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사전 준비
관세청 입구는 여전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신분을 말한 뒤 바로 통과해서 현관으로 가자 다르위쉬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빕 청장이 보고 싶어 한다고 했었다.
함께 청장실로 들어갔다.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나서 밀항 과정에 대해 얼마간 대화를 나누던 라빕이 은밀한 시선으로 물었다.
“믿을 만하던가?”
“누굴 말씀하시는지요?”
“이번에 자네를 밀항시켜 준 자 말이야.”
“돈만 쫓는 자인데 믿음이 있을 리가 없지요. 이번에도 제가 어설퍼 보였으면 가방도 빼앗고 바다에 수장했을 겁니다.”
진혁이 일부러 딱 잘라 말하고 입을 닫았다.
전화를 받고 오면서 생각했었다.
거래가 끝나 다시 볼일이 없는데 이렇게 은밀히 부른 건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밀항에 대해 물을 때 대충 감이 왔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하수였다.
예상대로 얼마 못 가 입맛을 다시던 라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돈을 많이 주면 되지 않겠나?”
“그건 오히려 생명을 단축하는 길이지요.”
“왜 그렇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을 옮긴다는 걸 스스로 알려 주는 일이니까요.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돈은 돈대로 챙기고 물건은 물건대로 빼앗을 수 있으니 살려 보내 줄 리가 없지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군.”
아쉬움이 가득한 라빕의 모습에 진혁은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더 미적거리면 다른 방도를 찾을지도 몰랐다.
딴 맘 먹지 못하게 잡아 둬야 했다.
“그래서 제가 안전한 루트를 개척해 볼까 합니다.”
“그래?”
“이번 일을 하면서 청장님과 저처럼 어쩔 수없이 몰래 출국해야 하는 딱한 처지인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국이 이래서 당장 일거리가 없다 보니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생각해 낸 겁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느라 이리저리 빙빙 돌려 말했지만 결국 밀수 사업을 직접 해 보겠다는 말이었다.
불법 거래를 막고 감사하는 게 주 임무인 관세청장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이놈이 제대로 돈독이 올랐구나.’
속으로 생각한 라빕이 짐짓 모른 척하고 오히려 맞장구를 쳐 줬다.
“자네 말이 맞아. 폭도 놈들은 우리가 마치 무슨 부정 축재나 한 것처럼 떠들지만, 머리가 터지도록 공부하고 공무원으로 들어와 열심히 일해서 당당하게 모은 재산들이지.”
“당연합니다. 그게 잘못됐다고 하면 누가 열심히 살겠습니까. 같이 굶어 죽자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고를 가진 젊은이를 만났군. 좋은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죽이 잘 맞았지만 완전 개소리들이었다. 그래서 옆에서 듣고 있는 다르위쉬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기에 속으로만 쌍욕을 했다.
라빕이 말했다.
“그런 좋은 뜻으로 일을 벌이겠다면 내가 적극 도와주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생각만 있지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습니다. 준비되면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개?”
“제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광고를 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건 걱정 말고 제대로 된 루트나 확보해.”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다르위쉬를 통해 연락하겠다고 하고 관세청을 나왔다.
* * *
다음 날 아침, 사무실의 문을 연 카심은 인상부터 찌푸렸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책상 위의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얼른 창문부터 열었다.
그 소리에 깼는지 소파 위에서 자고 있던 진혁이 일어났다.
“아함. 지금 몇 십니까?”
“8시요. 또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잔 거요?”
“가면 뭐 합니까. 카심 씨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얼른 장가를 보내버리든지 해야지. 커피 내려올 테니까 씻기나 해요.”
투덜거리며 탕비실로 가려는 카심을 진혁이 얼른 막았다.
“커피는 제가 내릴 테니 공항 상황부터 알아봐 주세요.”
“공항은 또 왜요?”
“출국할 수 있는 비행 편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언제 갈려고요?”
“가능한 빨리. 도착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터키 항공밖에 운항을 안 하는데요, 뭘.”
“오실 때 요깃거리도 부탁합니다.”
“알았수다.”
카심이 나가자 진혁은 일어나 일단 씻기부터 했다.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며 어제 정리한 자료를 보고 있자니 카심이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코샤리 한 접시가 50파운드라는 게 말이 됩니까.”
카심이 봉투에서 일회용기에 든 음식을 꺼내 놓았다.
코샤리라는 이집트식 비빔밥이었다.
병아리콩과 렌틸콩, 마카로니, 쌀 따위에 튀긴 양파와 토마토소스 등을 올려 비벼 먹는, 이집트인이 즐기는 점심 메뉴였다. 시위 전에는 많이 올랐다고 해도 10파운드 정도였다.
배고팠던 진혁이 얼른 뚜껑을 열고 섞어 가며 물었다.
“그렇게 많이 올랐답니까?”
“재료가 공급되지 않아 어쩔 수 없다고 합디다. 이것도 아는 사람이라 겨우 얻어 온 겁니다. 메다메스가 20파운드라고 하니 깎아 달라는 말도 못 했습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풀 메다메스(Ful medames)는 넓적한 누에콩을 뭉근하게 끓여 죽이나 소스처럼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 둥글납작한 빵 에이쉬를 찍어 먹는 음식으로, 이집트인에게는 한국의 김치 같은 필수 음식이었다.
그게 열 배 가까이 올랐다니 시민들이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느껴졌다.
“공항에 간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오전 비행기는 떠났고, 오후 2시에 한 편이 있다고 합디다.”
“예약이 가능하다고 하던가요?”
“예약은 무슨. 그냥 오면 바로 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빠져나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서 손님도 별로 없어요. 곧 운행이 중단될 거라는 말까지 하던데요. 공항이 아주 한산했어요.”
“잘됐군요. 준비하세요.”
“나까지 가자고요?”
“싫으면 마시고요. 해외 출장비가 쏠쏠한데…….”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요. 어서 준비해서 갑시다.”
돈 이야기를 듣자마자 카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서둘렀다.
덕분에 카이로 공항에 넉넉하게 도착했다.
장갑차가 입구를 지키고 곳곳에 총을 든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여전했다.
카심의 말대로 공항 안은 한가했다.
가벼운 가방 하나만 든 진혁이 다가가자 심사대에 앉아 있던 군인이 날카로운 눈초리 여권을 훑어보고 물었다.
“한국인이 아직 남아 있었네요.”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장입니다. 이곳에 제 일터가 있는데 어딜 가겠습니까.”
“맞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다들 도망치더군요. 출국 목적이 뭡니까?”
“본사에서 회의가 있어서 참석차 가는 길입니다.”
“그럼 한국으로 가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잘 다녀오시오.”
바로 비행기 표와 여권을 돌려받았지만 카심은 아니었다. 그를 상대한 군인은 마치 취조하듯 질문하고 있었다.
진혁이 그쪽으로 가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당신은 뭐야?”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장입니다. 카심 씨는 우리 회사 정식 직원입니다.”
“이자는 출국할 수 없어. 그러니 당신만 나가.”
군인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지만 진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유가 뭡니까?”
“할아버지가 경찰관이었어. 그쪽 출신들은 출국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어.”
“아버지께 그 말씀은 들었지만, 그게 문제가 될지는 몰랐습니다.”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카심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황은 이해가 됐다. 지금까지 무바라크를 지키며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온 것은 경찰 조직이었다.
반대로 군부는 시민 편이었다.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경찰들도 동요하며 일부는 시위대에 동참하고 있었다.
일부 경찰 간부들이 책임 추궁이 무서워 국외로 탈출할 수 있다는 첩보에 군에서는 그들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훨씬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직업까지 들먹이며 막는 것은 아니었다.
진혁이 심사대의 군인을 노려봤다.
“두 세대 전의 일입니다. 그런 황당한 이유로 출국을 막는다면 대사관에 공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이봐, 지금 협박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입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쪽에서 이 나라와 이집트 국민을 위해 일하는 기업을 압박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이자가……!”
“거기 뭐야?”
군인이 소리치는 순간 뒤에서 호통과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다가왔는데 맨 앞에 선 자의 어깨에 별이 달려 있었다.
“어엇! 소장님. 충성.”
심사대의 군인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카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장 야무드는 덩치가 작고 키도 크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눈초리에 품어나는 위엄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무드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군인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장 서진혁입니다. 본사에 회의가 있어 직원과 함께 다녀오려는데 안 된다고 합니다.”
진혁이 재빨리 먼저 말하자 야무드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느낀 군인이 얼른 변명을 했다.
“조부가 경찰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습니다. 조사가 필요합니다.”
“미안하게 됐군. 조사를 받은 다음에 문제가 없으면 보내 줄 테니 그렇게 알고 기다리게.”
돌아서려던 야무드는 이어진 진혁의 말에 몸을 멈춰야 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이번 회의에 카심 씨가 반드시 가야 합니다. 그러니 선처해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진혁의 뒷머리를 야무드가 내려다봤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져 반항하면 현장에서 즉결 처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반발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고개를 든 진혁이 자신을 노려보는 야무드를 지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아시겠지만 다른 상사원들은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았습니다. 장군님 같은 분이 계셔 조만간 정국을 안정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사에서는 과장된 외신 보도만 듣고 무조건 철수하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심 씨가 직접 가서 이곳 상황을 증언하려는 겁니다.”
“…….”
“한번 철수하면 사태가 진정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건 이집트 경제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조사가 필요하다면 돌아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반드시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야무드가 갈등하는 사이, 뒤에서 진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부관이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혹시 지난여름에 다합의 다하브 리조트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거기로 휴가를 다녀오긴 했습니다만.”
“아이고, 선생님!”
부관이 당장 다가와 손을 잡았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태세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야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제드 대위, 무슨 일인가?”
“헉! 죄송합니다, 소장님.”
“무슨 일인지 묻지 않나?”
“이분이 제 딸을 살려 주신 바로 그 은인이십니다.”
“응급조치만 하고 사라졌다는 사람 말인가?”
“맞습니다. 그렇게 찾았는데 여기서 뵌 겁니다.”
마제드 대위가 흥분한 목소리로 답을 이었다.
야무드도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진혁은 그제야 사내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하임리히법으로 살린 어린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진혁이 반색하며 물었다.
“아, 이제 기억납니다. 아이는 괜찮았습니까?”
“의사가 응급조치를 잘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름이 세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다행입니다.”
“세스히티입니다. 집사람뿐만 아니라 아버님도 선생님을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세스를 유독 귀여워하시거든요.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한다면서.”
“아닙니다. 아이가 무사했으면 됐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선생님을 찾았는데 이미 떠나신 후였고, 성함도 몰라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보내 드리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제가 급히 출국을 해야 해서요. 돌아오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연락 주셔야 합니다.”
“꼭 돌아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무드가 아직도 그대로 서 있는 군인에게 말했다.
“이자의 자료를 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