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군부와의 인연
“지난밤 암시장에서 큰일이 있었습니다. 살라가 죽었습니다.”
진혁도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살라가요?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살라였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알트라드까지 공격했었다.
세나위의 정보와 의문의 사내의 경고 때문에 다행히 위기를 넘겼지만, 언제 또 일을 벌일지 몰라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클럽에서 나오다가 총에 맞았답니다.”
“아니, 경호원들은 뭘 하고요?”
“자기 구역이라 방심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살라 쪽은 서로 조직을 차지하려고 내분 상태라고 합니다.”
“총까지 사용했으면 경찰 쪽에서 가만 안 있겠는데요?”
“그게 그렇지 않고 조용합니다. 살라의 뒷배가 되어 주었던 내무장관인 마흐무드 칸샴과 마무드 와그디 경찰청장이 각각 뇌물죄와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죄로 검찰에 잡혀 있거든요.”
무바라크 퇴진 이후 온갖 비리를 저지른 측근들이 속속 붙잡혀 가고 있었다.
경찰 간부들은 자신에게도 불통이 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뇌물의 원천인 살라가 죽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할 판이었다.
진혁도 한시름 놓았다.
그때 세나위가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부가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를 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쪽도 이제 시작이군요.”
“리비아의 카다피는 무바라크와 달리 군부를 철저히 장악하고 있어서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쪽도 정리될 겁니다. 지금은 이집트에 집중하기도 벅찹니다.”
“그건 그렇지요.”
진혁이 세나위를 찬찬히 쳐다보다가 제안을 했다.
“이렇게 오며 가며 들르실 게 아니라 아예 고정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물론 정보료는 드리겠습니다.”
“저야 좋지만, 겨우 여기저기 떠도는 말들을 전하는 것뿐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저 같은 사업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입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후 조건을 맞춰 일주일마다 찾아오는 것으로 하고, 그때마다 정보료로 200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제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게 있습니까?”
“군부의 움직임을 주시해 주십시오. 더불어 붉은 형제단도 같이요.”
“군부는 국정을 운영하는 세력이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붉은 형제단은 왜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그들이 향후 정국의 큰 변수가 될 겁니다.”
변수 정도가 아니라 권력까지 잡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만 밝혔다.
세나위가 돌아가자, 진혁은 알트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서, 소식을 들었나 보군.
“괜찮습니까?”
-그러니까 전화를 받지. 지금 시나이야.
“카이로가 아니시고요?”
-할 일도 있고,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안부 전화 드린 겁니다.”
-살라 조직의 내분만 정리되면 바로 올라갈 거야. 그때 보자고.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핫산과 엘네리가 땀이 범벅된 얼굴로 들어왔다. 바이어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진혁이 얼른 일어나 반겼다.
“고생하셨습니다. 시원한 물이라도 드십시오.”
“고생은요. 오히려 대접받고 왔습니다. 요즘만 같으면 상담하러 갈 만합니다. 조만간 오더도 다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모두 도망치는데 끝까지 남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업체라는 인식이 심어진 모양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봅시다.”
무바라크가 퇴진하자 대피했던 주재원들이 돌아왔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언제든 다시 떠날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알라딘 컴퍼니는 자리를 지키며 오더와 상관없이 꾸준히 연락을 했다.
어디서 어떻게 알려진 것인지 모르지만, 진혁이 두칸의 오더를 끝까지 남아 수행한 것도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런 신뢰는 바이어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시위로 인해 물건 공급을 받지 못해 큰 곤란을 겪었던 시장 상인들도 소문을 듣고 오더를 주기 시작했다.
비록 소량이지만 거래를 시작했다는 게 중요했다.
진혁은 시장의 오더를 카심에게 맡겼다. 이제 그도 독자적으로 일할 때가 됐다.
그사이 가리 사장 측과 재고품 계약이 확정됐다. 모하메드 사장도 신상과 더불어 재고품도 주문했다.
진혁은 기다리는 노준복에게 바로 물건을 실어 보내라고 연락했다.
이 모든 거래가 알라딘 컴퍼니로 진행됐다.
* * *
진혁이 오늘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 외곽의 부촌인 헬리오폴리스를 찾았다.
생명을 구해 준 여자아이, 세스의 아버지인 마제드 대위가 집으로 초대했다.
여러 번 약속을 지키지 못한 터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길을 따라 높게 세워진 벽들이 외부인을 차단하고 있었다. 입구도 보안 요원이 지키고 있었다.
“마제드 대위님을 찾아왔습니다.”
“아, 셰리피 사단장님 댁을 방문하시기로 한 손님이시군요.”
연락을 받았는지 보안 요원이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직접 차로 집까지 태워다 줬다.
길가에 스치는 저택들은 모두 새로 지은 듯 깔끔하면서도 넓었다. 잔디 정원에 수영장까지 갖춰진 곳도 있었다.
카이로 시내의 혼란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한 단독 주택 앞에 마제드 대위가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린 진혁이 마제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입구에 한 여인과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낯이 익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여인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세스, 인사드려야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재빨리 말하고 여인의 뒤에 숨었다.
진혁이 여인에게 꽃다발을 건네준 뒤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나도 고마워, 건강한 모습을 보여 줘서.”
“들어가시지요.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제드 대위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둥근 얼굴에 앞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단단한 체구였다. 미소 띤 얼굴에 중동인 특유의 눈이 들어가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스의 할애비인 셰리피네. 고맙네.”
셰리피가 먼저 다가와 안으며 볼을 맞추는 아랍식 인사를 건넸다.
“아버님은 남부에 계시는데 조만간 카이로로 오실 것 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우리 세스를 구해 준 것도 고맙고, 그런 엄청난 일을 하고도 조용히 떠난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해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억지로 초대했네.”
“아닙니다. 누구나 그런 응급 상황이 닥치면 아이를 구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렇게 떠났던 거야. 하하하하. 일단 안으로 드세.”
안으로 들어가자 10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식탁에 온갖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도 부족해 여자 가정부들이 끓인 음식을 더 내왔다.
“많이 들게.”
“감사히 먹겠습니다.”
다른 가족은 없는지 마제드와 셋이서 먹었다.
처음 보는 진귀한 음식에 진혁이 마제드가 먹는 것을 보고 유심히 따라 했다.
“응급조치는 어디서 배웠나?”
“예비군 훈련에 가서 배웠습니다.”
“한국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입대해야지?”
“북한과 대치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군을 제대하고도 예비군으로 편입되어 훈련을 받습니다. 그때 조교가 가르쳐 준 덕분입니다.”
“그건 배운다고 될 일만은 아니지. 용기가 있어야 해.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좋은 정신력을 가졌네.”
“감사합니다.”
“어서 들게.”
식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한국의 상사원으로 끝까지 혼자 남았다고?”
“제가 맡은 일이 끝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은 잘 끝났나?”
“운이 좋아 무사히 끝냈습니다.”
진혁의 겸손한 답변에 셰리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책임감을 느끼는 것만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세스를 구한 것이나 그 이후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회사에서 포상을 했겠군.”
“그게…….”
“대답하기 곤란한가?”
“아닙니다. 이젠 과거가 된 일입니다. 회사에서는 대피하라고 했습니다만 제가 독단으로 남았습니다. 그걸 문제 삼고 카이로 지사를 폐쇄하기로 결정해서 사표를 냈습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조그마한 무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뛰쳐나온 건가?”
셰리피의 눈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것보다는 제 꿈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했습니다.”
“자네의 꿈은 뭔가?”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겁니다. 회사는 이곳의 혼란을 두려워하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 꿈을 버리고 회사의 지시를 따른다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 겁니다.”
“재미있는 친구군.”
셰리피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거실의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혁의 눈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랐다.
한쪽 벽면이 각종 표창장과 훈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동부에서 기갑사단을 이끌고 국경을 지키고 있네. 이번 정기 인사 때 수도로 오게 될 것 같아 잠시 들른 김에 자네를 보고 싶어 부른 것이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저 같은 평범한 상사원이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래. 자넨 외국인이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잖아.”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혼란한 상황을 겪게 될 겁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지 않나?”
“지금은 시작일 뿐입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쉽게 끝날 상황이 아닙니다.”
“얼마나 걸릴 것이라 예상하나?”
“감히 제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사령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더 걸릴 겁니다.”
셰리피의 눈이 더 날카롭게 변했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나?”
“읽지는 못하지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기 마제드 대위님도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지금의 혼란은 과도기라 그렇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대선을 치러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안정될 것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오산입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출 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뭔가?”
“시민들의 기대는 커졌는데 정부는 그걸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음…….”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냥 일개 외국 상사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흘려들으셨으면 합니다.”
진혁은 이 정도로 오늘의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싶어 뒤에 사족을 달았다. 더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이야기였네. 역시 외국인이라 보는 관점이 다른 것 같아. 자주 찾아와서 좋은 이야기 들려주게.”
“불러 주시면 언제든지 찾아뵙겠습니다만 저도 하는 사업이 있어서 자주는 못 올 것 같습니다.”
진혁은 적당히 거리를 뒀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권력과 친분은 갖되 너무 가까워지지는 말라는 개성상인의 가르침이었다.
잠시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쉬시는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세스를 내려오게 해라. 구해 준 분이 가시는데 인사는 해야지.”
“알겠습니다.”
마제드가 자리를 뜨고 둘만 남자 진혁이 다시 갈등을 했다.
상대의 의중을 모른 채 함부로 떠들 수 없어 말을 아꼈는데, 벽에 걸린 한 장의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
자식 부부가 양옆에 서 있고 셰리피에게 안겨 있는 세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희수 생각이 났다. 저 아이의 웃음도 지켜 주고 싶었다.
결심한 진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