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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8화 (18/307)

18화. 실적 스트레스

카심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렇다고 바로 채면 재미가 없지.

“가족을 위한 소중한 일이라면서요? 게다가 찾아오는 분들과의 신의는 어떻게 하고요?”

“거, 사람 참.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뒤끝 있네.”

자신이 했던 말이기에 아니라고 잡아뗄 수는 없는지 괜히 다른 문제를 거론하며 툴툴거렸다. 그래도 강도가 약해졌다.

카심은 손님이 줄어들고 장사가 안 되자 생각이 많아졌다.

진혁을 따라다니며 그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책에서 본 무역 일을 직접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점차 커져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가 발목을 잡았다.

비록 줄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없으면 당장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까지 준다고 하지 않는가.

눈이 번쩍 뜨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진혁의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했다.

카심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일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카이로 지사에서와는 다를 겁니다. 거긴 일을 하든 안 하든 회사가 알아서 또박또박 월급을 주지만, 알라딘은 우리 스스로가 벌지 못하면 모두가 망합니다. 생사를 함께할 동지가 아닌 단순 직원으로 오시겠다면 사양하겠습니다.”

“나를 가족이라고 부르며 함께 가자고 해 놓고는 그런 말씀을 하면 안 되지요. 그리고 친구인 핫산의 인생도 걸린 일인데, 소홀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걱정 마시오.”

똑바로 보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진혁이 마침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함께 하시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리하시는데 하루면 되죠? 어차피 장사도 안 되는데.”

“일주일은 주셔야 합니다.”

“일주일씩이나요?”

“해 온 세월이 얼마인데. 단골들에게 인사도 하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부터 출근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카심의 인사에 진혁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카심이 합류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걸렸어.’

* * *

일주일 후, 퇴근한 카심의 합류로 알라딘 컴퍼니의 일 처리가 빨라졌다.

김동식과 최영재가 담당하는 오더들이지만 근무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이해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카심은 그동안의 공부가 헛되지 않았는지 얼마 가지 않아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진혁은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반가운 전화가 왔다.

카라즈였다.

진혁은 바로 시장으로 달려갔다.

카라즈는 지난번과 달리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이 한쪽에만 몰려 있었다.

벽에 걸린 플래카드를 본 진혁의 입이 귀에 걸렸다.

‘세계가 인정하고 즐겨 입는 바로 그 제품! 글로벌 태후 이월 한정 상품 특가전!’

아랍어로 크게 쓰여 있었다.

“거기 아주머니, 줄 서요, 줄 서!”

“다 팔리고 없으면 어떻게 해요.”

“아저씨, 그건 사이즈가 안 맞다니까요.”

“아들 입힐 거니 걱정 마시오.”

손님과 점원의 실랑이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반대편 중국 제품 매대에는 파리 한 마리 없었다.

가리 사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정말 굉장하네요. 반응이 생각 이상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비록 이월 상품이지만 허접한 중국산 신상에 비해 품질은 월등하면서 가격은 비슷하니 다들 이것만 찾습니다. 물론 태후라는 브랜드의 인지도도 무시할 순 없고요.”

진혁은 가슴이 뿌듯하다 못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래를 주선한 상사원의 보람과 함께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인정받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더해진 것이다.

중동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호의적이었다.

1970년대의 중동 붐 당시 열사의 사막에서 보여 준 한국인들의 끈질긴 열정과 저력은 아직도 기억되고 있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토목 공사인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저가 중국 제품이 밀려오기 전까지 한국 전자제품들이 인기리에 팔린 것도 그 영향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경제 사정과 가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 제품을 사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중국 제품의 떨어지는 품질에 분통을 터트릴 때마다 한국 제품에 대한 열망은 커졌다.

게다가 최근에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한류 바람과 K-POP 열풍이 이곳에도 상륙하고 있었다.

그 영향이 이렇게 표출된 것이다.

“하하하하.”

자리를 옮긴 사무실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결과가 좋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가리 사장이 직접 커피까지 타 왔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모두가 미스터 서가 좋은 제품을 소개해 준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저를 선택한 사장님의 결단이 있어 이루어진 일입니다. 덩달아 저도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좋은 자리니만큼 서로 덕담이 오갔다.

“물건이 더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이 추세라면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소진될 것 같습니다.”

“배로 오는 데만도 20일이 걸립니다. 지금 주문하는 것은 늦습니다.”

“압니다. 그래도 안타깝긴 합니다. 그때 전부 가져왔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느껴지는 지금이 딱 좋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가리는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셨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 사장님들도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겨울 상품에 대한 상담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부터 주십시오. 다른 가게 사장들도 미스터 서에게 고마워하고 있는데, 바빠서 우선 말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럼 저야 더 좋지요.”

진혁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감사를 표하는 자리에서의 상담이라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며칠 후, 고급 레스토랑에서 시장 사장들과의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처음 먹어 보는 비싼 음식과 술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다들 오늘 모임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진혁이 가져간 재고품 현황을 나눠주자 사장들은 언제 술을 마셨냐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자료를 훑어봤다.

카이로의 겨울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낮에는 더운 한국의 봄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그래서 노준복 과장에게 춘추복 재고품 리스트를 부탁하자 다음 날 바로 보내왔다.

이강일 대리와는 전혀 달랐다.

얼마 후 상담이 시작됐는데 예상과 달리 쉽지 않았다. 사장들끼리 서로 물량을 더 가져가려고 신경전이 대단했다.

결국 진혁의 중재로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선에서 물량을 배분했다.

전체 규모가 95만 달러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런데도 사장들은 재고가 적다며 투덜거렸다.

진혁은 그 투덜거림을 즐겁게 들었다.

* * *

모하메드의 오더에 재고품 오더까지 겹치자 정신없이 바빠졌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했다.

거기에 알라딘 컴퍼니의 일까지 봐줘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만족감이었다.

모하메드 상회의 물건에 가라즈의 재고품까지 전달하고 나니 어느새 11월에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식어 가는 날씨만큼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의 분위기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올해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만큼 실적을 올릴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실적은 단순한 숫자만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지사는 물론 개인까지 평가를 받게 되고, 점수에 따라 인사 조치가 이루어진다.

회의실에서 열린 영업 회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카이로 지사의 올해 목표는 3,500만 달러였다. 상반기에 1,500만 달러로 목표 대비 미달이었다.

하반기에는 더 떨어져서 현재까지 1,000만 달러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빅 바이어의 오더 규모가 줄어든 데다 상반기에 오더를 당겨 받은 여파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일하게 진혁만이 현재까지 245만 달러의 실적으로, 연말까지 목표한 300만 달러를 넘길 것이라 예상될 뿐이었다.

손민한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김동식이 입맛을 다셨다.

“환율이 계속 떨어지는 바람에 바이어들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습니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추가 오더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여기 쉽게 영업하는 사람 누가 있어? 진급 이야기만 하지 말고 어떻게든 실적을 채워야 할 것 아니야.”

“다시 쥐어짜 보겠습니다.”

마뜩치 않게 김동식을 바라보던 손민한의 시선이 최영재에게로 향했다.

최영재가 말했다.

“에즈스틸의 3/4분기 오더를 상반기로 가져간 여파가 큽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4/4분기 발주는 왜 안 이루어지고 있는 거야?”

“아시겠지만 현 대통령의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가 내년 대선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아흐메드 에즈 회장의 결정이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500만 달러 확실한 거지?”

“일단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정확한 것은 나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영재가 한발 뒤로 뺐다.

괜히 분위기에 눌려 자신했다가 무산되면 타격이 몇 배 크기 때문이었다.

손민한의 부드러워진 시선이 자신으로 향하자 진혁이 생각을 밝혔다.

“곧 내년 여름 시즌 상품에 대한 상담을 해야 하는데, 그때 물량을 최대한 늘리겠습니다. 또한 시장 상인들을 더 자주 찾아가서 신규 바이어 발굴에도 힘쓰겠습니다.”

“좋아. 마진을 줄이더라도 규모를 늘리도록 해.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알겠습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손민한이 다시 굳은 얼굴을 했다.

“우리 지사 상반기 실적이 미달이었음은 다 알 거다. 만일 하반기까지 목표 달성을 못 하면…… 나는 물론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사표를 써야 할 거야. 얼마 남지 않았어. 죽을 각오로 뛰어다녀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상사원은 실적으로 말한다. 나한테 뭔가를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목표부터 달성하도록 해. 올해 인사 고과는 철저히 실적만 볼 테니까 그렇게 알아. 나중에 점수 나쁘면 나를 원망하지 말고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함을 탓해. 이상.”

회의실을 나서는 직원 모두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열흘 후.

진혁이 결재판을 들고 지사장실을 찾았다.

손민한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골치가 아픈지 찡그린 얼굴로 양손 엄지로 관자노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두통약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괜찮아. 좀 지나면 나아질 거야. 우선 앉아.”

자리에 앉은 진혁은 까칠한 손민한의 안색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 모양이었다.

“모하메드 상회의 오더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래?”

반색한 손민한이 얼른 결재판을 가져다 읽었다. 열다섯 개 스타일에 총액이 120만 달러나 되었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지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무슨 소리! 네가 개척한 바이어야. 이걸 위해 밤마다 시장에 나가고 항구까지 가서 고생한 것 알아. 그럼 하반기 실적이 365만 달러로 목표치를 넘어섰군.”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무릇 상사원이라면 너처럼 그렇게 해야 해.”

손민한은 언제 두통이 있었냐는 듯 얼굴이 활짝 펴 있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이것도 알라딘 컴퍼니를 통해 진행해.”

“100만 달러가 넘습니다.”

“정부 구매 담당자가 결정을 자꾸 미루는 게 아무래도 뒷돈을 바라는 눈치야. 김 과장하고 최 대리에게도 추가 오더는 금액에 상관없이 그쪽으로 진행하라고 할 거야. 수수료는 3%로 계약해. 차액은 현금으로 받아 오고.”

2%로 비자금을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위험한 생각이긴 한데, 그만큼 사정이 다급하다는 반증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해라. 그럼 네 진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고개를 숙이고 지사장실을 나온 진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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