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폭탄 돌리기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서진혁 씨, 잠깐 보지.”
최영재가 한마디 하고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업무 수첩을 챙겨서 일어난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고품 문제로 껄끄러운 관계가 된 이후 서로 개 닭 보듯이 하며 지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회의실로 들어가자 최영재가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앉아.”
앞에 앉았는데도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자 진혁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좀 봤어,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서.”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별로였다.
“일단 축하해.”
“……?”
“대리 진급 말이야.”
“아직 발표도 나지 않았잖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어. 그게 인맥이라는 거지. 대리부터는 중간 관리자야. 사원 때랑은 다르지. 밑에 직원들보다는 상사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위치가 되는 거지.”
진혁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무수히 들었던 이야기였다.
심드렁한 진혁과는 달리 최영재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난 한국으로 돌아간다.”
“본사로 가시는 겁니까?”
“그 정도면 여기 그냥 있지.”
“그럼?”
“그룹으로 들어간다.”
“그룹으로 말입니까?”
진혁은 놀란 표정으로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본사로만 가도 영전이라고 하는데, 계열사를 총괄하는 그룹으로 간다면 금의환향이라 부를 만했다.
“너도 요즘 그룹에서 계열사로 지침이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알 거야.”
“알고 있습니다.”
“좀 더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계열사별로 전문 인력을 차출했어. 내가 물산 대표로 뽑힌 거고.”
최영재가 친하지 않은 자신을 부른 건 지 자랑을 하고 싶어서였다.
진혁은 거기에 동조하고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진혁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최영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은 대체 뭐야?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알아서 기어야 하는 거 아냐?’
그는 지난번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강일 뒤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따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기를 눌러 주려고 했는데 반응이 영 아니었다.
진혁이 생각난 듯 물었다.
“김 과장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미역국이지. 실적이 안 되잖아?”
“그렇군요.”
급격히 어두워지는 진혁의 모습에 최영재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맺혔다.
“너한테도 진급 안 되면 때려치우겠다고 했나 보구나?”
“그래서 걱정입니다.”
“걱정은 무슨.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얼굴이 확 펼 거다.”
“설마요.”
“넌 왜 돌아왔는데. 젯다 지사에서 그 난리를 치고.”
“……!”
“결국 네 스스로의 한계를 느껴 조직으로 다시 돌아온 거잖아. 김 과장님은 너보다 훨씬 조직 생활을 더 했어. 그런 사람이 이 좋은 회사를 나갈 수 있겠어? 나가 봤자 자기만 춥다는 걸 아는 거지, 너처럼.”
마지막 말에 진혁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영재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마음을 감추고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젊은 혈기만 앞세웠다가는 결국 자신만 피해를 입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을 알 정도로 살아 봤다.
최영재는 그런 진혁의 태도를 자신의 말에 동조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더욱 거만하게 말했다.
“회사는 정해진 시스템으로 움직여. 우리는 그 시스템의 일부분일 뿐이고. 중요한 부품이 될지 아니면 한 번 쓰고 버릴 소모품이 될지 선택당할 뿐이지. 살아남으려면 선택권자가 누구인지 잘 파악하고 행동해야 해.”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한국에 오면 한번 찾아와.”
“그러지요.”
“이제 나가 봐. 난 좀 쉴게.”
회의실을 나가는 진혁의 주먹은 더 꽉 쥐어져 있었다.
그날 오후 본사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먼저 지사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가 결정됐다. 카이로 지사는 중간 성적으로 400%가 지급된다는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인사 발령 내용이었는데 최영재의 말대로 적혀 있었다.
최영재 대리가 그룹으로 발령 나고 진혁도 대리로 진급한다고 되어 있었다.
당연히 김동식의 이름은 없었다.
퇴근 후 한인 식당에서 송별회가 열렸다.
내일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나면 최영재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손민한이 최영재부터 잔을 채웠다.
“축하해, 최 대리.”
“첫 잔은 진급한 서 대리가 받아야지요.”
“무슨 소리. 그룹에 발탁된 거는 진급보다 더 축하할 일이지. 앞으로 잘 부탁해.”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말과는 달리 최영재의 얼굴에는 거만함이 가득했다.
그걸 아는 손민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성질대로 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서진혁 차례였다.
“서 대리도 축하해.”
“감사합니다. 모두 지사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내년에도 잘해 보자고. 이제 진급도 했으니 책임이 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잔을 비우며 김동식의 눈치를 봤다. 최영재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으나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표정이 편안했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손민한과 최영재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사이 진혁이 김동식에게 잔을 내밀었다.
“과장님, 고맙습니다. 정식으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축하해. 내년에도 잘해 보자고.”
‘그럼 최영재 말대로 계속 남아서 근무한다는 것인데…….’
머뭇거리는 진혁의 모습에 김동식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술 취해서 한 이야기를 아직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
“최 대리 업무를 내가 맡기로 했어. 지사장님도 내년에는 확실히 밀어 준다고 해서 일 년 더 있어 볼라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도 과장님이 계신다니 든든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일부러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인수인계를 했다.
최영재 대리의 업무를 김동식 과장이 맡기로 되어 있어서 진혁은 김 과장이 관리하던 바이어를 넘겨받았다.
“그럼 제 업무는 새로 오는 직원에게 넘기면 됩니까?”
“어. 근데 신입 사원이야.”
김동식의 말에 진혁의 얼굴이 당장 찌푸려졌다.
신입 사원이라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일을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르치기까지 해야 했다.
그 말인 즉, 일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감수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가르쳐서 잡무를 넘겨야지.’
하지만 진혁은 이어지는 말을 듣고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달간 연수를 하고 2월에 합류한대.”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최 대리님 발령도 늦췄어야지요.”
“공항에 나가 잡아오든지. 아직 비행기는 안 떴을 거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김동식이 딱 그런 경우였다.
최영재는 뭐가 그리 급한지 오늘 출근할 때 짐까지 싸 와서 인수인계를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출발했다.
진혁은 결국 한 달 간 두 사람 몫을 해야 했다.
다음 날은 크리스마스였지만 출근을 해야 했다. 이슬람 국가는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연휴를 즐기고 있을 최영재가 처음으로 부러웠다.
통장에 찍힌 인센티브 금액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 * *
새 해를 맞는 이집트 국민들의 표정에서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안과 초조.
수시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튀니지의 상황과 분신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소식이 궁금했다.
진혁도 전년도 실적을 수합해서 발표 자료를 만드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페이스북은 꼭 확인했다.
그렇게 튀니지 국민들은 물론 이집트, 중동의 여러 나라와 해외에서 SNS에 접속하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끝내 부아지지의 사망 소식이 올라왔다.
마주치는 시민들의 눈빛에서 초조함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분노가 차지했다.
그날 저녁,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속속 타흐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진혁도 그 자리에 있었다.
“키파야!”
시위대가 외쳤다.
‘키파야’는 아랍어로 ‘충분하다’는 말이었다. 30년 장기 집권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의미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 분명한 반정부 구호였다.
진혁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음 날, 회의실에서 영업 회의가 열렸다.
손민한과 김동식이 전년도 사업 실적 보고를 위해 오늘 밤 한국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는 보고서를 작성한 진혁이 보조자로 따라가야 했다. 그런데 김동식이 자신에게 양보해 달라고 부탁해서 그렇게 되었다.
상반기와 달리 목표를 달성해서 혼날 일이 없었다. 임원들에게 얼굴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기간도 지난번과는 달리 일주일이었다.
“다른 일은 없고, 한 가지만 신경 쓰면 돼. 두칸의 물품이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있는 것은 알지?”
“아직도요? 지난주에 도착했으니 이미 끝났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칸 오더는 작년 말 실적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없이 수입 통관 절차까지 책임지는 관세 지급 인도 조건으로 계약한 1,000만 달러짜리 대형 계약이었다.
그 실적으로 진혁은 대리가 되었고, 최영재는 그룹으로 영전해 귀국했다.
지사원들도 인센티브를 받았다.
지난주 회의 때 화물선이 잘 도착해서 물건까지 넘겨 끝난 줄 알았다.
“모든 서류를 다 갖춰서 수입 신고서를 제출했는데 수입신고필증이 아직 안 나오고 있어. 담당자는 기다리라고만 하고. 이집트 공무원 일 처리가 그렇지, 뭐. 너도 잘 알잖아.”
“으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건축 자재라 항구에 오래 두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네가 하루에 한 번씩은 찾아가 봐. 수입신고필증만 남았으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거야.”
김동식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이야기했다.
평상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밖에 없는 시국이었다.
“지사장님, 어젯밤 타흘리 광장에서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랬어? TV에서 그런 이야기는 없던데.”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진혁은 이집트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을 알렸다.
손민한이 입을 열기 전에 김동식이 먼저 나섰다.
“튀니지? 거긴 아프리카잖아?”
“북아프리카로 분류되고 있지만 리비아, 이집트까지는 중동으로 봐야 합니다.”
“아무튼 아프리카에서 시위와 내전은 일상이야. 매일 일어나잖아. 좀 지나면 잠잠해질 거야.”
“이번은 상황이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보조금이나 좀 올려 주면 금방 잠잠해 질 거라니까.”
너무도 태평스러운 반응에 진혁은 화가 났다.
막 뭐라고 하려 할 때 손민한이 나섰다.
“혹시 어디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건 없습니다만, 저도 그 자리에 가 봤습니다. 시위대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으으음.”
손민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시위는 일어난다.
하지만 특징이 있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통치권자에게 해결을 요구하지, 직접 겨냥하지는 않는다.
그때 김동식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다고 무바라크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3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야. 게다가 뒤에 미국까지 있어. 큰일 없을 거라니까.”
“하지만…….”
“너 대신 내가 가는 것이 기분 나빠서 이러는 거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시위 한 번 일어났다고 매년 하던 본사 보고에 안 갈 수도 없잖아. 하기 싫으면 그냥 놔둬.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내가 돌아와서 해도 돼.”
“아닙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계속 가 보겠습니다.”
김동식의 연이은 추궁에 진혁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만은 없었다.
지금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해 봐야 믿기는커녕 오해만 깊어질 뿐이었다.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날짜라도 알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 없었다.
하긴 그 날짜를 30년 뒤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일주일간 아무 일 없기를 바랄뿐.
손민한이 정리했다.
“나도 두칸 건을 두고 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어.”
“압니다.”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전화하고. 나도 본사에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좀 알아볼게. 일주일이야. 그동안만 고생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