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지독한 악몽
“무바라크가 결국 항복했습니다.”
카심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진혁이 재빨리 TV를 켰다.
오마르 슐레이만 부통령이 국영 TV를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모든 권력을 군에 넘기고 휴양지로 떠났다는 발표를 외신들이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바라캇과 선원들에게 모이라고 하십시오.”
“알았소.”
“엘네리는요?”
“좀 전에 도착해서 아래층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소.”
“잘됐군요. 함께 있으라고 하세요.”
카심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알트라드였다.
“당했네, 미스터 서.”
“몸은 괜찮습니까?”
“난 괜찮은데 물건이 다 타 버렸어. 개자식들.”
알트라드의 목소리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날이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길목을 지키고 있다 덮치는 바람에 피할 길이 없었다고 하네. 자네의 경고를 듣고 먼저 카이로로 출발하지 않았으면 나도 당했을 거야.”
“그래도 천만다행입니다. 물건은 다시 구하면 됩니다. 제가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야.”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아니, 이자까지 쳐서 그 몇 배를 돌려줄 거네!”
“조심하십시오.”
“상황도 알리고 고맙다는 말도 하려고 전화한 거야.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몸조심하십시오.”
전화가 끊겼다.
굳은 얼굴로 일어선 진혁이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모두 모여 있었는데,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거친 바다에서 수없이 생사 고비를 넘긴 역전의 용사들이지만 이번 일은 차원이 달랐다.
같은 인간이 총부리를 들이밀었고, 그들이 몸에서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손에 들린 총이었다.
저들이 먼저 공격했다고 해도 살인에 대한 충격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 진혁이 입을 열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이 일은 이쯤에서 접으려고 합니다.”
“안 됩니다, 사장님.”
“저희는 계속할 수 있습니다.”
바라캇과 선원이 벌게진 눈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들으셨겠지만 무바라크가 물러났습니다. 항만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면 우리가 식량을 가져가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방금 전화 받았는데, 알트라드 씨도 공격을 받아 화물을 전부 잃었다고 합니다.”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나는 전쟁을 하려던 게 아닙니다. 저들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절 믿듯이 저도 여러분을 지켜줘야 합니다.”
“우리는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목숨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여러분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격분했던 선원들도 가족 이야기에는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옵니다. 지금 위험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까지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때가 오면 반드시 불러 주셔야 합니다.”
“제일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진혁의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진혁이 가방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알트라드로부터 받은 현금이 들어 있었다.
“전별금을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지난번에 주신 성과금도 많았습니다.”
“이건 목숨을 건 항해를 무사히 마친 바다 영웅들에게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거부하지 마십시오.”
바라캇과 라자, 그리고 카심은 10만 달러, 나머지 선원들과 엘네리는 5만 달러씩 배분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식으로 고개를 깊이 숙이자, 놀란 선원들이 같이 일어나 어색하게 따라 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카심과 함께 카이로로 향했다. 뒤처리는 바라캇과 엘네리에게 맡겼다.
* * *
카이로는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로 뛰쳐나온 수십만 시민들은 옆 사람을 끌어안고 껑충껑충 뛰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빵빵, 빵빵빵!
택시, 버스, 승용차 가릴 것 없이 운전사들은 경적을 울려댔다. 여기저기에서 적, 백, 흑, 3색의 이집트 국기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카심도 한껏 흥분된 상태로 마주치는 사람들과 끌어안기 바빴다.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하고 헤어진 진혁은 숙소로 가려다가 사무실부터 들렸다. 역시나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청소부터 하려던 진혁은 팩스기에 놓인 종이를 들었다.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두 장 중 한 장은 징계 위원회 결정 사항을 알려온 것인데 ‘권고사직’이었다.
다음 것은 카이로 지사 폐쇄 결정 통지서였다.
기한은 모두 이달 말까지였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것을 문서로 보니 허탈했다.
진혁은 그냥 사무실을 나와 숙소로 갔다.
* * *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분명히 마법 펜던트의 도움으로 회귀했는데 다시 이전의 후회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한을 풀지 못하고 떠난 할아버지.
그게 평생 짐이 된 아버지.
정리 해고. 사업 실패. 주식 실패. 결혼 실패.
희수의 슬픈 눈동자…….
그때 느꼈던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안 돼!”
“마스터 서, 미스터 서! 일어나 봐요!”
소리쳐 흔드는 느낌에 억지로 눈을 떴다. 카심이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으음…….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소. 점심때가 다 됐는데도 안 오고, 핸드폰도 안 받아서 찾아온 겁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윽.”
일어나려던 진혁이 크게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것을 카심이 재빨리 부축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어, 땀에 완전히 젖었잖아.”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당장 다시 누워요. 얼른.”
“그럼 잠시만.”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몸살이 단단히 났네. 하긴 그간 한 일을 생각하면 안 아픈 게 이상하지.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카심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다음 기억은 희미했다.
카심이 억지로 뭔가를 먹이고 약도 준 것 같았다. 소마야와 핫산의 얼굴도 보였다.
심한 갈증에 억지로 눈을 떴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에 침대 끝에 머리를 대고 졸고 있던 카심이 깼다.
“정신이 들어요?”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꼬박 이틀을 앓았어요, 이틀.”
“꽤 시간이 지났네요.”
“이 사람아, 난 송장 치르는 줄 알았어.”
거친 말과는 달리 카심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물 좀 주십시오.”
“뭘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이제 살았네, 살았어.”
신이 난 카심이 얼른 일어나 물을 가지고 왔다.
상체를 세운 진혁은 시원한 물이 들어가자 정신이 좀 들었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난리도 아니지요. 요즘도 밤마다 광장에 모여 축제를 열어, 같이 춤도 추고 폭죽도 터트리면서. 군부에서 무바라크 잔당들을 속속 잡아들이고 있어요. 곧 헌법도 새로 만들어서 다시는 대통령이 제 마음대로 못 하게 한다고 하고. 다들 기대가 큽니다.”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군부는 의회를 전격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중지시키는 정치 개혁에 착수했다.
검찰은 부패로 얼룩진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전방위 조사에 들어갔고 관련자들을 출국 금지 시켰다.
군 최고 위원회와 과도 내각 정부 주도로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등 시위대가 요구한 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으니 시민들의 기대감이 큰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진혁은 앞으로 이집트의 혼란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 미리 알려 오랜만에 느껴보는 카심의 행복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미스터 서가 지금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끄응……. 죄송합니다. 얼른 털고 일어나겠습니다.”
“한국에서 손 지사장이 여러 번 전화했었어요. 아프다니까 걱정하면서 일어나는 대로 바로 전화 달라고 했어요. 모하메드 사장하고 가리 사장도 전화 왔고요. 소마야와 핫산도 걱정이 돼서 들렀다 갔어요.”
“희미하게 본 것 같네요. 고마운 분들입니다. 이제 괜찮으니 집에 가 보세요.”
“저녁 먹는 것까지는 보고 가겠소.”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내일 아침에 다 나은 모습으로 출근할 테니.”
“꼭 먹는 거 봐야 하는데. 가족들이랑 광장에 함께 가기로 해서…….”
“걱정 마시라니까요. 얼른 가서 가족들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알았소. 저녁은 준비해 놨으니 꼭 먹어야 해요. 약도 챙겨 먹고. 그럼 갑니다.”
인사를 하고 일어나려던 카심이 다시 앉았다.
“기억해요? 미스터 서가 선장과 선원들이 위험해도 일을 계속하겠다고 했을 때 한 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목숨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여러분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미스터 서도 한국에 가족들이 있다고 했잖아요. 기다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일어나야 합니다.”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일어나겠습니다.”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카심이 나가고도 진혁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카심도 고맙고, 소마야와 핫산, 그리고 모하메드와 가리 사장도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들의 눈에 다시 눈물이 흐르게 할 수는 없었다.
목표가 생기자 배가 고파 왔다.
진혁은 흔들리는 걸음으로 식탁에 갔다. 카심이 준비해 놓은 풀 메다메스와 에이쉬가 있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카심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것을 먹고 싶었다.
커다란 냄비를 꺼내 물을 한가득 채우고 불을 올렸다. 거기에 신라면 세 봉지를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를 뒤져 찾아낸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말라비틀어졌지만 청양고추를 숭숭 썰어 넣었다.
쉬어 문드러질 것 같은 김치지만 라면에 딱 맞는 반찬이었다.
매운 탓인지 가족 생각 때문인지 진혁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국물까지 싹 비웠다.
온몸에 열기가 확 돌면서 이전과는 다른 땀을 흘렸다.
몸에 기운이 돌자 희수 생각이 더 간절했다.
* * *
다음 날, 출근한 소마야를 깨끗해진 사무실이 반겼다.
“미스터 서!”
“오랜만입니다, 소마야 씨.”
“이제 괜찮아요?”
“보다시피.”
깨끗한 와이셔츠 차림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려 보이는 진혁의 모습에, 소마야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웠다.
“이젠 진짜 아프지 마세요.”
“그럴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서로 환한 미소를 짓다가 카심이 들어오자 함께 커피를 마셨다.
시간을 확인한 진혁이 수화기를 들었다. 손민한이 받았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 공문을 보고 안 아프면 정상이 아니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라. 상무님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다.
“내일 들어가겠습니다. 귀국해서 말씀 나누시죠.”
-그래. 그게 좋겠다.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길게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 일부러 짧게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