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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7화 (17/307)

17화. 두 집 살림

“계약은 담당자와 직접 하겠다는 조건을 달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이어는 계약 당사자인 우리에게 클레임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알라딘 컴퍼니와 카이로 지사가 맺은 계약은 그들에게는 별개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요구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알겠습니다만…… 그러다가 우리와 거래를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쩝니까?”

“그럼 하지 마십시오. 겨우 1% 수수료 받자고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는 없습니다.”

진혁의 태도는 냉정했다.

김동식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겨우 자료상 노릇만 하려고 회사를 인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진혁을 바라보는 카심의 시선은 복잡했다.

평소의 진혁은 정이 많고 예의 발랐다. 그런데 업무에 대해서는 냉기가 풀풀 날렸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얼마간 이런저런 업무 관련 지시를 하고 마쳤다.

친구 앞에서 혼난 게 쑥스러웠는지 핫산이 어색한 표정으로 선물 봉투를 풀어 봤다.

‘옴 알리’였다.

진혁은 기겁했지만 핫산과 카심은 맛있게 먹었다.

진혁도 그냥 있기 뭐해서 하나 먹었다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탕 한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은 느낌이었다.

얼른 남은 음료수로 입을 헹궜다.

“으, 진짜 적응 안 되네요.”

“맛만 있습니다.”

“개업 선물로 먹을 걸 가져오는 게 어디 있습니까?”

“왜 돈을 쓸데없는 곳에 써요. 보고 버리는 선물보다 이렇게 함께 먹는 게 좋은 겁니다.”

“됐어요. 좋아하시는 분들끼리 많이들 드세요.”

이집트인의 설탕 의존증은 심각했다. 당뇨병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이미 중독되어 제어를 못 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출근한 진혁은 지사장실로 들어갔다.

얼굴을 보자마자 손민한이 물었다.

“에이전시는 구했어?”

“어렵게 구했습니다.”

“역시 능력 있는 친구라 제일 빠르군.”

“카심 씨가 도와주셨습니다.”

“오늘 김 과장도 카심이 소개해 줘 만난다던데, 혹시 같은 업자 아니야?”

“그건 모르겠습니다. 문제가 될까요?”

“문제는 무슨. 소량 오더만 넘길 건데. 한쪽에서 맡아 관리하면 편하고 좋지.”

진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손민한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오더는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미리 밝히고 분위기를 파악한 것이다.

괜찮았다.

김동식에 이어 며칠 후에는 최영재도 핫산과 에이전시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진혁의 충고대로 바이어와 계약 시 직접 참여하는 데 동의했다.

김동식은 쉽게 계약했지만 깐깐한 최영재는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를 찾기 쉽지 않으니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받아들였다.

* * *

알라딘 컴퍼니의 이름으로 바이어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재고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알렉산드리아 항에 도착했다.

진혁은 카심이 모는 차를 타고 핫산과 함께 항구로 갔다.

한여름에 접어들고 있어 온도계가 40도를 넘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나는 판인데,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하역을 감독하고 물품을 보세 창고에 옮기는 사이 세 사람은 흠뻑 젖어 있었다.

나중에 직원과 함께 나타난 가리 사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내가 늦었나 봅니다.”

“바이어는 원래 좀 늦게 와야 위신이 섭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 더 미안해지네요.”

“에이, 농담입니다. 저희가 일찍 나온 겁니다. 닦달하지 않으면 오늘 내로 검수를 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함께 보세 창고로 가자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밀려왔다.

이집트에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전기료가 엄청 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이건 사무실이건 에어컨을 원 없이 틀고 살았다.

그 이면에 보조금으로 국고가 술술 새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았다.

인부들도 귀찮다는 이유로 보세 창고의 커다란 문을 활짝 연 채 작업했고, 누구도 그걸 통제하지 않았다.

‘웃기는 나라라니까.’

진혁이 양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열기는 사라졌지만 본격적으로 몸이 힘든 일이 시작됐다. 가리 사장이 가져온 리스트에 따라 검수가 시작된 것이다.

여러 업체의 물량이 섞여 있다 보니 품목이 제각각이라 해당 박스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박스가 중간에 끼어 있기라도 하면 위에서부터 내렸다가 다시 쌓아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박스를 찾아 가져가면 개봉해서 가리 사장과 직원이 확인하고 사인을 했다.

카심과 함께 박스를 찾아 나르다 보니 온도와는 상관없이 다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핫산이 난간함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가져가야 할 박스가 맨 밑에 위치해 있었다.

가리 사장이 그걸 보고 말했다.

“좀 편한 박스 번호로 하세요.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괜찮습니다.”

“고맙…….”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인사하려는 카심의 말을 냉정하게 자른 진혁이 사다리까지 가져와 위의 박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박스를 밑에서 받는 카심의 입이 한 자나 나왔다.

팔 근육이 피로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이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달려드는데 혼자 못 한다고 빠질 수도 없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일도 결국 시간이 지나자 끝났다. 마지막 박스까지 검수를 마쳤다.

탁!

“굿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고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신경을 많이 써서 보낸 덕분입니다. 창고까지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아쉽네요.”

“그거야 우리 창고 사정 때문에 그런 거니 미스터 서 책임이 아니지요. 공간이 비는 대로 각자 가져가기로 했으니 걱정 마시오.”

“그래도 여기서 물건을 넘기는 게 개운치 않네요.”

어색한 웃음을 짓는 진혁의 모습에 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만 받아 챙기면 다음 주문 때까지 얼굴도 비치지 않는 다른 상사원들과는 달랐다.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에 믿음이 갔다.

* * *

8월이 시작되자 숨이 턱턱 막혔다.

일 분이라도 밖에 서 있다가는 일사병에 걸려 쓰러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반 기업체는 이 시기를 휴가 기간으로 정해 업무를 하지 않았다.

카이로 지사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가족에 줄 선물을 챙기느라 바쁠 때 진혁은 홀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상반기 보고회로 얼마 전에 다녀왔기 때문에 또 나가기가 애매했다.

시장에서 옥수수를 먹으며 카심에게 물었다.

“휴가는 어디로 가세요?”

“장사해야죠.”

“에이, 그건 아니지요. 휴가 시즌이라 다들 쉬는데 이럴 때는 같이 쉬어 줘야죠.”

“휴가 기간이니 시장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도 많고, 세계 여기저기서 휴가철을 맞아 관광객들이 몰려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

“미스터 서에게는 쉬는 시간이겠지만 여기 시장 상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대목이란 말입니다, 대목.”

진혁은 아차 싶었다.

이곳에서 승부를 보겠다며 시장을 그렇게 돌아다니고도 실제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

이 나라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드디어 휴가다.

캐주얼 복장의 진혁이 가방 하나를 매고 숙소를 나섰다.

김동식은 어제 근무가 끝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손민한 지사장과 최영재 대리도 함께.

진혁은 한국에 가는 대신 이집트를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서운해했지만 용돈을 보내 드리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같은 책에서만 본 이집트의 명소들을 찾아다녔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시나이산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휴가 기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래도 휴간데 그냥 말 수는 없어서 유명한 휴양지인 다합(Dahab)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황금빛 모래와 아름다운 산호초를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들어 다이빙이나 윈드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진혁도 블루 홀에서 프리다이빙을 하며 지중해의 깨끗한 바다를 만끽하고 휴가의 마지막을 보냈다.

다음 날, 늦은 아침.

진혁은 배낭을 챙겨 숙소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로비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현관으로 향하는 진혁의 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헬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움에 몸을 뒤틀었다.

“세스,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히잡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눈물범벅인 얼굴의 여인이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주변을 둘러싼 관광객들은 안타까운 시선만 보낼 뿐 나서지 않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진혁이 곁에 다가갔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 응급조치법에 대해서는 배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연습일 뿐이었다.

그사이 아이의 눈이 허옇게 뒤집어지며 파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세스, 왜 그래! 정신 차려! 어떻게 해, 세스…….”

여자가 실성한 듯 아이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이의 모습이 어린 시절 희수를 떠올리게 했다.

조금 지나면 숨이 막힐지 모른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진혁이 배낭을 내팽개치고 슬라이딩하듯 아이 옆으로 다가갔다.

“멈춰요. 그렇게 몸을 흔들면 안 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 아이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옴 알리를 먹고 있었어요. 목에 걸렸나 봐요.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하임리히법(Heimlich maneuver).

왜 그게, 어떻게 생각났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골든아워가 지나가고 있었다.

늘어진 아이를 안아 뒤로 돌려세웠다. 오른손 주먹을 쥐고 명치끝에 댔다. 왼손으로 주먹을 감싸 쥐었다.

강하게 들어올렸다.

아이의 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지만 변화가 없었다.

‘제발 좀!’

이를 악물었다.

“희수야!”

무의식적으로 간절히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당겨 올렸다. 그러자 묵직한 느낌과 함께 아이의 입에서 커다란 아몬드가 튀어 나왔다.

“콜록! 콜록!”

아이가 기침을 크게 했다.

“세스! 오, 알라!”

“으아아앙, 엄마!”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진혁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살았다, 살았어.”

“브라보!”

짝짝짝짝짝!

주변의 관광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진혁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쑥스러운 표정의 진혁이 억지로 몸을 진정시켰다.

그때 건강한 체격의 젊은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울고 있는 모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저분이, 저분이 우리 세스를 구해 주셨어요.”

여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막 몸을 일으킨 진혁이 있었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사내가 다가와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신이 저 아이를 버리지 않으신 겁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은혜를…….”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아이부터 병원에 데려가 보셔야 합니다. 혹시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부터 챙기세요, 얼른.”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동양 남자의 말이 맞았다. 일단은 딸의 건강부터 확인해야 했다.

딸을 안아 든 사내가 아내의 손을 잡고 떠나는 모습에 진혁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한 생명을 살린 것이다.

더불어 한 가정을 지켰다.

자신도 나중에 희수와 함께 저렇게 살고 싶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진혁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 쪽을 보고 수군대는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팽개쳐 놓은 배낭을 찾아 어깨에 메고 리조트를 떠나는 진혁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휴가의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 지었다. 이제 다시 앞을 향해 달리는 일만 남았다.

‘아자, 아자! 파이팅!’

* * *

휴가가 끝나고 업무에 복귀하자 알라딘 컴퍼니로 오더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가전제품과 자동차 부품은 물론 생활 잡화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핫산이 낮에는 계약서대로 바이어와 직접 만나러 다니는 바람에 서류 작업은 밤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혁도 퇴근 후에 합류해서 도와야 했다.

시장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모하메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해가 진 저녁.

모하메드 상사를 나서는 진혁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2차분 오더는 여름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아 30만 달러 정도였다. 하지만 겨울 신상 오더가 120만 달러 가까이 됐다. 총액 150만 달러로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반기 시작이 좋았다.

즐거운 기분으로 노점에 들렀는데 카심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오늘은 손님이 거의 없었다. 어려워진 경기에 휴가 시즌이 끝난 영향이었다.

이제 표정만 봐도 그날의 매출을 알 수 있었다.

옥수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래 가지고 밥 벌어 먹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기분 좋지 않으니 건드리지 마시오. 그리고 돈부터 내고 먹으라니까.”

“어휴, 또 올랐네.”

진혁이 매대 밑에 붙어 있는 안내 글을 보고 7파운드를 내놓았다. 그사이 다시 1파운드가 올랐다.

그만큼 물가가 끝 모르게 치솟고 있었다.

옥수수를 씹으며 진혁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알라딘 일이 계속 늘어나서 걱정이네. 사람을 뽑아야 하나? 나랑 일하려면 밤에 근무시켜야 하는데. 무역 업무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하루에 2달러는 줘야 올 텐데…….”

“그거 내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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