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일본 대지진
“그냥 식사 대접하고 싶어서 모신 겁니다.”
“애비를 속일 참이냐.”
더 이상 머뭇거리면 안 된다.
“회사에서 카이로 지사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너는?”
“본사로 들어와 대기하라고 합니다.”
서명수의 얼굴이 당장 어두워졌다. 그도 직장인이라 대기 발령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가 제가 있을 곳입니다, 아버지.”
“회사에서 허락하겠냐?”
“회사는 나올 겁니다. 이미 갈 곳은 정했습니다. 카이로에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가야지. 잘 다녀와라.”
아버지는 간단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무슨 결정을 그렇게 쉽게 해요. 장가갈 때까지만이라도 좀 더 있으면 안 되겠니?”
“이미 회사에서 결정을 해 버려서 미룰 수가 없어요.”
“그래도 직장이 있어야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그런 며느리 필요 없어!”
“이이는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여자가 남자 앞을 막는 거 아니야. 내 아들은 그런 간판 없어도 돼.”
“요즘 세상이 안 그렇다니까요.”
“꼭 세상 따라 살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해. 뒤에 이 애비가 있으니 걱정 말고.”
“고맙습니다.”
“먹었으니 가자.”
아버지가 일어나자 어머니도 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늦게 일어난 진혁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머니가 손을 붙잡고 거실에 앉혔다.
“회사 나가기 전에 선보자.”
“선을요?”
“그래. 간판이 중요하잖니. 순애 아줌마가 그러는데, 마침 적당한 아가씨가 있다고 하더라. 초등학교 교사인데…….”
“안 봐요!”
진혁이 큰 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 기세에 어머니가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아들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
하지만 진혁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잊고 싶은 희수의 생모도 수애 아주머니의 소개로 선을 봐서 만났었다. 다시 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입을 열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진혁은 아차 싶었다.
“소리쳐서 죄송해요.”
“네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리에 내가 너무 조급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제 걱정 하시는 것은 잘 알아요. 그런데 제 배우자는 제가 직접 선택하고 고르고 싶어요.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만…….”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태어날 아이들에게 잘할 참한 아가씨로 데려올 테니 믿고 기다려 주세요.”
“알았다. 그렇게 하마.”
진혁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결국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 후, 한국에서 꿈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김선혁 상무와 점심을 같이하면서 사표도 제출했다. 권고사직보다는 자발적으로 사직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 * *
회사에 출근하자 카심과 소마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핫산도 도착해 있었다.
가져간 선물을 나눠 주고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본사에서 카이로 지사를 이달 말까지만 운영하고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음.”
침음만 터트리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떠난 주재원들이 돌아온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손민한마저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정작 중요한 게 그게 아니었다.
카심이 먼저 물었다.
“미스터 서는 어떻게 됩니까?”
“전 끝까지 있겠다고 했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럼 회사는?”
“이번에 들어가서 사표 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백수입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데 그들은 진혁을 생각하면 그럴 수만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걱정 마십시오. 일은 여기서 그대로 하시게 될 겁니다.”
“태후에서 철수한다면서요?”
“알라딘 컴퍼니가 있잖습니까. 전략적 파트너를 맺어 일을 넘겨받기로 했습니다. 같이 하실 거죠?”
“당연하지요.”
“저도 좋아요.”
“월급이나 제대로 나올지 몰라.”
툴툴거리는 카심의 말도 정겹게 들렸다.
다들 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핫산도 짐을 옮겨와 전략적 파트너 신청서를 만들었다. 형식이지만 심사를 거쳐야 하기에 준비할 서류들이 많았다.
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 일찍 바이어를 만나고 돌아온 핫산이 혀를 차며 들어왔다.
“참,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무슨 일 있습니까?”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합니다. 돈이 많으면 뭐 해. 그렇게 한순간에 파묻혀 버리는 것을.”
“저도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봤어요.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와 사람이건 자동차건 다 삼켜 버렸어요.”
“건물도 많이 무너지면서 화재까지 발생했다고 합니다. 곧 밤이 될 텐데 전력 공급까지 끊겨 걱정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이 바로 옆인데, 미스터 서도 집에 전화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마야의 말에 진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가 몇 마디 나누고 끊었다.
“휴……. 다행히 한국은 영향이 없답니다.”
“다행이네요. 바로 옆인데도 아무 일이 없다니.”
핫산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혁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동일본 대지진!”
리히터 규모 9.0으로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대지진이었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도 피해지만 문제는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벌어지는 방사능 유출이었다.
진혁의 머릿속으로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미스터 서, 대체 무슨 일이오?”
“잠시만요, 잠시만…….”
처음 보는 진혁의 당황한 모습에 카심이 놀라 물었지만 지금은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아, 맞다. 전화.’
수화기를 들고 생각나는 곳부터 걸었다.
-일본 대사관입니다.
“원전을 확인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진으로 원전이 폭발한단 말입니다.
-지진으로 피해가 있을지 몰라 이미 가동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원자로의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있단 말입니다.”
-어디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원전상황부터 체크해야 한다구요.”
-알겠습니다. 위에 보고 후 본국에 알리겠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단……. 여보세요? 이런, 빌어먹을.”
진혁이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거칠게 수화기를 드려는 진혁의 손을 핫산이 막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흥분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왜 그러는지부터 말씀하세요. 그래야 우리도 돕지요.”
“그러니까…….”
진혁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말하려면 자신이 회귀했다는 걸 밝혀야 했다. 그건 안 된다.
하지만 원전 폭발도 막아야 했다.
생각을 쥐어 짜냈다.
“지진이 일어난 곳에 원전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것들이 영향을 받아 폭발할 겁니다. 그걸 알려서 막아야 합니다.”
“일본에도 전문가들이 있을 텐데, 이미 확인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핫산은 잘 모르시겠지만, 일본인은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입니다. 일본전력은 자기들이 처리할 수 있다고 오판해서 위에 보고를 안 할 겁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큰일인데. 설마요.”
진혁의 얼굴이 절망으로 변하자, 카심이 나섰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미스터 서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
“일본 관련된 곳에 전화해서 원전을 확인하라고 해 주세요.”
“알았소. 빨리 움직입시다.”
카심의 말에 다들 전화기를 들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카심이 때론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했다.
컴퓨터로 번호를 확인해 다이얼을 돌리고 전화를 받으면 원전을 확인해 달라는 말을 했다. 전화를 안 받는 곳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고 일본전력 본사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일본전력입니다.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어디신가요?
대답하려던 진혁이 멈칫했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절대 안 받아 줄 거다. 그렇다면…….
“미국대사관입니다.”
-잠시만 기다립시오.
‘아싸!’
역시 통했다.
잠시 후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비서실 이나미입니다. 미국 대사관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사장님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지금 사장님은 부재중이신데 무슨 일이십니까?
다시 멈칫한 진혁이 말을 이었다.
“원전에 문제가 있다는 첩보가 있는데 사실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그 첩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 여부를 알려 주시오.”
-사실이 아닙니다. 원전은 안전합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진혁이 흥분해 소리쳤는데 오히려 그게 악수가 됐다.
-미국 대사관이 맞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원전 상황부터 확실히 알려…….”
-미국 대사관 누구십니까.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으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습니다.
“야이, 개자식아. 내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다 죽는단 말이야.”
-당신의 대화는 지금 녹음되고 있습니다. 향후 조사해 법적 조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해라, 해. 하지만 지금은 원전 상황부터 알리란 말이다.”
-대화가 불가능하군요. 끊겠습니다.
뚜뚜뚜뚜뚜.
“에이, 개자식.”
꽝!
수화기 놓는 소리가 너무 커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쪽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계속 이야기는 하는데 알았다고, 위에 보고하겠다는 말뿐이에요. 귀찮다는 반응들입니다.”
“나는 미친놈 취급도 받았습니다.”
“유언비어 날조로 고발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여러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니 조금만 더 해 주세요.”
“알았수다.”
다시 수화기를 드는 모습에 진혁은 이번에는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봤다.
하지만 역시나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점심도 굶은 채 다들 전화를 돌렸다. 이제 더 할 곳도 없었다.
그때 소마야가 갑자기 소리쳤다.
“일본 정부에서 원전에는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는데요. 일본전력 관계자도 통제 가능한 수준이라며 안심하라고 말했다고 하고요. 일본 경시청에서도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는 엄단하겠다고 했다는 기사도 올라왔어요.”
“어디 나왔어?”
“여기 봐요. 속보로 떴어요.”
“어, 그러네. 안전한가 봐. 이거 괜히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 아니야?”
핫산이 목소리를 낮췄지만 진혁의 귀에도 들렸다.
허탈했다. 뻔히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했다.
그때 일본 장관이 말을 내뱉는 모습이 떠올랐다.
위안부를 부정한 것도 모자라 독도도 일본 땅이라며 당당히 내뱉는 철면피한 모습에 분노를 느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힘이 없어서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없으니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다.
이대로 또 맥없이 물러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의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고 말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필요했다.
잠시 방법을 생각하던 진혁이 이를 악물었다.
“카심!”
“말만 하시오. 바로 준비하겠소.”
“젯다로 가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알았소.”
진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카심이었다. 진혁이 이러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다행히 젯다로 가는 직항편이 바로 있었다.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