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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33화 (33/307)

33화. 밀항 사업까지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물었다.

“혹시 그중에 밀가루도 취급하는 곳이 있습니까?”

“한 곳이 있긴 한데…… 밀가루도 필요한 거요?”

“그렇습니다. 콩이 급해서 먼저 구매했지만, 밀가루 소비량이 더 많잖습니까. 게다가 설탕도.”

압둘라의 눈이 커졌다.

콩을 구매한 물량을 감안하면 밀가루도 상당량이 될 게 틀림없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밀가루를 킬로당 1달러 50센트에 구매했습니다.”

“상당히 싸게 구매하셨군요.”

“계약 물량이 100톤이었으니까요.”

“역시.”

압둘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협상 능력을 경험한 터라, 그가 중동 정세의 불안정과 물량을 내세워 가격을 낮춘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혁이 박진수에게 구매한 가격이 1달러 75센트고, 물량도 50톤인 것까지는 알 리가 없었다.

진혁이 말했다.

“압둘라 씨께서 밀가루를 그 가격에 공급해 주셨으면 합니다.”

“글쎄요…….”

“이번에도 100톤을 구매할 겁니다.”

“음…….”

“콩도 어제 구매한 물량 정도를 다시 구해야 합니다. 그런 거래가 당분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뤄질 겁니다.”

“……!”

압둘라가 입을 딱 벌렸다.

이건 도매상이 아니라 무역업자 수준이었다.

그 정도 물량이면 산지에서 직접 컨테이너로 구입하는 게 훨씬 쌀 텐데, 마진이 붙은 도매상을 이용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압둘라도 그걸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쯤을 알기에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진혁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무엇보다 시일이 걸리기에 이렇게 구매하는 게 최선이었다.

압둘라의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진혁이 말했다.

“밀가루와 설탕을 구해 주시면 앞으로 콩까지 압둘라 씨에게 모두 맡기지요.”

“정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계약서를 쓰자면 그렇게 하죠.”

압둘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최악의 가격이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들 팔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가격은 사려는 자와 팔려는 자의 심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팔려는 자가 많은 상황에서는 당연히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자신처럼 누군가 먼저 손실을 인정하고 손절매를 하면, 설마 하며 주저하던 이들이 투매하기 시작해 가격이 폭락한다.

지금이 바로 그 폭풍 전야 직전이었다.

그렇다면 더 낮은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차액은 자신의 몫이 된다.

밀가루 가격을 맞추는 것은 콩을 제일 먼저 처리해 준다고 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설탕까지 있으니 충분히 해 볼 만했다.

판단이선 압둘라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이전과 달리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제가 맡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한 게 아니라 사장님 스스로 기회를 잡으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오늘의 거래에 만족했다.

압둘라가 돌아가자 바쁘게 움직였다.

수배해 놓은 화물차로 어제 확보한 콩들을 날라 지니호에 바로 실었다.

한가득 싣고 남은 화물은 미리 빌려 둔 부두 안 창고에 쌓아 뒀다.

그사이 진혁은 알네리와 함께 압둘라 상회로 가서 물품 공급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추가로 확보한 물량을 확인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바로 출항했다가 알트라드에게 물건을 건네주고 돌아왔을 때는 새벽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그렇게 한 번 더 다녀온 다음, 이번에 아침 해를 맞으며 도착한 곳은 두바였다. 바라캇이 소개받은 집을 보기 위해서였다.

두바의 첫인상은 한적한 바닷가 풍경이었다. 젯다와 달리 높은 건물은 보기 힘들었고, 여기저기 개발 중인 빈 공터도 많았다.

특이하게 항구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어 외항과 내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요트 같은 작은 배만이 다리 교각 사이로 내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배를 외항에 정박시켜 선원들은 쉬게 하고 카심과 바라캇과 함께 집을 구경하러 갔다.

의외로 빈집이 많았는데,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와 남수단의 내전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페리선 이용객이 줄어 일부 해운사가 철수한 때문이었다.

진혁은 항구 쪽 외곽의 집을 1개월에 2만 5천 리알에 임대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외국인은 임대만 가능했고 기간도 1년이 기본이었는데, 철수한 해운사가 임대한 것을 월세로 계약했다.

한국 돈 750만 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넓은 평수에 2층까지 있어 열 명이나 되는 선원이 지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임대해서 쓰고 있던 항구의 창고까지 넘겨받는 조건이라 오히려 이득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진혁은 바라캇에게 10만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다.

“이 돈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사십시오.”

“너무 많습니다.”

“가정부하고 창고를 지킬 경비원부터 구해야 할 겁니다. 선원들은 무조건 쉬게 하셔야 하고요. 그래도 남으면 운영비로 쓰다가 떨어지기 전에 이야기하시고요.”

“알겠습니다.”

“난 이집트와 젯다의 일로 자주 오지 못할 테니 앞으로 두바는 바라캇이 책임자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캇이 환한 얼굴로 답했다. 자신을 신뢰한다는데 좋아하는 게 당연했다.

항구로 돌아와 깨어난 선원들과 식사를 하고 젯다로 넘어갔다. 항구에는 엘네리가 짐을 실을 화물차를 대기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선적 작업을 시작하며 다시 힘든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간 젯다에서 물건을 실어 나른 것을 끝으로 선적지를 두바로 옮겼다.

젯다에서의 물품 구입과 운송은 엘네리에게 맡기고, 두바의 일은 바라캇에게 일임한 진혁은 카심과 함께 이스탄불을 거쳐 카이로로 돌아왔다.

게이트를 나서는 카심의 양손에는 면세점 봉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젯다 공항 면세점으로 부족해 이스탄불 면세점에서도 물건을 샀다. 대금은 당연히 진혁의 카드로 결제했다.

공항에서 마제드 대위를 찾았지만 그는 야무드 소장을 따라 전선 시찰에 나갔다고 했다.

그사이 이집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무라바크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들과 친정부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최소 일곱 명이 숨지고, 1,500명이 넘게 부상당했다. 그나마 무기 소지가 금지되어 이 정도였다.

하지만 시위가 점차 과격해지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나중에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카심은 집으로 가고, 진혁은 오랜만에 숙소에서 편히 쉬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말쑥한 차림으로 관세청을 찾았다.

다르위쉬의 안내로 들어서자 라빕이 격하게 반겼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것인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오는 길에 조그마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진혁은 준비해 온 와인 상자를 내밀었다.

워낙 이런 종류의 선물을 많이 받았기에 라빕은 별 기대 없이 상자를 열어봤다.

“이건 샤토 페트뤼스(Château Pétrus)잖아?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구한 것인가?”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청장님께 딱 어울릴 것 같아 어렵게 구했습니다.”

샤토 페트뤼스은 프랑스 포므롤 지구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한 병에 3천 달러가 넘었다.

“귀한 선물을 받았군.”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라빕은 당장 개봉해 맛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와인 상자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안전한 루트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라빕이 진심으로 반겼다.

그렇지 않아도 시위가 과격해지자 돈 가진 자들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라빕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어떤 루트인가?”

“사파가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두바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 여객선은 운항이 중단되지 않았나?”

다르위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끼어들었지만 진혁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개의치 않고 답했다.

“여객선은 물론 항구도 폐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를 출항시키겠다는 말인가? 설마 요트로 그 험한 바다를 통과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전 그렇게 무모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언쟁을 듣던 라빕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혹시 LCU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그게 뭔가?”

“‘Landing Craft Utility’의 약어로 수륙 주정이라는 함정입니다.”

이어진 진혁의 설명을 들은 라빕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아, 베트남 전쟁 영화에서 본 기억이 나는군.”

“수륙 주정은 백사장 정도만 있으면 접안이 가능합니다. 이미 시험 운항을 해서 이상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냈군. 대단하네.”

“청장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기는커녕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지만 진혁은 일부러 공을 돌렸다.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려면 이 정도 아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빕이 은근한 시선으로 말했다.

“그럼 내 물건을 옮겨 줄 수 있겠나?”

“당연히 옮겨 드려야지요. 청장님 덕분에 생각해낸 사업인데……. 대신 다른 분들이나 많이 소개해 주십시오.”

“옮겨 달라는 사람들은 많을 거야. 하지만 역시 가격이 문제지 않겠나?”

“물건을 가방에 넣어 옮길 경우 5만 달러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물건의 양이 다르고 가치도 천차만별일 텐데. 그렇게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군.”

라빕이 우려를 표했지만 진혁의 생각은 확고했다.

“물론 일반적이라면 그렇습니다만, 비밀리 옮겨야 할 물건일 텐데 가격 책정 때문에 제가 내용물을 확인한다면 오히려 더 싫어하실 겁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하지만 양이 많을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이 밖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일 테니, 탑차에 실어 오면 그대로 배에 실어다 날라 드리지요. 한 사람당 1톤 탑차면 적당할 듯싶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군.”

“청장님이 의뢰받은 물건에 따라 얼마를 받으실지는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제게는 탑차 한 대당 10만 달러만 주시면 됩니다.”

진혁은 빈 배에 싣는 것이라 부담 없는 금액을 제시해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자는 마음이었지만 라빕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은 진혁의 약점까지 잡고도 주머니 하나에 100만 달러를 받는 대신 일을 맡겼었다. 그런데 탑차면 상당한 양이 들어갈 텐데 그게 겨우 10만 달러면 엄청나게 싼 거였다.

그보다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해도 서로 먼저 옮겨 달라고 할 이들이 알고 있는 사람만도 여럿이었다. 그들이 또 아는 이들이 있을 테니…….

그 차액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흥분됐다.

그로부터 한동안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했다.

최종적으로 사흘 후에 사파가에서 라빕의 물건을 실어 보내기로 하고, 그때까지 모집된 물품도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했다.

다음 날은 엘네리와 바라캇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차액을 챙기려는 압둘라가 적극적이라 물건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거점을 두바로 옮긴 덕분에 이틀에 한 번은 왕래할 수 있게 되어 거래량도 두 배로 늘었다.

바라캇과 선원들이 고생이라 진혁은 급여와는 별도로 성과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는 동안 진혁은 라빕과 수시로 통화하며 사파가의 일도 준비했다.

* * *

출장 준비를 하던 진혁은 한 통의 반가운 전화를 받고 하르브 광장으로 갔다.

카심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는데, 내릴 때 둘 다 권총을 챙겼다.

시위가 한창이라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근의 노천카페에 가자, 알트라드가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뵈니 더 반갑습니다. 카이로에는 어쩐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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