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독립 선언
사무실을 나와 카심과 함께 알라딘 컴퍼니로 갔다.
핫산이 나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난 서류들을 검토했다.
태후물산으로부터 소개받아 중개한 오더가 30여 건에 천만 달러가 조금 넘었다.
그리고 핫산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오더는 3건에 35만 달러 정도였다.
“한국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가서 가족도 보고 좀 쉬다 오세요.”
“그동안 지금까지 거래했던 업체들을 돌면서 인사를 해 두세요.”
“내가 바로 접촉해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지사장인 제가 허락한 일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마간 더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시장으로 갔다.
전과 달리 상점들이 모두 문이 열려 있었지만 손님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예전처럼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다.
모하메드 사장도 직원들과 함께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게.”
모하메드가 격하게 반기며 안았다.
“미스터 서의 조언 덕분에 큰 화를 피했네. 폭도들에게 당한 상점이 한둘이 아니야.”
“모하메드 씨의 빠른 결정 덕분입니다.”
“과욕은 화를 부르지.”
모하메드의 시선을 따라가자 유달리 검게 탄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배신한 매니저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겨울 장사를 크게 하겠다고 신상들을 잔뜩 쟁여 놨다더군. 안 뺏기려고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자 폭도들이 불을 질렀대. 극악무도한 놈들.”
“안타깝군요.”
“그건 저쪽 사정이고, 우리도 살아가야 하니 물건이 급해.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앞으로 일에 대해 상의를 해 보세.”
함께 사장실로 들어갔다.
차를 앞에 두고 모하메드가 말했다.
“어려운 상황이 지나갔으니 서둘러 상품을 준비해 장사를 해야겠네. 안타깝긴 하지만 문 닫은 경쟁 가게들이 많아서 전망이 아주 좋아.”
“아직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상품을 준비해도 늦었어.”
“한국에 늦을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은 알지만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예전 같으면 흘려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혁이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다른 가게들처럼 폭도들에게 물건을 빼앗겼을 것이다.
모하메드가 굳은 얼굴로 묻었다.
“뭐 아는 게 있나?”
“특별한 정보는 없습니다만, 이집트에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건 그렇지. 30년 넘게 대통령으로 모시던 사람이 쫓겨나는 것을 봤으니.”
“한국에서도 장기 집권한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물러나라는 시위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은 비참하게 부하의 총에 피살당했지만. 그 이후로 한국 사회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됐는가?”
모하메드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게 더 큰 아픈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음.”
“오늘은 안부 인사드리러 온 것입니다. 한국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그동안 서로 고민해 본 다음에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진행하셨으면 합니다.”
“알겠네. 나도 그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좀 알아보겠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으니.”
“좋은 생각이십니다. 찾아보시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실 겁니다.”
“번번이 고맙네. 잘 쉬고 꼭 다시 돌아오게.”
“사장님이 무서워서라도 꼭 와야겠습니다.”
마지막은 가벼운 농담으로 부드럽게 끝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카라즈였다.
가리 사장 역시 가게를 청소하며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하메드 상회에서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에 다녀온 다음 다시 들르겠다고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3월 초.
서울의 하늘은 맑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서초동 태후 빌딩에 도착했다. 45층 초고층 빌딩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멋져 보였던 건물이 지금은 괴물처럼 느껴졌다. 진혁은 인상을 굳힌 채 그 괴물의 아가리로 속으로 들어갔다.
김선혁 상무실은 37층에 있었다.
공항에서 연락을 한 탓인지 손민한 지사장도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무님.”
“상사원의 기본은 체력이야.”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신경 쓰겠습니다.”
“앉자.”
자리에 앉자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좋지 않은 이야기 길게 할 필요는 없고, 일단 권고사직 건은 취소시켰다. 본사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끝까지 남아 두칸 오더를 마무리 지은 점이 감안된 조치야.”
“지사 폐쇄 건은 어떻게 됩니까?”
“그건 내 권한 밖이야. 이달 말까지 정리해서 젯다에 생긴 총괄 본부로 업무를 이관하고 들어와. 6개월간 대기발령이지만 내가 반드시 네 자리는 만들어 주마.”
진혁은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는 동안에도 수없이 갈등하며 결심했던 말을 꺼낼 순간이었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전 카이로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하는 말이냐?”
“압니다. 권고사직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인마, 그걸 막으려고 상무님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손민한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압니다.”
“아는 놈이 그딴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조금만 참아. 그럼 상무님이 자리도 만들어 주신다잖아.”
“자리만 지키면 됩니까? 이미 회사에 대한 열정이 식어 버렸는데. 그건 오히려 상무님을 배신하는 짓입니다.”
진혁의 차가운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룹의 지시를 거부해서 찍힌 것이 파다하게 소문 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이전의 진급에 불만을 품고 지사장에게 대든 것까지 더해지면…….
자리를 지키면 월급을 받을 수는 있지만 태후에서 더 이상은 기대할 게 없었다. 버틴다면 굴욕뿐이었다.
한참 만에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부하 하나 지켜 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답답하다.”
“아닙니다. 상무님은 하실 만큼 하신 겁니다. 제가 못나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너라면 어쩌면 태후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기다렸던 말이었다.
“해외 지사 선진화 방안에 따라 지사가 폐쇄된 곳에 전략적 파트너를 두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과거 거래 실적이 있어야 해. 지금 바로 오퍼상을 차린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알라딘 컴퍼니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진혁의 시선을 받은 손민한이 간단하게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김선혁이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
“리베이트 건 때문에 이용한 알라딘 컴퍼니를 전략적 파트너로 지정해 달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작년 거래 실적도 천만 달러가 넘습니다. 바이어와도 연결되어 있어 오더를 유지하는 데 유리합니다. 여러모로 가장 적합한 업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돌아가는 대로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해. 이건 그룹에서도 건드리지 못해.”
김선혁도 쌓인 게 많은지 흔쾌히 허락했다.
그룹에서는 지사 폐쇄만 신경 쓰고 파트너 선정까지는 관여하지 않았다.
진혁이 전략적 파트너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장점은 태후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이어의 신뢰를 얻는 데 그보다 큰 것은 없었다.
아울러 태후 제품에 대해서도 일반 파트너보다 3%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경쟁력은 충분했다.
김선혁이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해서 식사는 출국하기 전에 하기로 하고 나왔다.
진혁은 오희준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퇴근 시간까지 회사 앞 카페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며 기다렸다.
역시 IT 강국답게 속도가 빨라 검색할 맛이 났다.
진혁은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집트의 미래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아 희미한 기억을 완성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참 지난 신문 기사를 보고 있을 때 오희준이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7시가 넘어 있었다.
“퇴근 시간이 언제인데 이제 와.”
“누구처럼 간덩이가 부은 놈이나 땡 하면 나오지. 난 새가슴이라 부장 퇴근하는 것까지 보고 뛰어나온 거야.”
“헛소리 말고 얼른 가자. 배고프다.”
“잠깐 기다려. 누가 오기로 했어.”
“누구?”
“선배! 여깁니다, 여기.”
오희준이 소리쳐 부르는 사람은 한지철이었다.
“너를 만난다고 했더니 같이 보자고 하셔서. 크게 한턱 쏘시겠대.”
“잘했어.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얼굴 좋네? 가자.”
카페를 나와 식당가로 갔다.
“오늘은 원하는 것 다 사 주마. 뭘 먹고 싶냐?”
“삼겹살 사 주십시오.”
“엥? 삼겹살?”
당장 희준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건 아니지. 선배가 모처럼 크게 쏘신다는데 겨우 삼겹살이 뭐냐? 체면이 있지.”
“그래. 좀 더 좋은 것으로 먹자.”
“아닙니다. 삼겹살이 정말 먹고 싶습니다.”
진혁이 오늘은 고집을 부렸다.
이슬람 문화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소주와 함께 먹던 추억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오늘은 반드시 그걸 풀고 싶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결국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희준에게 한 소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상 펴, 인마. 음식 놓고 그러는 것 아니다.”
“넌 내 인생에 도움이 전혀 안 돼. 왜 하필 중동에 간 거야? 미국이나 유럽 지사였으면 오죽 좋아. 덕분에 쭉쭉빵빵 구경도 하고.”
“정신 차려, 인마.”
화장실에 간 한지철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농담이 계속될 참이었다.
진혁이 재빨리 술병을 들었다.
“선배님,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아니야. 오늘은 내가 먼저 주지.”
“아닙니다.”
“받으라니까.”
“받아도 돼.”
고기를 굽던 오희준까지 거들자 어쩔 수 없이 먼저 받아야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 한지철의 잔을 채우고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네가 알려 준 아이템이 1등을 했다.”
“……?”
“아웃도어 말이다. 고맙다.”
“아, 축하드립니다. 겨우 한마디 한 것뿐인데요, 뭘.”
“그 한마디가 포상금에 부장급 팀장까지 만들어 줬단다. 이제는 한 팀장님이시란다. 그런데 겨우 삼겹살이라니.”
여전히 툴툴대는 희준의 말은 한 귀로 흘렸다.
“축하드립니다, 선배. 아니, 한 팀장님.”
“다시 한번 고맙다.”
한지철의 아웃도어 사업 계획은 경영진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별도의 추진팀이 구성됐다고 했다.
당연히 팀장은 한지철의 몫이었다.
좋은 일이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소주 한 병이 금세 비었다.
희준을 뚝뚝 쳤다.
“소주 몇 병 더 시켜라. 그리고 고기 좀 잘 뒤집어. 다 타잖아.”
“지금 고기 타는 게 문제냐. 패션은 저렇게 능력을 인정해 주는데, 우리 물산은 목숨 걸고 오더 지켜내도 포상은커녕 내쫓는 게 말이나 돼? 끝까지 싸워야지. 왜 그걸 받아들여. 씨펄.”
“희준아!”
오희준에게 권고사직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었다. 한지철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떠나기로 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