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지니호 출항
“헐!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
“그 정도는 소령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알았소. 계약서에 예비 부품도 포함시키는 것으로 합시다.”
요르게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만 달러를 받으면 뭘 할지 계획을 다 세워 놓았는데 그깟 폐기 처분할 물품 때문에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의 요르게가 돌아가자 다른 방에서 마음 졸이고 있던 카심 등이 바로 들이닥쳤다.
결정을 알리자 다들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다음 날, 진혁은 바르캇과 함께 해군 본부에서 중급 수륙 주정 U307에 대한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은행으로 가서 우선 계약금 6,000달러를 선입금했다.
호텔로 돌아온 진혁은 룸서비스로 샴페인과 음식을 시켰다.
“우리들의 귀한 첫 배를 얻은 것을 다 같이 축하합시다.”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샴페인을 터트리고 음식을 먹으면서 이번 일의 성공을 즐겼다.
한껏 고무된 기분에 미소 띤 얼굴로 연신 술잔을 비우는 진혁이나 카심과 달리, 바라캇과 레자의 표정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늘이 드리웠다.
진혁이 웃음 띤 얼굴로 바라캇에게 물었다.
“사우디에 있는 선원들이 걱정되십니까?”
“우리만 이렇게 즐기는 게 마음에 걸리네요.”
“그럼 부르십시오.”
“그래도 됩니까?”
“이 배의 선장은 바라캇 씨입니다. 당연히 맘이 맞는 선원을 고를 권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바라캇뿐만 아니라 레자도 크게 고개를 숙였다.
근심을 덜어낸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장난이 아니었다. 뱃사람이라 주량이 엄청났다.
카심은 초장에 떨어져나갔고, 진혁도 중간에 항복하고 말았다.
다음 날, 진혁과 카심은 정부 청사로 가서 함정에 이전에 따른 서류를 제출했고, 바라캇과 레자는 다시 한번 배를 꼼꼼히 점검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진혁이 잔액 54,000달러와 요르게에게 약속한 1만 달러를 입금하는 것으로 수륙 주정은 정식으로 알라딘 컴퍼니 소유가 됐다.
원래는 한참이나 걸려야 하는 일이었지만 돈을 하루빨리 받으려는 요르게가 힘을 썼고, 우크라이나 정부 입장에서도 외화가 급하기는 마찬가지라 최우선적으로 처리해 줬다.
진혁은 공항까지 따라온 바라캇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생했습니다.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 조심해서 오시오.”
“걱정 마십시오. 그럼 젯다에서 뵙겠습니다.”
바라캇의 배웅을 받으며 진혁은 카심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 * *
3일 후, 진혁은 홍해가 바라다보이는 젯다 해변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 자식. 아주 팔자가 늘어졌군.”
“과장님.”
앞자리에 털썩 앉는 이는 태후물산 젯다 지사의 박진수 과장이었다.
“너 곧 잘릴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여기까지 알려졌습니까?”
“전 지사가 다 알고 있을걸. 그룹 지시마저 거부한 널 모르면 간첩이야, 인마.”
“오더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오더라도 위의 지시는 따라야지. 아무한테나 들이대는 건 어째 변하질 않냐. 정신 차리고 근무 잘하나 싶더니. 쯔쯔쯧.”
박진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더 이야기해 봤자 마음만 아플 거라는 생각에 박진수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카이로 시내가 무법천지라던데 어째 네 얼굴은 더 좋아진 것 같다.”
“원래 언론이란 게 좀 과장되지 않습니까.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별장으로 도망친 무바라크가 곧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던데?”
“계속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뭐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겠네.”
진혁은 이집트의 정권이 누구에게 가는지 알고 있지만 밝힐 이유가 없었다.
주문한 박진수의 카페라테가 나오자 우선 급한 것부터 물었다.
“말씀드린 것은 준비됐습니까?”
“밀가루와 콩은 구해 놨는데, 설탕은 이틀 후에 도착할 거야.”
“그럼 됐습니다.”
젯다에 도착한 진혁은 박진수에게 오더를 부탁했다.
자신이 직접 준비하면 조금 싸게 구입할 수는 있지만, 일부 품목은 여기저기 알아봐야 해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자신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총액이 25만 달러였는데, 50%를 먼저 입금하고 물건 인도 시 나머지 반을 건네기로 했다.
일반적으로는 계약금 10%만 주고 나머지는 신용장으로 거래를 했지만, 이집트의 무역 거래가 중단된 상황이고 카이로 지사의 이름으로 진행할 수도 없어 현금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금은 시티은행 계좌에서 보냈다.
간단하게 대답하는 진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박진수가 물었다.
“아직도 항구가 정상 가동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가져가려고?”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돈 받을 방법은 있는 거지?”
“제가 직접 가서 물건 넘겨주고 현금으로 받을 겁니다.”
진혁의 말에 박진수의 얼굴에는 답답함이 묻어났다.
선입금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비정상적인 거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진은 크겠지만 그만큼 위험도 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평상시라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말리겠지만, 진혁이 코너에 몰린 상황이란 것을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번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대신 다음 번 거래도 부탁드리지요.”
“이번 일 잘 끝내고 얼굴 보면서 해, 인마!”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박진수의 행동이 오히려 고마웠다.
뻔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 텐데도 그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부탁하자 바로 처리해 줬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서로 마음속에 담은 이야기를 못 하자 어색했는지 박진수가 욕을 내뱉었다.
“씨펄. 수틀리면 때려치우고 나랑 같이 오퍼상이나 차리자.”
“같이 망하자고요?”
“이 자식이 날 뭐로 보고. 사우디는 내가 꽉 잡고 있어, 인마.”
“과장님이 능력 있는 것이야 잘 알지요. 그런데 관리하는 바이어가 얼마나 따라오겠습니까?”
“그건 그래. 태후가 버티고 있는데 나한테 올 리가 없지.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카이로에 갔어야 하는데 말이야. 전략적 파트너로 선정만 되면 해 볼 만한데.”
“전략적 파트너라니요?”
처음 듣는 용어라 진혁이 의아해했다.
“아, 인터넷이 안 돼서 너는 사내 게시판을 보지 못하지? 그룹에서 해외 지사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실적이 떨어지는 지사는 폐쇄하는 대신 전략적으로 현지 에이전시를 파트너로 선정해서 기존 바이어를 관리하게 한다더라.”
“그렇군요.”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지 않아도 카이로 지사의 실적은 변변치 않았다. 거기에 내란까지 일어났으니 당연히 폐쇄 지사로 분류될 게 뻔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그 일은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 우선은 지금 일에 집중해야 한다.
얼마간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건이 도착하면 다시 보자고 하고 헤어졌다.
* * *
이틀 후 박진수에게 돈을 건넨 뒤 받은 물건을 화물차에 싣고 카심과 함께 항구로 가자 바라캇이 일단의 사내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오자마자 바로 일을 시켜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만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
레자의 선창에 이번에 바라캇이 새로 채용한 선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안면이 있었다.
사전에 당부를 한 듯 호칭이 자연스러웠다.
사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어색했지만 받아들였다. 그래야 앞으로 일을 지시하는 데 편할 것 같았다.
“모두 반갑습니다. 인사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일단 짐부터 실읍시다.”
“알겠습니다. 모두 위치로.”
레자의 지시에 선원이 일사분란하게 배에 올라 가져온 화물을 싣기 시작했다.
그사이 진혁은 바라캇의 안내로 배구경을 했다.
“페인트칠을 새로 했군요.”
“녹 때문에 새로 칠하는 김에 좀 더 진한 색으로 했습니다. 어색합니까?”
“아니요. 산뜻하니 좋네요. 그런데 지니?”
“예. 제가 지은 함정의 이름입니다.”
‘지니’는 월트 디즈니 영화인 알라딘에서 나오는 램프의 요정의 이름이었다. 진혁의 회사가 알라딘 컴퍼니라는 것에 착안해 바라캇이 붙였다고 했다.
“잘 지으셨네요. 지니호가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지켜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진혁이 그 이름에 흡족해하자 바라캇의 얼굴도 활짝 폈다.
아무리 자신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주인인 진혁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바라캇이 주변을 둘러보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
이유를 물으려던 진혁은 바라캇의 행동이 조심스러운 것을 느끼고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함실 쪽 선체 난간에 튀어나온 철제 박스를 제친 바라캇이 옆으로 비켜서자 진혁이 눈이 커졌다.
“아니, 이것은 벌컨포 아닙니까?”
“시벌컨입니다. 20밀리 기관포 6열이 묶인 겁니다.”
268그램 함포용탄을 사용해 해군 함정을 상대하기는 무리지만 민간용으로는 강력했다.
바라캇이 뿌듯한 표정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쪽에도 한 문이 더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철제 케이스를 만들어 감췄습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빼내온 겁니까?”
“요르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탄환도 세 박스나 얻어 왔지요.”
“고마운 사람이군요.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가져오셨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예비 부품들도 모두 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물건을 넘기고 돌아오면 크게 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에게 일자리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바라캇의 겸손함에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화물을 모두 실은 다음 바로 배를 출발시켰다.
* * *
샤름 엘 셰이크의 해변에서 알트라드가 어둠 속에 잠긴 바다에 시선을 두고 서 있었다.
한밤중이라 해수욕객들이 모두 떠나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푸다가 다가와 말했다.
“보스,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
“보스는 그 작자가 정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자기가 알라딘처럼 날아다니는 마법의 양탄자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 많은 물건을 한 번에 가져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부두도 아니고 이런 아무것도 없는 해변은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푸다는 알트라드의 침묵이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것이라 생각해, 오는 내내 투덜거리며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쏟아냈다.
며칠 전에 진혁이 갑자기 전화해 물건을 해변으로 싣고 갈 테니 현금 50만 달러와 트럭을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했었다.
지난번에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건만 가져오면 얼마든지 사 주겠다고 했지만 정말 전화를 할 줄은 몰랐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답답하다는 듯 푸다가 재촉했다.
“보스!”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이 맞을 때가 있어. 오늘은 감을 믿어 보자고.”
“하지만…….”
“놈은 내게 자신의 이름을 걸었어. 거기에 나도 약속했고.”
“아무리 그렇더라도 너무 황당한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크게 손해 날 것도 없으니 그만 징징대고 약속 시간까지는 기다려.”
알트라드의 일침에 푸다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지만 입은 여전히 댓 발이나 나와 있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불빛이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