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밀수 사업도
불빛은 한 번이 아니라 일정 간격을 두고 세 번씩 깜박이기를 반복했다.
푸다도 그것을 보고 놀라 말했다.
“보스, 저거 혹시 약속한 신호 아닙니까?”
“알았으면 어서 불을 밝히지 않고 뭐 해!”
“알겠습니다. 불을 밝혀라!”
푸다의 말에 부하들이 미리 준비해 둔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해변이 일순간 밝아졌다. 그러자 바다로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함정이 보였다.
푸다가 놀라 소리쳤다.
“저 배인가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접근하려는 건지……. 어어, 그냥 이쪽으로 밀려옵니다. 피하십시오, 보스.”
기겁한 푸다는 재빨리 뒤로 도망쳤다.
알트라드는 움직이지 않고 해변으로 돌진하는 지니호를 노려봤다.
쫘르르르르.
모래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지니호가 정확히 알트라드 앞에서 멈춰 섰다.
해치가 내려지더니 당당한 태도로 서 있는 진혁이 모습을 드러났다.
“정말로 해냈군!”
“분명히 온다고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믿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한 것은 오히려 나지. 귀한 물건을 가져와 줬으니.”
알트라드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말씀은 천천히 나누기로 하고, 우선 물건부터 내리겠습니다.”
“그래야지. 어서 차를 대지 않고 뭘 하느냐?”
아직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푸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대기하고 있던 트럭을 불렀다.
트럭이 도착하자 선원들이 배에 설치된 크레인을 이용해 화물을 짐칸에 실었다.
얼마간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알트라드가 진혁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배를 생각해 낸 건가?”
“다 알트라드 씨 덕분입니다. 물건을 요트로 나르시는 모습을 보고 해변에서 바로 하역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아무튼 대단해. 저리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지.”
해변에 임시로 마련한 파고라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푸다와 카심이 뒤를 따랐다.
자리에 앉자 진혁이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에 가져온 물건 리스트입니다.”
서류를 받아 꼼꼼히 읽어 본 알트라드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를 원하는가?”
“50만 달러를 생각해서 그렇게 준비하시라고 한 겁니다.”
“음……. 가격이 꽤 비싸군.”
“전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생각하신 금액만 주십시오.”
“그래도 되겠는가?”
은근히 묻는 알트라드에게 진혁이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린 물건을 다시 실을 수도 없고……. 좋은 아이디어를 주신 보답으로 우선권을 드린 건데, 가격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죠. 이번 거래로 빚은 갚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사람도 참. 비싸다고 했지, 거래를 않겠다고 한 게 아니질 않나?”
괜히 한번 튕겨 보려던 알트라드는 진혁이 거래선을 바꿀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렇게 주고도 충분히 두세 배는 남겨 먹을 수 있었다.
진혁이 다시 물었다.
“그럼 얼마를 주실 겁니까?”
“약속한 대로 50만 달러를 주지. 넘겨드려라.”
푸다가 준비한 가방을 건네자 카심이 나서서 대신 받았다.
“감사합니다.”
“확인해 보지도 않는가?”
“알트라드 씨 정도 되시는 분이 이런 작은 금액을 가지고 장난치시진 않겠지요.”
진혁의 통 큰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알트라드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앞으로도 나와 거래하는 것이네.”
“지금처럼만 해 주신다면 굳이 다른 곳을 찾을 필요가 없지요.”
“고맙…….”
“대신 너무 욕심 부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선금으로 반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흔적 없이 거래하려면 물건 값을 먼저 지불해야 해서요.”
“끙. 알겠네. 그렇게 하지.”
반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진혁의 행동에 알트라드가 앓은 소리를 내면서도 받아들였다.
“다음에는 콩을 좀 더 가져다주게.”
“얼마나 말입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거기에 밀가루도 좀 더 필요하고. 이런저런 물품들도.”
“죄송합니다만 밀가루, 콩, 설탕만 가능합니다. 다른 물품은 다른 루트로 받으십시오.”
진혁의 냉정한 말에 알트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이유가 있나?”
“식량 가격이 너무 오르고 있습니다. 다른 물품들은 불편한 정도지만, 세 품목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가겠나?”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가격이 너무 올라 서민들이 사 먹기가 버거울 정도입니다. 더 오르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
“돈 벌려고 이 짓을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남을 고통에 빠지게까지 해 가면서 폭리를 취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점 이해해 주십시오. 대신 세 품목은 넘칠 만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답을 하는 알트라드의 얼굴이 처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그도 요즘 고민이 많았다.
가격이 오르는 것은 물건 공급이 적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도매상들이 가지고 있는 물량을 내놓지 않는 영향이 컸다.
당장 오늘 파는 것보다 내일 파는 게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데 서둘러 내놓을 이유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티가 창고가 비어 간다며 물량 공급을 줄이자고 졸랐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물량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다면 굳이 공급을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언제 다시 오는가?”
“나흘 후입니다.”
“좀 늦군.”
“시간이 돈이라는 것은 알지만, LCU의 특성상 속도가 느리니 어쩔 수 없습니다.”
상륙 주정은 구조상 최대 항해 속도가 15노트밖에 되지 못했다.
거기에 눈을 피해 밤에만 항해를 해야 했고, 화물을 싣고 내리는 데도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젯다에서 출발하면 나흘에 한 번 다녀오는 게 한계였다.
두 사람 모두 아쉬움에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하역이 끝나자 진혁은 악수를 하고 다시 배에 올라탔다.
위이잉.
해치가 닫히고 대형 원치가 접안 전에 내려놓은 닻과 연결된 줄을 감자 배가 서서히 바다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지니호를 바라보며 푸다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처럼 머리를 장식품으로 달고 있는 놈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지. 아무튼 뛰어난 자다. 함정이 해변으로 밀려들던 모습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그런데 좀 비싸게 사신 것 아닙니까. 우리도 저런 배를 구해 직접 물건을 가져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바보 같은 놈. 그래서 너는 안 되는 것이다.”
알트라드가 크게 꾸짖고 말을 이었다.
“이런 이상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 거라 생각하느냐? 공항과 항구가 가동되고 생필품 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가격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시간문제야.”
“……!”
“저런 배를 빠른 시간 내에 구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괜히 저놈의 신경을 거슬러 우리와 거래를 끊게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렇군요.”
“무엇보다 우리에게 지금 급한 것은 쏟아져 들어오는 화물을 처리할 판매처를 추가로 개척하는 거다. 그 일만도 벅차니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얼른 기존 거래선에 연락해 추가 주문을 받도록 해.”
“다들 물건이 없어서 난리니 좋아할 겁니다.”
푸다가 떠나자 알트라드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밖에 없었지만 그의 눈에는 지니호를 타고 떠나는 진혁이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알트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동안 물건 공급이 한정되다 보니 마음껏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했다. 이번이 수도 카이로의 암시장에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시각, 지니호의 갑판 위에 바다 바람을 맞으며 선 진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많은 밤을 지새우며 세운 계획이었다. 다시 또 검토하기를 반복해서 성공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이렇게 첫 거래를 무사히 마치고 나니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사업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한껏 고무된 가슴이 가라앉을 때쯤 지켜보던 카심이 입을 열었다.
“알트라드 같은 자를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니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요. 알트라드 씨도, 나도.”
“알트라드가 직접 물품을 실어 나를 생각을 할 수도 있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알트라드 씨 정도 되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지키는 게 자신에게도 이득이라 생각할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특수한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 테니까요.”
카심은 자신의 우려와 달리 진혁이 철저히 분석해 이미 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젯다에 도착했을 때는 이틀 후 새벽이었다.
진혁은 바라캇에게 금일봉을 주며 선원들과 식사를 하고 쉬라 지시하고 자신도 호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 * *
늦게 일어난 진혁은 이미 준비를 마친 카심과 함께 룸서비스로 아침을 먹은 뒤, 물품 구입 대금으로 25만 달러를 빼낸 돈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장 시티은행 젯다 지점으로 갔다.
예금이 반 가까이 빠져나가자 걱정했던 담당자는, 진혁이 25만 달러가 든 가방을 건네자 얼굴이 환해졌다.
당분간은 출금 없이 이 정도씩 입금할 거라는 말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디어 자신도 그토록 원하던 재신을 만난 거다.
진혁이 호텔로 돌아와 로비로 가자 낯익은 청년이 기다리다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미스터 서.”
“엘네리, 잘 왔다.”
“갑자기 전화를 주셔서 놀랐습니다.”
“일단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진혁이 어색한 표정의 엘네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룸으로 올라갔다.
엘네리는 젯다 시절에 채용했던 현지 인턴 사원으로, 진혁의 일을 보조했는데 성실했고 업무 처리도 꼼꼼했다.
박진수 과장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연락했더니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바로 불렀다.
방으로 들어가 카심이 커피를 타는 사이 진혁이 물었다.
“직장은 왜 못 구한 거냐?”
“아버님이 갑자기 편찮으셔서 졸업을 못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으니 받아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놀 수는 없잖아?”
“마침 아는 친척이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부탁을 해 놨습니다. 안되면 그거라도 해야지요.”
예전과 달리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이해가 됐다.
진혁이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그럼 나랑 일해 보겠냐?”
“태후에서 일하는 겁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물품 구입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맡아서 해 볼 테냐?”
“감사합니다만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거래처는 내가 터놓을 거야. 넌 내 지시대로 처리만 해 주면 돼.”
“그 정도면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는 엘네리의 차림을 보고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빌려 입고 왔는지 입은 양복은 몸에 맞지 않은 데다 낡고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진혁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바로 일해야 하니까 가서 옷부터 사서 입고 몸단장하고 와.”
“괜찮습니다.”
“넌 나를 대신해서 거래처를 만나야 해. 지금 네 모습을 보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냐?”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어서 받아서 준비해. 두 시간 후에 보자.”
“알겠습니다.”
돈을 챙긴 엘네리가 나갔다.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을 때 바라캇이 카심과 함께 들어왔다.
“잘들 쉬셨습니까?”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바라캇이 카심과 함께 자리에 앉자 진혁이 말했다.
“당분간은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물건을 싣고 밤에 또 떠나야 하는 힘든 여정이 될 겁니다.”
“바쁜 게 좋지요.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게 오히려 더 힘듭니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호텔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 지낼 숙소를 알아보세요. 이왕이면 창고가 달려 있는 것으로.”
“그 정도 규모면…… 돈이 많이 들 텐데요?”
“우선 이것으로 알아보십시오.”
진혁은 남겨 둔 돈 중에 한 뭉치를 건넸다. 그것을 바라보다 바라캇이 물었다.
“꼭 젯다여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