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9화 (19/307)

19화. 재스민 혁명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카이로의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한국으로 치면 봄 날씨였지만 더위에 익숙한 이집트인들이 느끼는 체감 온도는 한겨울이었다. 그래서 점퍼나 코트도 부족해 목도리까지 두르고 다녔다.

카이로 지사원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와이셔츠는 긴팔을 입었다.

하지만 진혁은 여전히 반팔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만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모하메드 상회의 오더 상황을 체크해야 했고, 100만 달러가 넘는 오더까지 넘어온 판이었다.

알라딘 컴퍼니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12월의 영업 전략 회의 분위기는 지난달보다 훨씬 무거웠다.

시간은 줄었는데 실적은 미비했다.

11월에 손민한이 200만 달러, 서진혁이 120만 달러, 김동식이 6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최영재는 아예 실적이 없었다.

올해 누적 실적은 2,900만 달러로 목표액에 600만 달러나 부족했다.

다들 얼굴이 어두웠다.

남은 한 달간 열심히 한다고 채워질 금액이 아니었다.

‘이제 포기해야 하나?’

손민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너스 실적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었다. 그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던 최영재가 입을 열었다.

“올해 실적을 달성할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뭔데?”

“부동산 개발 회사인 두칸이 1,000만 달러 규모의 건축 자재에 대해 재입찰 공고를 냈습니다.”

“재입찰? 설마 두칸인데 응찰자가 없었다는 거야?”

손민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칸은 이집트 최대 부동산 개발 회사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부족한 주택난 해소를 위해 카이로 인근에 신도시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사업 주체가 두칸이었다.

두칸의 회장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첫째 아들인 알리의 장인이었다.

손민한도 바이어를 통해 그쪽에 줄을 대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바쁘다는 답변뿐이었다.

“아닙니다. 3개 업체가 경쟁해 미국업체가 따냈습니다만 최종 계약이 무산됐다고 합니다.”

“이유는?”

“마지막 계약 단계에서 두칸이 인도 조건을 DDP로 고집해서 결렬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그 조건을 명시해서 공고를 했습니다.”

“끙.”

손민한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관세 지급 인도 조건(Delivered Duty Paid)은 물품을 목적지에 인도할 때까지 모든 책임을 수출업자가 지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해수의 침수나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주의에 의한 파손조차 책임에 포함될 정도로 수출업자가 지는 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미국 업체가 포기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다른 때 같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쪽 사정도 급했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구미는 당기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정보력이 월등한 미국 업체가 계약을 포기했다는 점도 신경이 쓰였다.

한참 만에 손민한이 입을 열었다.

“일단 두칸 건은 좀 더 검토해서 결정하기로 하지. 최 대리는 지금부터 모든 일에서 손 떼고 그 일에만 집중해.”

“알겠습니다.”

“김 과장과 서진혁 씨는 최대한 오더를 받아내도록 해. 얼마 남지 않았어.”

“예.”

“그럼 두 사람은 나가 보고, 최 대리는 남아.”

회의실을 나선 진혁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흔들어서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자신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쪽 일에는 베테랑들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 * *

그로부터 열흘 후.

카이로 지사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환호성이 터졌다.

“됐습니다!”

“만세!”

“축하드립니다!”

“다들 고생했어. 특히 최 대리의 공이 커.”

벌게진 얼굴로 축하 인사를 받은 손민한이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최영재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두칸의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날은 당연히 회식이었다.

카심과 소마야도 자리해 기쁨을 같이했다.

단번에 지사 목표 실적을 뛰어넘었다. 일주일 만에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실적이 좋으니 사무실 분위기도 좋았다.

최영재의 거드름 피우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지사 실적에 따라 연말 인센티브가 달라진다. 모든 지사원이 두칸의 오더에 매달렸다.

진혁은 오랜만에 김동식과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며 쉬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과장님.”

“고생했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은 것도 아니고.”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지사 목표가 달성돼서 기분은 좋네요.”

진혁이 웃으며 시원하게 캔을 비웠다.

야근까지 하며 매달린 끝에 두칸의 물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부산항을 출발했다.

기분이 좋아진 손민한이 내일은 오후에 출근하라고 했다.

하지만 김동식은 툴툴거렸다.

“너야 개인 목표를 채웠지만 난 내 일을 못 했어. 최 대리 실적만 채워 준 거지.”

“어떻든 최 대리님이 제안해서 성사된 일이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냉정히 따지면 두칸은 지사장님 영역이야. 최 대리는 진급 케이스도 아니고. 이럴 때는 나를 밀어 줘야지. 실적 채우지 못하면서 보고 때도 안 따라갔다며 쫄 때는 언제고, 이제 둘이 딱 붙어다니더만.”

입이 한 자나 나온 김동식의 모습에 진혁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실적과 진급에 목매다는 직장인의 비애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진혁이 새 캔을 따서 일부러 힘차게 부딪혔다.

“연말 인센티브 받는 거로 기분 푸세요. 지사 실적 좋은 데다 연차가 있는데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요.”

“그건 그래. 이번에도 진급 안 시켜주면 절대 가만 안 있을 거야. 수틀리면 나가서 오퍼상 차리면 돼.”

진혁은 김동식의 허풍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나도 그랬지…….’

* * *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좋은 게 있었다. 손민한이 더 이상 실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추가 오더도 내년으로 넘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올해 더 해서 칭찬 한마디 듣는 것보다는 내년에도 목표를 채워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그래도 준비는 해야 했다.

알라딘 컴퍼니 사무실에서 낮에 받은 여름 재고품에 대해 정리했다. 가리 사장이 벌써부터 재촉하고 있었다.

핫산과 카심도 열심히 서류와 씨름했다.

카이로 지사로부터 넘어온 오더 규모가 1,500만 달러를 넘었다. 100만 달러 이상의 거래까지 받아서 규모가 급격히 커진 것이다.

그에 따른 서류를 맞추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띠릉, 띠릉.

그때 핫산의 핸드폰에서 문자 메시지 알림 소리가 울렸다.

내용을 확인하던 핫산이 갑자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어!”

“뭔데 그래?”

평소의 과묵한 행동과 달리 핫산의 입에서 격한 소리가 나오자 카심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갔다.

“이거 좀 봐.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릴 수 있냐고!”

“이런, 씨! 완전 개자식들이잖아!”

카심도 함께 흥분할 때 진혁이 그들의 뒤에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경찰이 시위대를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리며 진압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시위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사람들에 의해 들려 나가는 모습이 계속 방송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핫산이 핸드폰을 조작하자 새로운 영상이 재생됐다.

“어, 어, 어…….”

“으음…….”

같이 보던 진혁은 입에서 침음을 흘리며 시선을 돌려야 했다.

한 청년이 몸에 휘발유를 붓더니 불을 붙였다.

분신 장면이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재빨리 외투를 벗어 불은 껐지만, 시커멓게 탄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더 참혹했다.

영상은 끝났지만 다들 말을 잊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카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이거 사실 아니겠지?”

“여기 기사가 있어. 잠시만.”

핫산이 다시 핸드폰을 조작해 기사를 읽었다.

이후 핸드폰은 카심을 거쳐 진혁에게까지 왔다.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튀니지의 지방도시에서 이틀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경제난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이 경찰의 노점 단속에 걸려 모욕을 당하고 청과물과 수레를 모두 빼앗기자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이 사실을 SNS를 통해 알리고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경찰이 강제 진압을 하면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정신이 든 핫산이 빠르게 핸드폰을 조작했다.

“사실을 알려야 해. 죄 없는 젊은이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돼.”

“맞아. 나한테도 보내. 나도 아는 사람들한테 보내야겠어. 이런 썩어빠진 정부하고 경찰 놈들은 가만두면 안 돼. 시민들의 무서움을 보여 줘야 해.”

격분한 카심까지 합류해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소식을 퍼 날랐다.

정신없이 핸드폰을 조작하는 두 사람과 달리 소파에 앉은 진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재스민 혁명. 그리고 이어진 아랍의 봄.’

바보같이 이제 기억이 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튀니지만의 문제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SNS를 통해 퍼진 그 소식은 독재 정권과 경제난, 높은 실업률에 고통 받는 인근의 나라들로 하여금 반정부 투쟁에 나서게 만들 것이다.

이는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과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의 붕괴를 가져오고, 중동 전체를 혼란으로 빠트리는 도화선이 된다.

거기까지 기억한 진혁이 허겁지겁 가방을 챙겼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정신 나간 표정의 진혁이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지만, 핸드폰에 푹 빠진 두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준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다. 새해가 밝자마자 이집트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지?’

진혁의 고민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이곳 사막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이미 마음먹었다. 그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이전처럼 포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희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마음먹자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마침 창문으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 * *

웬일로 일찍 출근해 있던 소마야가 벌건 눈으로 출근한 진혁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어제 못 주무셨어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오늘 커피는 제가 탈게요. 좀 쉬어요.”

“진하게 부탁합니다.”

얼마 후 소마야가 에스프레소를 가져다줬다. 독한 커피 맛에 혀가 얼얼해졌다. 그래도 정신은 맑아졌다.

“미스터 서, 튀니지 동영상 봤어요?”

“봤습니다. 혹시 소마야도?”

“봤어요. 그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요. 제 동생이 그 또래인데 취직이 안 돼 알지자에서 노점을 하고 있거든요. 그 애와 동생 얼굴이 겹쳐서…….”

소마야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진혁이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잠시 후, 진정되는지 울음을 멈춘 소마야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 아직 살아 있다는데 괜찮겠죠? 우리나라와 제 동생에게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겠죠?”

“괜찮길 기도해야죠.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동생에게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하세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요? 설마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요?”

“앞일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진혁이 아차 하고 한발 물러섰지만 소마야는 더 적극적이었다.

“한국 본사에서 무슨 이야기 있어요? 김 과장이 한국 본사의 정보력은 정보부보다 뛰어나다고 했어요.”

“그런 일 없어요. 걸려 오는 전화는 소마야가 먼저 받잖아요.”

“그러지 말고 아는 게 있으면 제발 알려 주세요, 네?”

“혹시 그런 정보가 있으면 김 과장님이나 저나 평소처럼 출근하겠습니까?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본사에서 무슨 연락이 오면 소마야에게 제일 먼저 알려 드릴게요.”

“약속했어요?”

“네, 약속합니다.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이니 얼른 자리로 돌아가세요.”

진혁은 소마야를 서둘러 돌려보냈다.

직원들이 차례로 출근했다. 당연히 화제가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었다. SNS 위력이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사무실뿐만 아니었다. 길거리에서도 두 사람만 만나면 그 이야기였다. 시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회 전체가 붕 떠 있는 느낌.

폭풍 전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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