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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32화 (32/307)

32화. 가격 흥정

“무슨 말이지요?”

“젯다의 부동산 값이 장난이 아닙니다. 거기에 샤름 엘 셰이크까지 거리도 멀고요. 두바는 어떠십니까?”

“……!”

진혁은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두바는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북쪽 끝인 타북 지방에 위치해 있는 상업항으로, 진혁도 출장을 가 봤던 곳이라 기억에 있었다.

이집트와 수단 에티오피아로 떠나는 페리선이 있어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거기에 개발이 더뎌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빈터가 많아 땅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무엇보다 시나이 반도가 지척이라 거리가 젯다의 1/10밖에 되지 않았다.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익숙하다 보니 젯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바라캇이 아니었다면 큰 기회를 놓칠 뻔했다.

진혁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에 바라캇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좋은 조언이었습니다. 두바로 알아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예전 동료가 거기서 카페리를 운행하고 있는데, 전화해 보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신이 난 바라캇이 기쁜 표정으로 돈을 들고 나갔다.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두바라면 물건을 싣고 밤에만 이동한다고 해도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물동량이 두 배나 늘 테니 이득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진혁의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을 때쯤 말쑥한 차림의 엘네리가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여기, 쓰고 남은 돈입니다.”

엘네리가 내민 지폐를 보던 진혁이 옆에 있는 카심을 보고 말했다.

“카심이 맡아서 보관하세요.”

“……!”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카심이 살림을 맡으세요.”

“알겠습니다.”

이후 엘네리와 함께 올드시티에 있는 알라위 전통 시장으로 갔다.

이전에 한번 다녀간 곳이라 바로 뒷골목의 상가가 밀집한 곳을 찾아갔다.

걸어가면서 시세를 알아봤는데, 렌틸콩과 병아리콩은 킬로당 2~3달러 정도였고 누에콩은 10달러 내외였다.

가게마다 곡물 부대가 입구 양쪽에 가득 쌓여 있는데 유독 한 곳만 앞쪽이 한산했다.

진혁이 그곳으로 들어서자 젊은 점원이 일행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콩을 좀 봅시다.”

진혁이 진열된 콩을 집어서 상태를 확인했다. 크기가 균일하고 눅눅하지 않은 게 괜찮았다.

“저희 가게는 최상품만 취급합니다. 품질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품질만큼이나 가격도 중요하지요.”

“작년에 콩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지금 보시는 렌틸콩의 경우 킬로당 2달러입니다.”

“상당히 세군요.”

“작황이 좋지 않은 데다 중국에서 엄청 수입해 가는 바람에 나오는 물량이 부족합니다. 거기에 바이오 연료로도 쓰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이 가격도 저희가 작년에 미리 확보해서 그런 겁니다. 조사해 보시면 알겠지만 여기 시장에서 이보다 더 싼 가격을 제시하는 곳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도 이번 물량이 끝나면 조만간 가격을 올려야 할 테니, 지금 사시는 게 이득입니다.”

젊은 점원의 말은 논리정연해서 마치 사실처럼 들렸다. 그리고 가격이 오르기 전에 사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사원인 진혁이 이런 애송이에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 다른 가게들은 물건들이 많아 쌓였던데, 그건 왜 그런 겁니까?”

“그건……. 흠흠…….”

일순간 말이 막힌 점원이 헛기침을 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다른 가게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물량을 한꺼번에 들여와서 그럴 겁니다.”

“그럼 그쪽과 거래하면서 이득이겠군요. 여긴 기존 재고가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으니.”

“원하시는 물량은 충분히 맞출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얼마나 필요하신 겁니까?”

“좀 규모가 큽니다.”

“얼마나 되시는데요?”

진혁을 바라보는 점원의 눈이 반짝였다.

“톤 단위로 구입해 가면 얼마까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헉. 톤으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원래는 이러면 안 되는데, 큰 거래니 킬로에 1달러 80센트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이 가격이면 저희도 남는 게 없습니다.”

점원이 앓는 소리를 했지만 진혁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모른 척 옆에 있는 콩을 집어 들고 물었다.

“병아리콩은 얼마나 합니까?”

“이것도 사시게요?”

“규모가 크다고 했잖습니까. 이것도 필요한데 보통 서로 가격이 같지 않나요?”

“조금 더 비싸기는 한데……. 한꺼번에 구입하시면 역시 같은 가격으로 드리지요. 정말 잘 사시는 겁니다. 그렇게 계약을 하시지요.”

젊은 점원이 쐐기를 박으려는 듯 서둘렀다.

하지만 진혁이 더 선수였다.

“각각 10톤씩이면 얼마에 해 줄 겁니까?”

“헉. 10톤씩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1달러 50센트…….”

퍽.

“아얏!”

말을 하던 점원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다가온 중년의 사내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바보 같은 놈.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내려 주면 나중에는 아주 그냥 주겠다. 가서 장부나 정리해.”

젊은 점원을 내친 사내가 진혁을 보고 말했다.

“압둘라 상회의 주인, 왈리드 압둘라라고 하오. 젊은 분이 흥정 실력이 대단하시오.”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장사는 흥정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장님 때문에 좋은 기분 망쳤습니다.”

“그럼 내가 사과하는 의미로 차를 대접하지요. 안으로 들어갑시다.”

압둘라를 따라가자 책상과 함께 소파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자 압둘라가 물었다.

“우리 말이 유창한데…… 한국인이시오?”

“맞습니다. 보통은 중국이나 일본인이냐고 묻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게 지독하게 흥정하는데 한국의 상사원이라는 것을 모르면 이 장사 그만둬야지요.”

진혁은 칭찬이라고 생각하며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까 혼난 점원이 차를 내어 놓고 나가자 압둘라가 다시 물었다.

“정말 10톤씩 구매할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음……. 좋소. 장사는 신용인데, 내가 직원을 잘못 가르친 잘못이 있으니 이야기한대로 킬로에 1달러 50센트에 넘겨드리지요. 더 이상 흥정하려거든 이 거래는 그만둡시다.”

압둘라가 확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진혁은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차를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누에콩도 필요합니다.”

“그건 또 얼마나 필요한 거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압둘라의 질문을 무시하고 진혁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 작황이 좋지 않고 경작지도 줄어 콩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경제 전문 기관이 예상했지요. 그래서 상인들이 미리 물량을 선점해서 창고에 가득 채워 놓았고요. 처음에는 그 예상대로 가격이 오름세였습니다만, 느닷없이 중동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닥쳐 교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압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끙…….”

“아무리 말린 콩이라지만 오래 둘수록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창고 임대료도 계속 나가야 하고요. 싸게라도 빨리 파는 게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는 진혁의 말에 압둘라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고 진혁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흥정은 이 정도로 하고, 창고에 비축하고 계신 물량을 제가 다 떠안겠습니다.”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오? 당신이 원하는 것의 몇 배는 될 거요.”

“병아리콩과 렌틸콩은 1달러 25센트에 50톤씩. 누에콩은 5달러 50센트에 30톤. 이게 제가 생각하는 적정 가격입니다.”

“가격을 너무 후려치는군요.”

“물건은 내일 가져가면서 달러로 바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크라운프라자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이보시오.”

압둘라가 잡았지만 진혁은 냉정하게 돌아서 나왔다.

가게를 나와 시장 길을 걸으며 진혁이 알네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압둘라 씨가 연락해 올 것 같으냐?”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진을 넉넉히 잡고 불렀다고 생각해도 절반 정도 가격이면 손해일 테니까요.”

“카심은 어떻게 생각해?”

“미스터 서의 능력은 내가 잘 알지요. 꼼짝없이 찾아올 겁니다.”

카심의 말에 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가격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베팅한 것이었다.

이후 일행은 밀가루와 설탕 가격도 조사하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압둘라 사장이었다.

희희낙락한 표정의 카심과 인상이 찌푸려진 알네리를 데리고 방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다른 물품 가격을 알아보느라 좀 늦었습니다.”

“아니오. 약속 없이 찾아온 제 불찰이지요.”

압둘라가 찾아온 것으로 갑과 을이 결정됐다.

카심이 가져온 커피를 두고 상담이 진행됐다.

칼자루를 진혁이 쥐고 있으니 압둘라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매입가 수준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터는 게 손실을 줄이는 길이었다.

병아리콩은 40톤, 렌틸콩은 30톤을 1달러 25센트에, 누에콩은 5달러 50센트에 20톤. 전체 20만 달러에 구매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진혁의 조건보다 물량이 줄어든 것은 압둘라가 보유한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내일 물건을 옮길 화물차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를 완전히 탈탈 털어 먹는구려. 알겠소.”

“부족한 물량도 채워야 하니 주변에 많이 소개해 주십시오.”

“글쎄. 다들 자존심만 살아서……. 이야기는 해 보겠는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다시는 당신과 엮이기 싫소.”

말과는 달리 압둘라의 표정은 밝았다. 속이 쓰리긴 했지만 애물단지를 털어버려 홀가분했다.

그 후, 밖으로 나온 진혁은 좀 전에 조사한 곳 중 가장 저렴한 가격을 제시한 상점에 설탕 10톤을 구매했다.

물론 이번에도 제시한 가격을 대폭 낮추는 것은 당연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뷔페로 가면서 알네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손해 보면서까지 팔 줄은 몰랐습니다.”

“압둘라 씨는 손해가 아니라 이득을 본 거야.”

“……?”

“비축된 물량이 다 소진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그동안에 계속 창고 임대료도 내야 하고, 시간이 갈수록 가격은 더 떨어질 거고. 그래서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국 이득이라는 말이야.”

“아…….”

“물론 아니다 싶으니 과감히 손절을 결정한 압둘라 씨의 결단은 칭찬받을 만해.”

그래서 진혁은 일부러 쌓여 있는 물건이 가장 적은 압둘라 상회를 찾아간 것이었다.

압둘라가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고 최저 가격을 제시하며 미리 물량 털기를 하던 중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약점을 공략한 게 주효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압둘라가 다시 호텔로 찾아왔다.

“물품 인도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오후에 당장 가져가야 하는데 지금 안 된다면 큰일이었다.

압둘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품은 계약대로 넘길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다른 일 때문에 왔소.”

“말씀해 보십시오.”

“추가로 더 구매하실 의향이 있소?”

“가지신 재고를 전부 넘기신 게 아닙니까?”

“내가 아니라 아는 상회에서도 팔고 싶다고 부탁해서…….”

손해지만 재고를 모두 팔아 치운 압둘라는 시원섭섭한 마음에 친한 상인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번 거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그 자리에서는 다들 너무 성급했다고 책망했는데,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따로 전화를 걸어 자기 물건도 팔아 달라는 부탁들을 했다.

압둘라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자존심 때문에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뒤로 팔려는 거지요. 어떻게, 가능하시겠소?”

“물량이 얼마나 됩니까?”

“세 곳에서 부탁을 했는데, 나와는 달리 그동안 물건을 거의 팔지 못해서 꽤 될 거요. 거기에 다른 이들도 조만간 같은 부탁을 하지 않을까 싶소.”

“음…….”

진혁의 고심이 길어질수록 압둘라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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