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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1화 (11/307)

11화. 재고도 재고 나름

점심도 노점에서, 한국에서는 케밥이라 불리는 샤위르마로 해결했다.

제안서가 완성됐을 때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제안서를 컬러로 프린터해서 가방에 넣었다.

“같이 퇴근합시다.”

진혁은 카심과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바로 장사하러 가시지요?”

“당연하죠.”

“저랑 한 군데 들렀다가 갑시다.”

“그럼 늦는데…….”

리베이트를 받아 돈이 생겼는데도 한결같이 장사를 먼저 생각하는 카심의 변함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이 지하철을 탔다.

“무역 실무도 결국 오더가 있어야 필요한 겁니다. 오더를 얻기 위해서는 상담이 선행되어야 하고요.”

“그래야겠지요.”

“오늘은 그 상담을 하러 가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인상부터 푸세요.”

굳었던 카심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혁이 같이하자고 했지만 솔직히 반만 믿었다.

자신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것도, 바이어를 만나는 중요한 일은 진혁이 하면서 잡무를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심으로 자신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타바 역에서 내려 카릴리 시장으로 들어갔다.

카라즈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도 종업원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가게가 망하게 생겼는데 의욕이 날 리가 없었다.

진혁과 카심은 마침 안면이 있는 종업원을 만나서 바로 사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이렇게 빨리 다시 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요.”

“그건 흉이 아닙니다. 상사원이 가져야 할 덕목이지요.”

“이쪽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카심 씨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하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

상황이 다급한 가리가 먼저 입을 떼었다.

“그래서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역시 가격이 문제입니다.”

“그건 어느 정도 조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문제는 제때 물건을 가져올 수 있냐는 겁니다.”

일부러 슬쩍 빼 봤는데 예상대로 가리가 급히 물었다.

“제품을 다시 만들어서는 불가능합니다. 비슷하게 제작된 기성 제품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상은 올해가 아직 가지도 않아서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가격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답이 없다는 말이군요.”

가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한국 제품의 가격을 알기에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씁쓸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월 상품이라면 가격은 비슷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 가게에서 재고품을 걸 수는 없습니다.”

가리의 표정이 완강했다.

신상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 사장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아집이었다.

그들은 재고품을 취급하는 가게와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물상이라고 폄하하기까지 했다.

진혁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비록 이월 상품이지만 지금도 버젓이 팔리고 있는 한국 제품입니다. 저급하고 조잡한 중국산이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 오리지널 정품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 태후가 직접 만든, 품질을 보증하는 제품입니다. 이 정도면 손님들이 비록 이월 상품이라고 해도 중국산보다는 더 좋아할 겁니다.”

한때 이집트에서는 한국의 가전제품이 최고 인기였다.

지금은 중국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건 어려운 가정살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때의 향수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결국 가리가 물러섰다.

“일단 제품하고 가격부터 봅시다.”

“준비해 왔습니다.”

가리가 제안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동안 진혁과 카심은 종업원이 가져온 차를 마셨다.

한참 만에 가리가 고개를 들었다.

“제품은 좋네요. 문제는 재고라는 것인데…….”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알아요. 좋은 제안이긴 한데, 가격은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제작 연도나 품목별로 다르겠지만 중국 제품보다 10~20% 정도는 더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재고품인데도 단가가 세네요.”

“품질이 다르니까요.”

진혁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급한 것은 상대였다.

“휴, 알겠습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상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해합니다. 천천히 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혁이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 일어나자 카심도 따라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카심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너무 밀어붙인 것 아니오?”

“그래도 될 상대입니다.”

“평소의 미스터 서 모습이 아니네요.”

카심이 아는 진혁은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항상 존중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진혁이 카심이 손에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을 주었다.

“그 책의 저자가 서문에 무역을 뭐라 정의했던가요?”

“종합 예술이라고 적었습디다.”

“예술은 한마디로 창조입니다. 만들어진 물건을 원하는 사람에게 넘기는 게 무역의 전부는 아니지요. 그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더 좋은 제품을 더 낮은 가격에 제공하겠다는 상사원도 많은데 나한테 기회를 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상대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겁니다. 창조하듯이 말입니다.”

“…….”

“그럼 예술이라고 하지, 왜 종합까지 붙었냐?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을 적절히 달리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경험이 필요한 일이니 카심 씨도 시간이 지나면 느낄 겁니다.”

“연락이 올까요?”

“올 겁니다, 반드시.”

진혁은 확신했다.

그래도 카심은 미덥지 않는 눈치였다.

서로 가진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헤어져 시장과 노점으로 가서 각자의 일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뭉쳤다. 가리가 연락한 것이다.

카라즈 앞에서 만났다.

“장사는 어떻게 하고 오셨습니까?”

“내가 알아서 했으니 상관 말고 들어갑시다.”

카심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그도 이 일의 결과가 궁금했다.

사장실로 들어가자 가리가 낯선 사내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함께 주문을 맡겼다가 난감한 처지가 된 다른 가게의 사장들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시 불렀습니다.”

“제가 시장에 있는 줄은 어찌 아셨습니까?”

“시장 상인들 중에 미스터 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몇 달째 밤마다 돌아다니는데.”

인상 좋게 생긴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 고맙지요. 진짜 난감했는데.”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잖소.”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난 일을 후회할 시간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안을 찾는 게 나았다.

이후 각 사장별로 상담을 했다.

제한된 제품과 수량을 두고 하는 상담이라 빠르게 진행됐다. 이미 서로 이야기가 되어서인지 아이템에 대한 배분도 어렵지 않았다.

역시 문제는 가격이었다.

이미 가리에게 진혁이 단가에 냉정했다는 말을 들은 터라 고민이 많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가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가격 조정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가격이면 우린 이익은 고사하고 손실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겠지만 감안해 주시오.”

“어느 정도면 되겠습니까?”

“조정해 주겠다는 말씀입니까?”

“사장님들이 계속 가게를 열고 계셔야 추가 오더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그건 그렇지요.”

“그렇다고 너무 후려치시면 안 됩니다.”

진혁의 농담 한마디에 분위기가 확 변했다.

다시 가격 협상이 벌어졌다.

진혁은 가능하면 사장들이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였다.

원가 계산에는 다들 고수였다.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었고, 사장들도 욕심을 부리지 않은 가격을 불렀다.

“이 조건들이면 저희 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회사 내부적으로 결재를 거쳐야 하니 계약은 그 후에 하도록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쉬운 것은 전체 금액이 50만 달러로 반 정도 줄었다.

재고품이다 보니 원하는 제품은 수량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인에 비해 체형이 커서 S 사이즈는 또 빼야 했다.

그래도 오더가 성사됐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헤어졌다.

노점으로 가면서 카심이 물었다.

“아까와는 분위기와 완전 다른데요?”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저쪽이 급하니까 가격을 고수했어도 됐을 텐데, 왜 물러선 겁니까?”

“물론 처음 가격도 받아들였을 겁니다. 급할 테니까요. 그런데 이 위기를 넘기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아!”

카심이 감탄을 터트렸다.

화장실에 갈 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가격을 고수했다면 그들은 진혁을 자신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한 놈이라고 여길 것이다.

당장은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겠지만 다음 오더는 없다. 눈앞의 이득보다는 미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설명은 카심을 이해시키기 위한 일반론적인 방법이었다.

진혁은 이곳 상인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을 작정으로 최대한 양보를 해 준 것이었다.

노점으로 가자 꽃무늬 히잡을 쓴 코가 오뚝한 여자아이가 노점을 지키고 있다가 투덜거렸다.

“금방 오신다고 했잖아요.”

“이야기가 길어졌다. 인사해. 같이 근무하시는 분이다.”

“안녕하세요. 바빠서 먼저 가요. 늦었어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여자아이가 재빨리 사라졌다.

“저런. 버릇없이.”

“놔두십시오. 한창 친구랑 어울리기 좋아할 나이 아닙니까.”

“내가 이 고생을 해 가며 저를 키우는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카심의 눈빛에는 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두 부녀의 모습을 보던 진혁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희수 생각이 간절했다.

자신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다.

진혁은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 * *

태후 그룹의 한 울타리 안에 있지만 물산과 패션은 법적으로도 엄연히 다른 회사였다. 물건을 반출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한지철 과장의 메일로 내역서를 먼저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의 출근 시간을 감안해 전화를 했다.

“카이로 지사의 서진혁…….”

-알아. 메일 봤어.

“벌써요?”

-출근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났어. 거기는 딱 맞춰 출근하나 보지?

“그건 아닙니다.”

-놀라기는. 농담이었어. 축하해.

한지철의 격 없는 말에 진혁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진심으로 자신을 격려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건 잘못 보낸 것 같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재고품은 총무본부 관할이야. 그쪽으로 보냈어야지.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요.”

-그런데도 멋지게 해냈군. 들리는 소문……. 아니다. 아무튼 총무본부 이강일 대리가 담당이니 그쪽하고 이야기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숙소라 전화번호 좀 확인해 주십시오.”

-아차, 거기는 새벽 2시가 넘었겠군. 내선 번호가 XXXX야. 메일은 내가 포워딩 할 테니 조금 후에 전화해 봐.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얼른 끝내고 자.

이번에도 한지철은 칼같이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깔끔하니 좋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 울렸을 거라 생각했을 때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이강일입니다.

“카이로 지사 서진혁입니다, 대리님.”

-카이로 지사? 거기 최영재 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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