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예정에 없던 귀국
그때 지사장실의 문이 열리며 겉옷을 걸친 손민한이 나왔다.
“점심 먹어야지. 진혁이는 나랑 먹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손민한을 따라나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최영재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이야기한 건지 불안해 미칠 것이다.
점심 먹다 확 체해 버려라, 개자식!
* * *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카이로 지사도 실적이 급했고, 가리 사장 측도 중국 업체에 크게 놀란 터라 빨리 확정 짓고 싶어 했다.
패션의 이강일 대리도 더 이상 딴지를 걸지 못했다.
6월 말까지 계약은 물론 신용장거래까지 마쳤다.
상반기 실적에 포함됐다는 의미였다.
기뿐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시장에 나눠 준 카탈로그를 보고 상담을 해서, 마침내 작지만 15만 달러어치의 생활용품 계약도 체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김동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자식 요즘 왜 그러지?”
“……?”
“최 대리 말이야.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요 며칠 조용하네. 너하고 무슨 일 있었어?”
“없습니다. 회의 시간 다 되었습니다.”
회의실로 들어가 앉고 얼마 후 손민한이 들어왔다.
“상반기 동안 고생 많았다.”
말과는 달리 다들 얼굴이 편치 않았다.
결국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최영재 대리가 맡고 있던 이집트 최대 철강업체 에즈스틸에서 약속한 오더를 뒤를 미룬 것이다.
500만 달러 규모의 대형 계약이라 진혁이 개척한 오더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잠시 최영재를 노려본 손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알겠지만 본사에서 상반기 실적 보고가 있다. 7월 15일로 날짜가 확정됐어. PPT는 최 대리가 만들도록 하고, 자료를 넘겨 줄 보조자도 한 명 같이 가야 한다.”
김동식은 고개를 반대로 돌렸고, 최영재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손민한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수작이었다.
“김 과장.”
“알리 측과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최 대리, 자료를 만든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저도 가고 싶지만 에즈스틸에 면담을 요청해 놓은 상태라 언제 일정이 잡힐지 알 수 없습니다. 자료 넘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실적이 좋아 칭찬을 받는 자리였다면 서로 가려고 피 터지게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달이라 좋은 소리 듣기에는 애초에 글렀다.
그 자리에 괜히 끼어 같이 혼날 이유는 없다는 판단들이었다.
결국 진혁이 시선을 마주쳤다.
“제가 가겠습니다. 재고품 진행 상황 체크도 해야 하고요.”
“좋아. 서진혁 씨가 가는 걸로 하고, 나랑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자료 검토부터 해.”
진혁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최영재가 건네준 PPT 자료를 읽어 보았다.
최영재의 평소 성격답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실적 미달에 대한 원인 분석이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반기 계획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새로운 바이어의 발굴과 기존 바이어로부터 추가 오더를 확보하겠다는 통상적인 대책만 있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실행 계획은 언급도 없었다.
한마디로 포장만 그럴싸하지 알맹이가 없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여러 사업을 하면서 투자 유치를 위해 많은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본 진혁이라 부족한 부분이 한눈에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싹 뜯어고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선배가 만든 자료이고, 이미 지사장의 컨펌까지 난 상태였다. 무엇보다 자신은 단순히 보조자였다.
조직 사회에서 말단 사원의 한계였다.
* * *
손민한과 함께 만들어진 발표 자료를 두고 예행연습을 하는 사이 출발할 날짜가 다가왔다.
오후 3시 비행기라 출근할 때 짐을 챙겨 왔다.
얼굴을 마주보기가 미안한지 김동식과 최영재는 아침에 미리 인사를 하고 외근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소마야, 다녀올게요.”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선물 잊지 말고요.”
“알았어요. 아이섀도하고 매니큐어. 콜라겐과 글리세린이 없는 제품으로.”
“Good. 잊지 마세요.”
벌써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라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지하로 가자 카심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카심은 뭐 필요한 것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당뇨약을 부탁드립니다.”
“당뇨약요?”
“부모님께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이집트 음식의 대표 재료는 세 가지다.
밀, 콩, 그리고 설탕.
이집트 대표 간식인 ‘옴 알리’는 한마디로 견과류를 넣은 ‘설탕 폭탄’이었다.
그만큼 이집트인은 단맛을 좋아했다. 그로 인해 전 국민의 1/5이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비용은 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카심 씨 부모님이면 내게도 같은 가족이잖아요. 사 올게요.”
카심이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손민한이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차를 타고 카이로 공항으로 갔다.
* * *
카이로에서 인천까지는 9,000킬로나 떨어져 있어 비행시간만도 열두 시간이 소요된다.
거기에 시차까지 더해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다음 날 아침 10시였다.
긴 여행이라 두 사람 모두 지쳐 있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늦지 않게 회사에서 보자고.”
“고생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손민한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진혁은 공항버스를 탔다.
한 시간이 넘게 걸려 고덕동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어머니가 한 팔을 벌리고 안아 왔다.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발걸음 소리도 모를까. 어서 들어와라.”
공항에서 출발할 때도 전화를 드렸었다. 지금까지 귀 기울이시면서 기다리고 계셨나 보다.
괜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배고프지? 얼른 차릴게. 옷 갈아입고 나와.”
“그것보다 이것 받으세요.”
진혁이 면세점에서 산 선물을 건넸다.
“돈 아깝게 뭐 하러 이런 걸 사 오니.”
말과는 달리 김영숙 여사는 재빨리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어머! 뤼이비통이네. 이거 비쌀 텐데.”
“엄마도 이제 명품 하나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지요.”
“내 처지에 명품은 무슨…….”
그러면서도 김영숙 여사는 신이 났다.
“지난 동창 모임 때 혜숙이가 샤넬 지갑 가져와서 얼마나 유세를 떨던지. 이번에는 내가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지. 호호호. 얼른 옷 갈아입어.”
입이 짝 찢어졌다.
그 모습에 진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정말 배터지게 먹었다.
중간중간 어머니의 수다도 들어 주며 맞장구치느라 한 시간가량이 흘렀다.
배가 부르자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몰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하암.”
“어머, 피곤한가 보구나.”
“열두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그래. 얼른 들어가서 자.”
“이야기 더 들어야 하는데…….”
“아버지 오면 또 하면 되지. 빨리 들어가.”
못 이기는 척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낯익은 천장의 모습이 집에 돌아왔음을 느끼게 해 줬다.
어느새 잠이 든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나서 얼마간 어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자 퇴근한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다녀오셨어요.”
“몸은?”
“괜찮습니다.”
“일은?”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 밥 먹자.”
그는 딱 세 마디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하여튼 재미없기는.”
“전 오히려 마음이 든든해지는 게 좋은데요.”
“누가 서씨 집안 자식 아니랄까 봐 편들기는.”
입을 삐쭉거린 어머니가 상을 차리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어머니가 차린 밥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무슨 잔칫날이야?”
“진혁이가 왔잖아요.”
“제집에 온 걸 뭐가 대단하다고.”
“몇 개월 만에 왔는데 그럼 아무것도 준비 안 해요?”
“맨날 사 먹기만 하다가 간만에 왔으니 집밥이 먹고 싶을 거야. 앞으로는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치. 그럼 당신은 드시지 말고. 진혁이나 많이 먹어라.”
“아버지, 저 배고파요. 얼른 수저 드세요.”
더 이상 두면 진짜 싸울 것 같기에 진혁이 일부러 배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기가 세진다더니, 네 엄마가 요즘은 말끝마다 토를 단다.”
“나 정도면 양반인 줄 아세요. 혜숙이는 신랑이 해 주는 밥 먹고 설거지도…….”
“동창회 가지 마!”
아버지가 단번에 어머니의 입을 막았다. 대단하신 분이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자 식사가 시작됐다.
또 한 번 과식한 진혁이 상을 물리고 쇼핑백을 내놓자 아버지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왜 쓸데없이 돈을 쓰고 그래?”
“양주입니다.”
“험……. 네 엄마 것도 사 왔냐?”
“안 비싼 걸로 가져왔습니다.”
“술상 아직 멀었어?”
아버지가 소리치자마자 어머니가 술상을 들고 나오셨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간다고, 아들이 왔으니 한잔하셔야지요.”
“당연하지.”
사 온 양주를 열어 따랐다. 이럴 줄 알고 두 병을 샀다.
첫 잔을 비우고 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많이 기뻐하시더라.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을 이제야 해 드렸으니. 네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것을 보니 보고 싶으신가 보더라. 한번 다녀와라.”
“예. 그렇지 않아도 주말까지는 있을 거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너도 마셔라.”
진혁이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웠다.
이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대화의 대부분은 진혁과 어머니가 했다.
그래도 끝까지 앉아 계시는 것을 보면 아버지도 이집트의 생활이 궁금한 것 같았다.
중간에 희준이가 전화해서 나오라고 했지만 내일 보기로 하고 끊었다.
오늘은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서초동 태후 빌딩에 도착했다.
물산은 31층에서 38층에 걸쳐 여덟 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회의실로 가자 이미 도착한 팀들도 있었다.
손민한 지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특별히 안면이 없어서 가볍게 인사만 하고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안내하는 직원에게 신분을 밝히자 뒷자리로 안내했다. 104개 해외 지사에서 카이로 지사의 규모가 그 정도라는 의미였다.
얼마 후 손민한이 도착했다.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사장의 인사말과 함께 회의가 진행됐는데 분위기가 무거웠다.
2009년은 글로벌 금융 위기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그래서 2010년은 좋아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우세했지만 그리스 사태로 유럽 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그나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주지사의 실적이 회복됐고, 중국 지사들의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중동 지사들도 실적이 좋지는 않았지만, 먼저 발표한 유럽 지사장들이 호되게 당한 후라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했다.
덕분에 손민한의 보고는 예상보다 무난하게 넘어갔다.
보고가 모두 끝나자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김선혁 상무가 단상에 올라가서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더욱 매진할 것을 짧게 당부하고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지사장들이 임원들에게 눈도장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손민한이 진혁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손을 잡아끌었다.
“나랑 같이 가자.”
“어디를요?”
“따라와.”
손민한은 마침 다른 지사장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고 김선혁 상무에게 다가갔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저희 지사원입니다. 인사드려라.”
“서진혁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상사원이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기대가 커.”
“감사합니다. 반드시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과한 칭찬과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자 진혁의 허리가 절로 굽혀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김선혁이 자신을 아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물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따 점심 먹기로 했으니 손 지사장도 참석해.”
“감사합니다.”
손민한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A급 지사장들만 참석한 자리일 텐데 불러 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서진혁 덕분이었다.
다른 지사장이 인사를 하러 오자 두 사람은 옆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난 상무님과 식사를 해야 하니까 서진혁 씨도 남은 기간 편하게 쉬다가 나중에 공항에서 보자고.”
“알겠습니다. 지사장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이후 지사장들이 모두 떠나자 보조로 따라온 직원들은 각자 친한 사우들을 찾아 흩어졌다.
오희준 외에는 딱히 친한 사원이 없는 진혁이었다.
오늘 퇴근 후에 진한 술자리가 약속되었기에 미리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고민하던 진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총무부에 가서 알아볼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