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공매도 때리기
JK모건 중견 매니저인 더글라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막 퇴근하려고 할 때 걸려 온 안내 테스크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지금 상담을 받겠다고?”
“그렇습니다.”
“다른 매니저는?”
“다들 퇴근하시고 더글라스만 남아 있어요.”
더글라스는 고민했다.
지금 상담을 시작하면 최소 한두 시간은 걸린다.
“내일 오라고 해 보세요.”
“이미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럼 다른 곳으로 가시겠다고 해서요.”
“빌어먹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오? 그 정도는 안내 테스크에서 커버해 줘야지.”
“금액이 좀 커요. 천만 달러.”
“음.”
그냥 놓치기에는 아까운 액수였다.
물론 그보다 더 큰 금액을 유치하는 부호도 많았지만 미리 예약된 출장 상담이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경우는 없었다.
“올려 보내요.”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얼마 후 문을 열고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더글라스입니다.”
“서진혁입니다.”
“한국분입니까?”
“그게 거래와 상관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좀 의외라.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상담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더글라스는 일부러 주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끌려고 했다. 그래야 상대의 성향을 파악해 적절한 투자를 유도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시간도 주지 않았다.
“투자금이 천만 달러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요즘은 유가 선물이 유망합니다. 아시겠지만 중동 정세가…….”
“주식으로 하겠습니다.”
“주식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변동성이 작습니다.”
“일본전력 주식을 공매도 해 주십시오.”
“아, 일본의 대지진 관련 주에 투자하시려는군요. 공매도라면 향후 전망을 비판적으로 보신다는 건데, 일본의 위기관리 능력은 세계 최고입니다. 안전하다고 발표까지 한 것으로 아는데…….”
“내일 장이 개장되면 전액 공매도에 투자해 주십시오.”
연이어 말이 잘린 더글라스가 얼굴이 벌게졌다.
이건 미친 투자였다. 전혀 위험을 분산시키지 않은 투기였다. 100% 말려야 했다.
하지만 투자자의 태도가 문제였다.
이건 상담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지시만 하겠다는 행동이었다.
실제 진혁의 마음이 그랬다.
공매도는 여러 제약 조건 때문에 개인이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더글라스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거듭 재촉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여긴 JK모건입니다. 당연히 가능은 합니다.”
“그럼 계약서부터 쓰시지요.”
이후 더글라스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받아들여지지도 않겠지만 그럴 마음도 없었다.
어떤 투자를 할지는 투자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손실 책임도 투자자가 진다.
자신은 그저 수수료만 받으면 된다.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는데 손실까지 걱정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덕분에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계약서가 작성되고, 계좌로 천만 달러가 입금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딱 15분이었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신기록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크라운프라자 호텔에 묵고 있을 테니 완료되면 그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기분이 나빴던 더글라스는 사무실 안에서 배웅을 마쳤다.
보통은 계약까지 했으니 로비까지 따라 나가는 게 맞는데, 그러기도 싫었다.
수수료만 아니면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상대였다.
다음 날, 일본전력의 주가는 개장 전 발표된 호의적인 내용 덕분인지 견고한 흐름을 보였다.
지진의 여파로 니케이 지수가 6% 폭락했는데도 겨우 3% 하락한 2,005엔으로 2,000엔 선을 지키면서 마감했다.
적지 않은 매도 물량이 나왔는데도 매수세가 탄탄했다.
시차 때문에 더글라스가 출근했을 때는 이미 장은 끝나 있었다.
트레이딩 룸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더글라스가 수화기를 들었다.
호텔로 찾아가 설명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어제 본 진혁의 태도에 별로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알려 준 호텔도 알아보니 저가의 비즈니스호텔이라 더 가기 싫었다.
“하루에 다 처리하느라 트레이너들이 고생했습니다. 평균 공매도가는 2,050엔이었습니다.”
-알겠소.
바로 전화가 끊겼다.
최소한의 수고했다는 말도 없었다.
‘썬 오브 비치.’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정말 그러면 안 되지만 일본전력 주가가 폭등해 알거지가 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아침부터 기분을 잡치고 나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예전에 상사였던 도쿄 지점장 앤더슨이었다.
“그쪽은 장이 끝나 쉬는 시간일 텐데 어쩐 일이십니까?”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말씀입니까?”
-일본전력 공매도 말이야! 네 작품이라며?
“왜, 무슨 일 있습니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1호기에서 폭발이 발생했어!
“예?”
더글라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확한 겁니까?”
-스즈키 관방장관이 방사능 유출을 공식 확인했어. 자위대가 투입돼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있고. 여기 상황이 심각해!
“…….”
-시간 외 매도 물량이 엄청나게 쌓이고 있어! 니케이 선물지수도 폭락 중이고. 내일 장은 보나마나 패닉이야, 패닉! 더글라스, 듣고 있어?
“어, 어. 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우리 지점의 보유 물량이 적지가 않아. 소스가 어디야?
“저 그게……. 어제 처음 찾아온 투자자입니다.”
-당장 만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걸 알아내야 해!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연락을 줘!
앤더슨의 목소리가 비명같이 들렸다.
얼른 의자에 앉아 컴퓨터로 기사를 검색했다.
앤더슨의 말대로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실을 두고 세계 언론이 방사능 누출이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는 우려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얼른 크라운프라자 호텔로 다시 걸었지만 진혁은 이미 체크아웃 한 상태였다.
계약서에 적힌 연락처도 크라운호텔 번호뿐이었다.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 * *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는 카심뿐만 아니라 엘네리도 함께 있었다. 지니호를 고철로 매각하고 숙소의 짐을 정리해 넘어온 것이다.
어차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취직이 힘드니 진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에서 일하기로 했다.
다음 날, 일본 주식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니케이 지수는 10% 이상 빠졌고, 일본전력은 25% 가까이 폭락했다. 그 여파로 세계 증시도 일제히 하락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큰 문제 없다는 발표만 했다.
하지만 시장은 더 이상 일본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전력의 주가는 계속해서 추락했다.
카이로의 상황도 만만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축제의 장으로 바뀌었던 타흐릴 광장에 다시 시위 구호가 울려 퍼졌다.
독재 정권이 붕괴되자 그동안 억눌렸던 민심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생활고를 호소하며 임금 인상과 근로 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파업이 이어졌다.
시위를 진압해야 하는 경찰들까지 근로 조건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에 동참할 정도였다.
그런 외부의 사정들과 달리 진혁은 다른 일에 관심을 끊고 알라딘 컴퍼니의 일에만 집중했다.
외부의 일들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희수를 데려다줄 수는 없었다.
기존 카이로 지사의 바이어는 핫산과 엘네리에게 맡기고 진혁은 카심을 데리고 카릴리 시장 일에 매달렸다.
노준복에 받은 재고품을 정리해 카라즈에 갔다.
이미 거래가 있었던 가리 사장이라 리스트를 넘겨줬다. 다른 사장들과 협의해 수량을 확정해 알려 주기로 하고 바로 나왔다.
문제는 모하메드 상회였다.
모하메드 사장이 격하게 반겼다.
그는 진혁이 한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알아봤었다.
현재 이집트의 상황과 오버랩 되면서 머릿속이 뒤엉켜 혼란스럽기만 했다. 생각이 많아지자 장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혼란을 풀어 줄 진혁이 돌아왔으니 반가운 게 당연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건가. 미스터 서만 기다리느라 준비를 하나도 못했어.”
“덕분에 이득은 없겠지만 손해도 없지 않습니까?”
“운영비와 직원들 월급은?”
“아, 제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래도 욕심 부리다 한 방에 훅 가는 것보다는 낫지요.”
이쪽의 급한 상황은 아랑곳없이 태평스러운 답변에 모하메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정말 이집트가 한국을 따라갈 것이라고 보는가?”
“똑같이 가지는 않겠지요. 처한 상황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비슷하게는 갈 것이라고 예상은 합니다. 권력의 속성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다 똑같으니까요.”
“음.”
“이집트는 더 혼란스러울 겁니다. 한국은 반도 국가라 외세의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이집트는 주변국의 영향을 직접 받습니다. 게다가 중동의 종교 갈등은 뿌리 깊고요.”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건 그렇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각자 먹고는 살아야 했다.
모하메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혁도 함부로 조언을 할 수는 없었다.
중동과 세계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고 있지만, 과거에 이곳에서 직접 살지는 않았다.
거시 경제는 아는데 미시 경제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모하메드가 답답한지 재촉했다.
“뭐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좀 해 보게.”
“일본과 한국의 과거를 생각하면…… 삶이 팍팍해지면 저가의 물품이 잘 팔립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현재 모하메드 상회는 중고가 여성 의류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전망이 밝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업종을 바꿀 수도 없잖은가?”
“그렇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현재의 사업 비중을 낮추고 저가 제품을 취급했으면 합니다. 어느 쪽이 더 잘 팔리는지 보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듣던 카심이 나름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반해 모하메드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만들 수 있어. 우리 상회의 특색이 없어져.”
“꼭 여기서 팔지 않아도 됩니다. 비어 있는 곳들이 많지 않습니까.”
사장실에 붙어 있는 창문 너머에는 배신한 매니저가 차렸다가 망한 가게가 아직도 흉물스러운 모습 그대로 있었다.
모하메드가 바로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저길 고쳐서 저가 제품 매장으로 꾸미자는 말이군.”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제 생각에는 재고품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리 사장 등이 한국에서 재고품을 가져다가 재미를 본 일을 들려주었다.
같은 시장에서 다른 매장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아이템이 겹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오히려 카라즈의 위치를 가르쳐 주고 가리 사장을 찾아가라고까지 했다.
모하메드가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라 측의 움직임을 알려 대비할 수 있게 한 세나위였다.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얼굴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도움이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카심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나위가 말했다.
“관심 있어 하실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