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리베이트
“아버지 화 많이 나셨겠는데요?”
다행히 그 이상의 별일은 없었나 보다. 어머니가 흘겨보며 말했다.
“화를 내시긴 내셨지. 근데 아침에 출근하면서 해장국 끓여 놓으라고 하시더라. 그건 무슨 경우인지. 배고프겠다. 얼른 씻고 나와.”
세수를 하고 나오자 상이 차려져 있었다.
국그릇을 먼저 들었다. 콩나물국 위에 살얼음이 떠 있었다.
“캬아! 우리 어머니 콩나물국은 역시 최고!”
“아부는……. 속 버리지 않게 얼른 밥부터 먹어.”
“잘 먹겠습니다.”
진혁은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어머니의 수다를 들어주다가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고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간 그는 속초행 버스를 탔다.
청학동으로 가자 반가운 이들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내외, 그리고 사촌들.
절을 하고 가져간 선물을 드리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많은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백두산 여행길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바이순대촌에서 함께 점심을 한 후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진혁은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종로3가 역에서 내렸다.
카심이 부탁한 당뇨약을 사기 위해서다.
제일 큰 약국으로 들어갔다.
“당뇨약 좋은 것으로 주세요.”
“이쪽에서 골라 보세요.”
진열장 한 칸이 당뇨약으로 채워져 있었다.
외국 제품도 있었지만 국내 제약 회사에서 나온 것도 의외로 많았다.
“국내 제품도 괜찮나요?”
“그럼요. 세계적인 제약 회사에서 라이센스를 가져와 국내에서 제작해 수출하는 제품들입니다.”
“그럼 국내 제품별로 두 개씩 주세요.”
여섯 개사 제품 열두 개라 큰 봉투에 담아야 했다. 혈당 측정기와 검사지도 넉넉히 구매했다.
* * *
다음 날은 토요일이라 아버지가 출근을 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외식을 했다.
오후 비행기로 타야 했다.
월요일에 출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눈가가 발개진 어머니와 괜찮은 척 헛기침을 하는 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집을 나섰다.
정류장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의 배웅을 받을 받으며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 * *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한 진혁의 얼굴은 밝았다. 한국에서 그리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푹 쉰 덕분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소마야에게 면세점에서 산 화장품을 건네자 아이처럼 기뻐했다.
카심이 부탁한 당뇨약과 혈당 측정기는 어젯밤 시장에 가면서 이미 건네줬다.
김동식 과장과는 가져간 라면과 김치에 소주를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해외 지사 상사원에게 고향의 음식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었다.
물론 최영재에게도 예의상 전화를 했지만 술자리에 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혁에게도 드디어 개인 목표가 할당됐다.
300만 달러.
물론 하반기 목표였다.
상반기 실적 130만 달러에 230% 상향된 목표였다.
진혁은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올해 합류해 초반에는 적응하느라 실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하메드 상회와 카라즈로부터 오더가 계속 나올 테니 충분히 자신 있었다.
이제부터는 상사원으로 인정한다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사 입장에서도 해외 지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사원당 평균 1,000만 달러 정도는 해 줘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목표를 달성한다 해도 한 사람의 몫을 다하지 못한 것이니 불평할 일이 아니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커피까지 나눠 마시자 손민한이 출근했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얼마 후 지사원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부재중에 일어난 일과 오더 진행 사항을 체크한 손민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룹에서 해외 지사 운영에 대한 변경된 지침이 내려왔다. 수주 금액 대비 리베이트 비율을 지사 평가에 반영하겠단다. 비율이 높은 지사는 별도로 특별 감사를 실시한다고 한다.”
“리베이트를 통제하겠다는 겁니까?”
“선진국 지사에 너무 유리한 조건입니다. 우리 같은 후진국은 리베이트가 필요악입니다.”
“도대체 본사에서는 그룹에서 그런 지침이 정해질 때까지 뭣 했답니까?”
김동식과 최영재가 벌게진 얼굴로 돌아가며 불만을 터트렸다.
오더 수주는 물론 행정 처리에도 뇌물이 들어가야 일이 되는 이집트였다.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혁만이 침묵을 지켰다.
희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예상은 했었다. 다만, 이렇게 바로 시행될지는 몰랐다.
손민한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쳐서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해외영업본부는 물론 지사장들도 반대했어. 접대비마저 깎겠다는 것을 겨우 막았단 말이야. 김선혁 상무님도 나섰지만 안 됐어.”
“대체 누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답니까?”
“알면 최 대리가 항의할 거야? 당장 전화해 줘?”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위에서 까라면 깔 수밖에.”
“이미 계약되어 지급해야 할 리베이트들은 어떻게 합니까?”
김동식이 현실적인 우려를 나타냈다.
“소급 적용은 하지 않기로 했어. 앞으로 계약되는 건들이 대상이야.”
“이미 관행으로 지급되던 것인데 갑자기 리베이트를 주지 못한다면 추가 오더를 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리베이트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게 아니야. 점진적으로 줄여 나가라는 의미라고 하더라.”
“말이 좋아 점진적이지, 당장 평가에 반영하고 감사까지 실시하는데 그게 됩니까?”
최영재가 참지 못하고 다시 불만을 터트렸다.
대형 오더를 관리하고 있어 리베이트 금액도 클 수밖에 없으니 민감하게 반응했다.
손민한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건 빠져나갈 구멍은 있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편법이지만 중간에 에이전시를 끼워 넣어서 처리해야지.”
“괜찮은 방법입니다. 수수료가 좀 들겠지만 오더가 깨지는 것보다는 낫겠네요.”
반색하는 김동식과 달리 최영재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전시를 잘못 넣었다가는 바이어를 뺏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을 만한 에이전시를 이용해야지. 그건 각자 찾아보도록 해. 단, 한국 업체는 안 돼. 그룹에서 조사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더라도 바이어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갑자기 에이전시를 끼워 넣는다면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담당자의 역량 문제지. 리베이트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 정도도 설득 못 한다면 자질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어려우면 내게 전화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최영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겨우 수긍하자 진혁이 손을 들었다.
“말해 봐.”
“동일한 아이템에 선적지가 같다면 본사에서도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지적이야. 그 점을 우리도 우려했어. 그래서 거래 규모는 100만 달러 이하, 거래 실적은 2년 이하인 거래선을 우선 에이전시로 전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정도면 최선은 아니지만 특별 감사는 피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어려운 시기다. 하지만 우리만 어려운 게 아니야. 유럽 지사는 최악이더라. 그러니 다들 힘내고 또 달려보자.”
손민한의 당부를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김동식과 최영재는 바로 서류 가방을 챙겨서 나갔다. 관리하는 오더가 많으니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진혁은 모하메드 상회만 신경 쓰면 되니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컴퓨터를 열어 이런저런 자료들을 확인했다.
그는 퇴근 후 변함없이 카릴리 시장을 찾았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카심의 노점상에 들렀다.
“오늘은 많이 파셨습니까?”
“팔긴 뭘 팝니까.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투덜거리는 카심의 손에 책이 들려 있는데 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당뇨약과 측정기는 고맙습니다. 부모님께 제 면이 섰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그냥 받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했잖아요.”
진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딱 잘랐다. 어제 물건을 건네줄 때도 카심이 물건 값을 주겠다고 해서 한참을 실랑이를 했었다.
겨우 무마시켰는데 카심의 부모님 생각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그럼 측정기 값이라도 받아요. 안 그럼 아버님께 혼납니다.”
“난 카심 씨를 끝까지 같이 갈 동지라고 생각하는데, 카심 씨는 저를 남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건 아니오. 하지만…….”
“됐어요.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집에 초대해 주세요.”
“……!”
“가족끼리 밥이라도 한번 같이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적당한 해결책을 내놓자 카심의 얼굴이 밝아졌다.
구운 지 오래되었는지 표면이 딱딱하게 굳은 옥수수 하나를 집어 들려는 걸 카심이 바로 제지했다.
“선불입니다.”
“우리끼리 무슨…….”
“친한 사이일수록 돈 거래는 확실히 해야 합니다.”
“쩝. 알았습니다.”
역시 철저한 사람이었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갑에서 5파운드를 꺼내 내밀자 카심이 고개를 저었다.
“올랐어요. 1파운드 더 내야 합니다.”
“그렇게 갑자기 올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20%나.”
“이 양반이 시장을 헛돌았네. 곡물 가격이 얼마나 뛰었는지 몰라요? 그것 때문에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고 있구만.”
진혁은 아차 싶었다.
이집트는 보조금의 천국이었다.
무바라크는 독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에너지와 식품에 대한 보조금을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그사이 국고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정부 내에서 보조금 삭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거기다 가뜩이나 불안한 환율까지 겹쳐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1파운드까지 깔끔하게 챙긴 카심이지만 표정은 씁쓸했다.
“시장 종업원들은 힘들게 일하면서 이것 하나로 한 끼를 때우는데……. 내 마음도 편치 않소.”
“더 어려워질 겁니다.”
“여기서 더 어려워지면 폭동밖에 없지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잘 해결됐어요.”
2008년 국제 곡물 시세가 사상 최고치로 치솟자 무바라크 대통령은 국영 빵집 구매량을 제한했었다.
그에 성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빵 굽는 노동자가 파업하자 정부가 긴급 조치로 군대를 동원해 빵을 굽게 한 일은 해외 토픽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진혁은 더 이상 말을 삼갔다.
그는 이번 상황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이해시킬 방법도 없었다.
자신이 미래에서 돌아왔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한 가지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회사 내부적으로 변화가 있습니다.”
진혁은 태후 그룹에서 해외 지사의 리베이트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내렸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밝혔다.
카심도 정보료를 받고 있는 처지라 무관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아는 분이라고는 카심 씨밖에 없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먼저 솔직히 이야기해 줘서 고맙소.”
“알고 계셨습니까?”
“김 과장하고 최 대리도 낮에 나한테 은밀히 부탁했소. 물론 미스터 서처럼 사정 이야기를 다 해 준 건 아니고. 무역하는 이들을 몇 명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요즘 그쪽도 힘들다고 하던데, 몇 명은 사업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겠다며 내게 묻기도 했소.”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서의 부탁이니 내가 가장 능력이 있는 친구로 알아봐 주겠소.”
“아니요. 사업을 접고 장사를 하겠다고 상담 오신 분들 중에 믿을 수 있는 분으로 부탁드립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카심에게 진혁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시겠지만 무역은 바이어가 자산입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그걸 아무에게나 넘길 수는 없지요. 능력 있는 분이라면 분명 욕심을 낼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결국은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돈은 사람을 변하게 하지요. 그렇게 알아보겠소.”
“고맙습니다.”
카심의 확답을 듣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가 모하메드 사장을 만났다.
“휴가 다녀와서 그런지 얼굴이 활짝 폈군.”
“도와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것.”
진혁이 선물 세트를 놓았다.
“한국에서 유명한 홍삼차입니다. 차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그냥 와도 되는데.”
“약소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추가 오더와 다음 시즌 상품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네. 기대해도 좋을 거야.”
한껏 웃는 모하메드에게 진혁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 양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설마 발령이 나서 귀국한다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전 카이로에 끝까지 남을 겁니다.”
“다행이군.”
굳었던 모하메드의 얼굴이 펴졌다.
“그룹의 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다음부터는 현지 에이전시를 통해 거래하라고 합니다.”
“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모하메드에게 진혁은 최대한 자세히 이번 일에 대해 들려줬다.
“그렇게 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책상에 앉아만 있는 놈들은 현장의 고충은 안중에도 없지. 고생 많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모하메드가 말을 잘랐다.
“이해는 하지만 아직 허락한 것은 아니야.”
“원하시는 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