감도 허술해서 작은 힘에도 봉제선이 터졌다.

안의 내피가 누렇게 바랜 것만 봐도 중고 원단을 사용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도 중국과 사업을 해 봤습니다만, 신뢰가 많이 부족한 곳입니다.”

나온 차를 마시면서 진혁이 중국에서 사업할 때 힘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같은 문제로 당장 곤란에 빠진 가리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차를 다 마신 다음 진혁이 일어나려고 하자 가리가 급히 잡았다.

“이렇게 그냥 가시는 거요?”

“도와드리고 싶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단가 차이가 워낙 나니까요.”

“단가도 단가지만 당장 앞으로 장사가 문제요. 욕심이 나서 한곳에 모두 몰아 줬거든. 게다가 다른 가게까지 피해를 입히게 생겼소. 도와주시오.”

가리가 솔직하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이 장사를 못 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다른 가게 사장들까지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오랜 기간 같이 장사를 했기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안끼리도 친분이 있을 정도였다.

이집트의 여름은 길었고, 아직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지금 재고로는 겨우 두 달도 버티기 힘들었다.

남은 기간을 손만 빨며 보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사이 단골들도 다 빠져나간다.

진혁이 다시 앉았다.

“일단 계약서부터 보여 주십시오. 그래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가리가 책상으로 가 서류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계약서는 물론 원단을 재단할 때 쓰는 패턴까지 꼼꼼하게 철해져 있었다.

오더 내역을 확인했는데, 여러 업체 것을 모아서인지 전체 규모가 100만 달러가 넘었다. 적지 않았다.

역시나 단가에 문제가 있었다.

중국이 아무리 저가라고는 하지만 최근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한국 제품에 비해 60%가 적정 수준인데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제품이 이 지경이 될 수밖에.

“욕심이 지나치셨습니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무슨 방법이 없겠소?”

“말씀드린 대로 단가 차이가 워낙……. 윽!”

진혁이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가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소?”

“아닙니다.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던 진혁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그중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두통도 잊고 입을 열려던 진혁이 멈칫했다. 이쪽의 패를 먼저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애써 흥분된 마음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와서요.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꼭 좀 알아봐 주십시오.”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한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찾아낼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하하하하, 무슨 농담을 진담처럼 하시오? 그래도 속은 시원하군요.”

가리의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펴졌다.

진혁은 필요한 부분을 복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가리가 문 앞까지 나와 꼭 연락 달라며 신신 당부했다.

노점에 들러 카심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전하고 사무실로 바로 갔다.

이 시간이면 한국에서는 한창 업무에 매달리고 있을 때였다.

-국내영업 3과장 한지철입니다.

“카이로 지사의 서진혁입니다, 과장님.”

-누구라고?

“오희준이 친구입니다. 일전에 수출 건으로 도움을 받았던, 이집트에 와 있는 서진혁입니다.”

-아! 서진혁 씨.

태후패션 한지철 과장의 연락처는 오희준에게 부탁해서 알아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나중에 고기.

그것도 1등급 한우로 사 준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에야 겨우 알려 줬다.

치사한 놈.

-제품에 문제가 있나?

“아닙니다. 바이어가 대단히 흡족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힘든 곳에서 고생하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런 인사는 안 해도 돼. 다른 할 말 없으면 그만 끊어.

공과 사는 확실하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진혁이 얼른 말했다.

“또 부탁드릴 일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말해 봐.

“남성 양복의 재고 현황을 알고 싶습니다.”

진혁은 짧게 가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알려 줬다.

그의 과거 기억 속에 타 기업 상사원이 아프리카 후진국에 재고품을 가져다 팔아 대박을 터트려 유명해진 일화가 있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가리 사장이 현재 처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 그 방법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격과 시간 모두를 맞출 방법은 재고밖에 없습니다.”

-신상을 파는 가게일 텐데 재고 가지고 되겠어?

“사정이 다급하니 메이드 인 코리아의 힘으로 밀어붙여 봐야지요.”

-그런 각오라면 안 도와줄 수가 없지. 파악해서 메일로 보내 줄게.

“이쪽 상황이 좀 급합니다.”

-알았어. 퇴근 전까지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그 말은 거래부터 성사시키고 해. 끊어.

진짜로 끊었다. 다시 한번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진혁은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포기했다.

자료 수집이 우선이었다.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자료부터 찾았다.

의류는 3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친다.

백화점과 대리점인 1차 시장을 거치고, 남은 물건은 이월 상품이란 명분을 달고 50% 할인된 아웃렛과 오픈 마켓을 통해 처리된다. 그게 2차 시장이다.

그 과정 중에 단계별로 할인 폭이 커지는데, 마지막까지 가면 90%까지 떨어진다.

남은 물건은 태그를 제거하고 땡 처리 하거나 제3국으로 수출된다.

사회 복지 단체에 기부하기도 하는데 그 양은 많지 않았다. 저가에 유통되기라도 하면 브랜드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태후패션은 물론 한국 내 의류 회사의 재고품들을 검색하다 보니 어느새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얼른 컴퓨터를 끄고 일어난 진혁이 사무실 청소부터 했다.

늦게 잤는지 마지막에 출근한 김동식이 진혁이 건넨 커피를 받으며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너 어제 안 들어왔더라.”

“자료 조사할 게 있어서 사무실에서 잤습니다.”

“웃기고 있네. 그런 놈의 얼굴이 그렇게 활짝 펴 있냐. 나만 알고 있을게. 어디 좋은 데 갔지?”

“아닙니다.”

“자식이. 나도 요즘 외로워서 그래. 혼자만 즐기지 말고 같이 가자. 응, 으응?”

“김 과장, 들어와.”

지사장이 아니었으면 꽤나 시달렸을 것이다.

유부남이……. 쯧.

진혁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렸지만 집중하지 못했다. 수시로 메일함을 열어 봤다.

그러기를 한 시간여.

마침내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한지철 과장이 보낸 메일이었다.

첨부 파일을 열자 엑셀에 재고 현황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스냅 사진도 함께 붙어 있어 제품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화기를 들었던 진혁이 다시 내려놓았다. 한지철의 성격상 전화하면 화만 낼 것이 틀림없었다.

-자료 잘 받았습니다. 꼭 좋은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대신 깔끔하게 두 문장짜리 답 메일로 처리했다.

진혁은 자료를 출력한 후 카라즈에서 복사해 온 자료와 비교해 가며 꼼꼼히 검토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PPT로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료만 달랑 들고 가서 입으로 떠드는 것은 하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상대방에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적당한 포장도 필요했다.

대기업의 제품이라 오픈 마켓에서 제품 코드를 넣자, 피팅 모델이 입고 찍은 사진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오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