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미래 기억 나누기
태후패션은 20층부터 30층까지 쓰는데, 총무본부는 29층에 있었다.
진혁은 용건을 말하고 상담실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 이강일 대리 대신 담당 과장인 노준복이 들어왔다.
“카이로 지사의 서진혁입니다.”
“우리 과를 뒤집어 놓은 전사가 나타났군.”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사과받자고 한 말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일단 앉지.”
자리에 앉자 여직원은 커피를 내놓고 돌아갔다.
“염치없지만 진행 사항이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서진혁 씨는 상사원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야. 염치없는 것으로 치면 우리가 더하지. 골치 아픈 짐을 정리해 준다는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늑장을 부렸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재고품 관련해서는 나한테 직접 전화하면 돼.”
“그래도 되겠습니까?”
“김선혁 상무님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자네가 낫지 않겠나.”
진혁은 그때서야 어떻게 된 사정인지 이해가 됐다.
자신이 윗사람의 힘을 이용했듯이 손민한 부장도 김선혁 상무에게 부탁한 모양이었다.
김 상무님이 자신을 아는 눈치를 보인 이유가 있었다.
노준복이 서류철을 펴 놓고 그간의 진행 상황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오더 내용에 따라 재 패킹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음 주 중에는 컨테이너에 실릴 수 있다고도 했다.
“위에서 관심을 갖고 있어서 다들 신경 써 작업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다음에도 부탁하지.”
“……?”
“첫 거래가 어렵지, 한번 트면 지속된다며. 재고품 처리가 만만치 않아.”
“무슨 말씀인 줄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하자고.”
진혁은 노준복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약간 시간이 일렀다. 진혁은 먼저 약속한 회사 인근의 횟집으로 가서 기다렸다.
얼마 후, 희준이 도착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한지철 과장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각진 턱이 강인해 보였다. 이야기로 들은 것보다 더 인상이 강했다.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함께 온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혁입니다, 과장님.”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은 후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회가 나와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공통 관심사가 이집트에서 진혁이 개척한 오더이기에 그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운을 내세웠지만 둘 다 영업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진혁이 고생한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자식, 부럽다. 너하고 이집트하고 궁합이 맞나 보다.”
“운이 좋았다니까.”
“그러니까. 사우디에서는 그 난리를 쳤는데 이집트는 가자마자 바로 자리를 잡았잖아.”
“아직 멀었어. 이제 시작이야. 해야 할 일이 많아.”
“일이 많다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은 무슨 경우냐.”
투덜거리는 희준을 한지철이 나무랐다.
“일이 즐거우면 저런 거야. 너도 좀 배워라, 까불지만 말고.”
“그게 희준이 매력이잖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그나저나 총무본부 담당자가 태클을 걸었다더니 잘 해결됐나 보군. 전화 올 줄 알았는데.”
“지사장님이 나서 주셔서 해결됐습니다.”
진혁은 간략하게 내막을 들려주었다.
한지철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래서 며칠 동안 총무본부 분위기가 처져 있었군. 김 상무님 성정이라면 뒤엎고도 남지. 아암.”
“괜히 저 때문에 일이 커진 것 같습니다.”
“아니지. 잘못된 것은 고쳐야지. 역시 주제 모르고 까부는 놈은 위에서 확 누르는 게 제일이야. 잘했어, 한잔 받아.”
그렇게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지철이 시계를 보고 잔을 비웠다.
“여기서는 이쯤에서 끝내자.”
“전 아직 멀었는데요.”
“2차는 너희들끼리 가.”
“같이 가셔야지요.”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편하게 마셔.”
“그래도 선배님…….”
“내일 아침에 본부장님이 주관하는 아이템 회의가 있어.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해.”
그 말에 잡을 수가 없었다.
아이템 회의가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맡은 일도 벅찬데 회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며 쥐어짰다.
짜고 짜서 머리가 바짝 말랐어도 또 짜내야 했다. 그걸 이겨내야지만 살아남고 진급하는 게 직장 생활이었다.
희준이 투덜거렸다.
“아, 회의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한지철이 그 말에 한마디 했다.
“사표 쓰고 나가지 않는 한은 없어. 회의, 실적은 직장인의 숙명이야. 갈수록 팍팍해진다.”
“그래도 해외보다는 국내가 좀 낫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야. 해외가 어려워지니 다들 국내로 눈을 돌려서 더 치열해졌어. 기존 아이템들은 죄다 레드 오션이야, 레드 오션.”
비명에 가까운 한지철의 말에 진혁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웃도어는 어떻습니까?”
“아웃도어?”
“갑자기 웬 등산복?”
희준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혁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때쯤 아웃도어 의류 업체 한곳에서 중고생들이 교복 위에 입는 바람막이를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다른 업체에서 벤치마킹을 해 따라 하며 그 열기는 다른 세대까지 번졌다. 그리고 그 후 몇 년간 아웃도어 열풍이 불었었다.
진혁이 일부러 강한 어조로 말했다.
“주 5일제가 정착되고 웰빙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등산복의 특성상 가볍고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의류보다 비교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반대로 그런 이유로 제조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들의 지갑이 두툼해졌습니다. 씁쓸하지만 고가이기 때문에 과시욕이 강한 우리나라 국민이 더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겨우 한 달에 한 번 입을지도 모르는 옷에 거금을 투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희준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자 진혁이 다시 반박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찾을 수도 있어. 한 달 내내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정도는 멋들어지게 쉬고 싶지 않겠어?”
“글세. 너무 앞서가는 것 같은데?”
희준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한지철의 생각은 달랐다.
“새로운 아이템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최소 반년 걸려. 진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프리미엄화 전략도 타당해 보이고……. 이거 생각할수록 괜찮은 것 같다. 일단 일어나자.”
마음이 동한 한지철이 서둘러서 먼저 일어나 나갔다.
따라 일어나며 오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괜찮은 아이템인가 보네.”
“채택만 되면 대박이 날 거다.”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야?”
“아이템 회의잖아. 밑져야 본전이지. 얼른 가자.”
진혁이 한발 뒤로 뺐다.
그가 계산하려고 카운터에 가자 한지철이 이미 카드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선배님! 제가 사려고 했는데…….”
“됐어. 후배에게 얻어먹었다가 나중에 무슨 말을 들으라고.”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좋은 아이템 준 보답이야. 더 이상 토 달면 다시는 안 본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계속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대신 크게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된 거야. 돌아가서도 지금처럼만 해.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네. 선배님도 건강하십시오.”
“그래. 희준이가 잘 챙겨 주고. 나중에 보자.”
악수를 마치자마자 한지철이 회사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다.”
“열정만이 아니라 추진력도 대단하신 분이다. 그래서 후배들도 많이 따르지.”
두 사람은 근처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입가심에는 맥주만 한 것이 없었다.
주문을 하고 희준이 물었다.
“보고는 잘 끝났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나았어. 유럽 지사들 실적이 최악이라 상대적으로 덕을 봤지.”
“우리도 그 때문에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어. 그룹에서 지침이 내려와 법인 카드 한도를 단번에 반으로 줄였어. 그마저도 사전에 부서장 결재를 받아야 해.”
영업 사원에게 카드 한도가 줄어드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만큼 바이어와의 만남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다.
게다가 사전에 결재받으라는 것은 그마저도 통제하겠다는 의미였다.
진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어떤 정신 빠진 놈이 그런 지시를 했다는 거야?”
“정호영 기획실장.”
“정……. 암튼 그놈이 누군데?”
이번에는 희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사막에 처박혀 있더라도 귀는 좀 열고 살아라.”
“매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땀 닦을 시간도 없어. 누구냐니까?”
“정호영, 34세, 서울대 상대 졸, 콜롬비아 대학 MBA 과정 수료, 미혼, 재큐어 XJ 5.0…….”
“아예 흥신소를 차려라.”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어. 정진호 회장님의 장남으로 태후 그룹을 이을 후계자.”
총수 일가고 그룹 후계자라는 말이었다.
희준의 말이 이어졌다.
“능력은 있대. 일 처리도 깔끔하고, 부하 직원들도 존중하고.”
“그런데?”
“너무 미국 생활을 오래 했다는 거지. 한국의 현실을 몰라. 그것도 전혀 몰라. 덕분에 다들 사무실만 지키고 있다.”
“그건 아니지, 내근직도 아니고. 불만은 없어?”
“왜 없겠냐. 근데 3부장이 한마디 했다가 엄청 깨졌어. 정보 수집은 컴퓨터로 가능하고, 태후 제품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데 왜 스스로를 낮추고 비굴하게 접대를 하느냐고 말이야. 그 다음부터는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견 수긍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미국은 세계 1위 국가였다.
그건 그 나라 제품도 경쟁력이 1위라는 말이다.
바이어가 찾아와 사고 싶다고 매달리는 판이니, 접대를 하는 게 아니라 접대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반면 한국 제품은 가격에서 중국에 밀리고, 제품의 질에서는 선진국에 밀렸다.
그리고 한국에는 태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끝이 아니야. 부서 통폐합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 맨먼스가 낮다나, 뭐라나. 아무튼 사무실 분위기가 최악이야.”
“멀리 나가 있기를 잘했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다.”
“잘났다. 너는 이집트에서 유유자적할 때 이 형님은 아주 머리털이 다 빠진다, 다 빠져.”
“고생 많다. 약속한 대로 오늘은 내가 제대로 접대할 테니 오랜만에 제대로 한번 마셔 보자.”
“좋지. 위하여!”
쨍!
잔을 힘차게 부딪쳤다.
그걸 시작으로 두 사람은 그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 * *
‘으윽. 머리야.’
밀려오는 두통과 숙취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그제야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엄살만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희준은 술을 물 마시듯 했다. 클럽을 찍고 룸살롱을 들른 것도 모자라 포장마차까지.
결국 인사불성이 된 희준을 택시에 밀어 넣어 태워 보낸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휑한 눈으로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서 TV 보던 어머니가 한 소리 했다.
“무슨 술을 이기지도 못하게 마시니?”
“희준이를 만나 오랜만에 한잔했어요. 혹시 무슨 실수했어요?”
“다 큰 놈이 붙잡고 얼마나 우는지 동네 창피해서 혼났다.”
“죄송합니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자고 있는 네 아버지까지 깨워서 무릎 꿇고 죄송하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억!
진혁은 얼굴이 벌게져서 안절부절못했다.
‘설마 내가 취해서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