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상륙 주정, LCU
카심의 자료를 잠시 살펴보던 야무드가 간단히 말했다.
“보내 줘.”
“……알겠습니다.”
카심이 여권과 항공권을 돌려받는 사이 야무드가 진혁을 바라봤다.
“한국의 지사장이라고?”
“네. 태후물산의 카이로 지사장 서진혁입니다, 장군님.”
“마제드에게 한 약속을 지키리라 믿네. 그리고 세스를 구해 준 것은 나도 고맙네.”
“감사합니다. 꼭 함께 돌아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야무드와 마제드에게 차례를 인사를 하고 진혁은 카심과 함께 당당한 걸음으로 출국장의 검사대에서 섰다.
검사는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가져간 짐이 없는 데다 딱히 문제 될 게 없으니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카심의 추궁에 휴가 때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다.
“미스터 서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아이의 아빠가 딱 맞춰 나타난 것도 신기하네요.”
“그러니까 평소에 덕을 쌓고 사셔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듣고 보니 기분 나쁘네요. 평소에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들리는데.”
“그렇게 들으셨다면 어쩔 수 없고요.”
“뭐요?”
“어이쿠, 탑승 시간입니다. 갑시다.”
진혁이 얼른 말하고 도망쳤다.
* * *
이스탄불 공항에서 바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공항 밖으로 나오자 낯익은 사내가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그냥 호텔에서 기다리시지 뭣 하러 나왔습니까.”
“아는 사람도 없이 지루하게 지내던 참이라 나온 겁니다. 움직이면 차가 필요할 것 같아 대절도 해 뒀습니다.”
“준비성이 철저하군요. 두 사람은 서로 아시지요? 앞으로 함께 일할 것이니 서로 인사부터 하시죠.”
“바라캇입니다.”
“카심이오.”
비행기 안에서 진혁의 계획을 들은 터라 카심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바라캇은 사우디아라비아서 탔던 벌크선의 선장이었다. 진혁은 쉬는 두 달 동안 임시로 고용했다고 했다.
물론 임금을 두 배로 주기로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바라캇을 따라 차로 가자 작은 체구의 아랍인이 운전석에 나와 인사를 했다.
“레자라고 합니다.”
“제 배의 기관사였던 친구입니다. 설비에 대해서는 모르게 없어, 이번 일에 꼭 필요해서 데려왔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레자가 당황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선주가 일개 선원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함께 차를 타고 인근의 이비스 키예프 호텔에 들어섰다.
예약된 호텔 방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진혁이 물었다.
“알아보란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원하시는 배는 세 척이 나왔습니다. 이게 이번에 매각될 함정의 리스트입니다.”
바라캇이 건네준 종이에는 30여 척의 함정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세 곳에 붉은색 표기가 있었다.
하루밖에 일찍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도 많은 것을 알아봤다.
“배 상태는 어떻던가요?”
“선령이 20년 이상들이라 아무래도 많이 낡아 있었습니다.”
대답은 레자가 했다.
“그 정도로 안 좋던가요?”
“그래도 나름 관리가 잘되어 있어 엔진 소리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선체가 워낙 낡아 장거리 항해는 무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긴 항해를 할 것은 아니고 한두 달 정도만 운항할 것이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달라고 하던가요?”
이번에는 바라캇이 답했다.
“20만 달러를 부르는데,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알아보면 그 가격에 팔겠다는 더 좋은 배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곧 돈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여기서 끌고 가야 합니다. 면담 요청을 했습니까?”
“내일 오전에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죠.”
호텔 식당은 한산했다.
우크라이나는 경제 위기로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고 있었다.
IMF가 요구한 재정 적자 축소를 위해 연금제도 개혁, 국영 기업의 매각, 공공요금의 인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유럽의 경제 위기에 그간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러시아도 자국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한동안 내일 면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진혁이 바라캇만 데리고 해군 본부로 가서 신분을 밝히자 담당자에게 안내되었다.
“알라딘 컴퍼니의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요르게 소령입니다. 한국인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요르게는 건강한 체격이었지만 외모는 동양인이었다.
진혁의 생각을 읽었는지 요르게가 먼저 말했다.
“내 외조모님이 조선에서 건너오신 분이셨소.”
“그러시군요. 이렇게 동포분을 뵈니 반갑습니다.”
진혁은 일부러 크게 반기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요르게는 만만치 않은 듯 금방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요르게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중형 상륙 주정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몇 척이나 구매할 생각이오?”
“한 척입니다.”
“그렇군요.”
요르게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 퇴역이 결정된 중형 상륙 주정은 세 척이었다.
상륙 주정, LCU(Landing Craft Utility)는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이 처음 선을 보였다.
당시 태평양 전선의 전투는 상륙 작전이 빈번했는데, 기존의 수송선은 부두가 있어야만 접안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해안에 바로 올라설 수 있도록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상륙 주정을 만들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매각가가 20만 달러라는 것은 알고 있죠?”
“그거야 귀국의 희망 사항이지,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 가격 협상을 하자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인 요르게와 달리 진혁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얼마간 화를 억누른 요르게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얼마를 생각하고 있소?”
“5만 달러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헐.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거요?”
어처구니없어하는 요르게의 눈을 보며 진혁이 똑똑히 이야기했다.
“5년 전에 한국의 한 기업이 러시아의 퇴역함 29척을 구매했는데, 그때 중형 LCU 가격이 10만 달러였습니다.”
“그거야 이미 폐선 직전인 고철 가격만 받은 거니 그런 것이지. 그런 고철도 10만 달러였는데 5만 달러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때 거래됐던 것이 지금 내놓은 것과 같이 시기에 건조된 함정들이었습니다. 5년이나 더 사용했으니 당연히 그에 따른 감가상각 비용을 고려하셔야지요.”
“아무리 감가상각을 고려한다고 해도 절반이나 후려치는 법이 어디 있소?”
“그것도 그것이지만 당시와 달리 지금은 세계 경기 위축으로 고철 가격이 바닥입니다. 이런 사정도 감안해 주셔야지요.”
“끙.”
냉철한 진혁의 분석에 요르게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터트렸다.
자신들도 그래서 이번 매각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여기서 팔지 못하면 모두 고철로 넘겨야 하는데, 그러면 진짜 똥값이었다.
요르게가 수정 제안을 내놓았다.
“좋소. 10만 달러로 합시다. 그 이하는 절대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적정가격은 5만 달러입니다.”
“그 가격이라면 그냥 차라리 몇 년 더 운행하다가 고철 가격이 오를 때 팔겠소.”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저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활용 가능성이 전혀 없어 지난해에도 출동 횟수가 한 번도 없던데.”
“……!”
“구제 금융을 받고 있는 귀국이 항구에 정박만 하고도 들어가야 할 유지 비용을 계속 부담하실 수 있으신지요?”
진혁의 지적은 IMF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무너지면서 냉전 시대가 종식되자 상륙 주정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평저선인 LCU는 속도가 느리다. 기동성이나 내파성도 좋지 않은 데다, 장애물 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에서만 사용 가능하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성능이 개선된 LSD나 LPH 같은 강습 상륙함에 밀려 사라지고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운항할 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요르게가 한숨을 쉬며 인정했다.
“다 알고 온 것 같으니 부인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 가격으로는 도저히 승인을 받을 수 없소. 미안하지만 인연이 아닌 듯하오.”
“물론 꼭 5만 달러만 고집하려는 건 아닙니다.”
서류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던 요르게는 진혁의 말에 희망 섞인 급히 눈빛으로 물었다.
“더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겁니까?”
“많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조금 더 낼 용의는 있습니다.”
“얼마까지 가능합니까?”
요르게는 어느새 매달리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의 외환 사정이 좋지 않아 상부로부터 이번 계약을 반드시 성사시키라는 압박이 심한 상태였다.
진혁이 역으로 질문했다.
“서로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끝장을 보죠. 얼마면 위에서 승인해 줄 것 같습니까?”
“……8만 달러면 가능할 것 같소.”
“차이가 3만 달러군요. 좋습니다. 최종 금액은 소령님께 맡기지요. 8만 달러 이하로 결정되면 그 차액의 반을 대위님께 따로 드리겠습니다.”
“음…….”
생각에 빠진 요르게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제안에 대한 득실을 따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진혁은 먼저 나서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얼굴을 굳힌 요르게가 말했다.
“좋소.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하오.”
“저는 약속을 목숨보다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러니 윗분들을 설득하시기만 하십시오.”
“알겠소. 내가 나중에 호텔로 찾아가리다.”
악수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최종적으로 구매할 함정을 결정하러 카심과 함께 다녀온 레자의 보고를 받았다.
“U307이 가장 좋습니다.”
“그럼 그 배로 하기로 하지요. 수고했습니다.”
용건이 끝났는데도 머뭇거리는 레자의 행동에 진혁이 물었다.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세 척 중에 좋다는 것이지, 상태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퇴역함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압니다만, 배라는 게 덩치와 달리 예민한 놈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멈춰섭니다. 이미 단종된 지 오래된 터라 고장이라도 나면 수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혁도 레자의 우려를 모르지 않았다.
돈만 많으면 새 배로 구매하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니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진혁의 고심이 길어지자 레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혁의 진심이 담긴 말에 굳었던 레자의 표정이 풀어졌다.
요르게는 그날 저녁에 바로 호텔로 찾아왔다.
다른 이들을 내보내고 둘만 남자 요르게가 입을 열었다.
“달러로 지급하는 조건에 6만 달러면 팔라고 합니다. 정말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금액에 딱 맞습니다.”
진혁이 웃으며 치하를 해 줬다.
그는 7만 달러 정도로 예상했는데, 반을 자신이 가져갈 수 있으니 요르게가 필사적으로 설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요르게가 말했다.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씁시다.”
“알겠습니다.”
“……내 몫은?”
“계좌를 알려 주시면 이전과 동시에 만 달러를 보내드리지요.”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요르게의 최종 결정에 진혁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진혁이 말을 꺼냈다.
“보통 군에서는 모든 장비에 대한 예비 부품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나머지 두 척은 운행하지 않고 퇴역될 테니 예비 부품을 쓸 일이 없겠네요.”
“지금 예비 부품까지 끼워 달라는 말이오?”
“그냥 버리기는 아깝잖습니까? 돈을 드리고 싶지만 저희가 준비한 예산이 딱 소령님께 드릴 것까지밖에 안 돼서요.”
진혁은 할 말 다했다는 듯 입을 닫고 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