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군부와의 거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야기해 보게.”
셰리피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그는 진혁이 무언가 청탁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접근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진혁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수도에 오시는 게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앞에 나설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발 물러서서 사태를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시민들이 군부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살펴보시고 행동하셨으면 싶습니다.”
“우리 군부는 대통령을 하야케 했네. 그의 측근들을 모두 잡아들여서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이네. 권력도 탐하지 않고 9월 대선을 치러 선출된 대통령에게 군력을 이양한다고 약속까지 했어.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건가?”
“약속은 지켜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그 약속이 지켜지는지 보십시오. 그럼 지금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시게 될 겁니다.”
셰리피가 무언가 다시 물으려 했지만 그때 마제드가 세스를 안고 나타났다.
잠을 자다가 억지로 깼는지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 귀엽게 느껴졌다.
진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세스를 위해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인사를 하고 나오자 미리 연락했는지 보안 요원이 차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을 태운 차가 떠나는 것을 셰리피는 2층 창문의 서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3월 말 카이로의 더위는 한국의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손민한이 김동식과 함께 공항 밖으로 나오자, 카심이 차를 준비시켜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지사장님.”
“오랜만이군, 카심.”
“미스터 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시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김동식이 투덜거렸다.
“이 빌어먹을 곳에 꼭 저까지 와야 합니까?”
“사람은 마무리를 잘해야 해. 아직은 우리 일이야.”
손민한은 지사 폐쇄에 따른 정리 작업을 위해 온 것이다. 며칠 전에 연락을 해서 준비를 시켜 두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췄다.
“무슨 일이야?”
“시위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시위를 해? 무바라크는 물러났잖아.”
“금융 근로자들이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부분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진짜 지긋지긋한 나라네. 내가 다시는 이 나라에 오나 봐라.”
뻔히 카심이 한국말을 알아듣는 줄 아는데도 김동식은 거침없이 이집트를 비난했다. 당연히 차를 출발시킨 카심의 운전이 거칠어졌다.
카이로 지사 사무실은 어제까지만 해도 바이어들이 찾아와 북적댔는데 오늘은 한가했다.
핫산과 엘네리는 물론 소마야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하품을 하던 진혁이 들어오는 손민한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지사장님. 과장님도 오랜만입니다.”
“아주 한가하네.”
“아직 안정이 안 되어서요.”
“그냥 때려치우고 우리랑 같이 가자. 어딘들 여기보다 못하겠냐.”
김동식의 말은 그냥 한 귀로 흘리고 손민한을 바라봤다.
“서류는 모두 준비해 놨습니다. 도장만 찍으면 바로 제출할 수 있습니다.”
“짐들은?”
“모두 박스에 담아서 지하 창고에 쌓아 두었습니다. 나중에 화물로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혼자서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제가 할 일입니다.”
지사장실로 들어가자 진혁이 직접 커피를 타왔다.
“소마야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잘했다. 곧 직장을 잃게 될 텐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서류부터 보자.”
진혁이 꼼꼼히 준비해 특별히 손볼 곳이 없었다.
필요한 곳에 도장을 모두 찍은 손민한이 물었다.
“핫산 사장은?”
“곧 오실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노크 소리와 함께 핫산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손민한이 이곳에 온 이유 중에 하나가 알라딘 컴퍼니와 전략적 파트너에 대한 계약서를 맺기 위해서였다.
계약서에 상호 서명을 하고 교환했다.
“앞으로도 우리 태후를 대신해서 열심히 해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 대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아까운 인재입니다.”
“아, 예. 그러겠습니다.”
핫산이 어색한 웃음을 지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여기 사무실과 집기류를 알라딘 컴퍼니에서 사용했으면 합니다.”
“집기류야 얼마 안 하고 정리하기도 귀찮으니 그냥 사용하시면 될 것 같지만, 여기 임대료가 생각보다 비쌉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왕 하는 것, 제대로 갖춰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건물주만 허락한다면 상관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핫산이 돌아가자 손민한과 김동식이 개인 짐을 쌌다. 그것으로 이곳에서 공식적인 업무는 끝났다.
저녁은 호텔에서 머물기로 하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아쉬운 마음을 나눴다.
그리고 손민한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갔다.
진혁도 카심과 함께 배웅을 나왔다.
“상무님이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믿는다. 너는 잘해낼 거다. 한국에 오면 들러라.”
“조심히 가십시오.”
김동식과도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차에 타자마자 카심이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연극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직은 제가 표면에 드러나면 안 됩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것도 이제 끝났지만.”
사무실로 돌아오자 알라딘 컴퍼니로 가 있던 핫산과 엘네리가 돌아와서 상인들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소마야도 자리에 있었다.
* * *
타흐릴 광장이 다시 피로 얼룩졌다.
임시 최고 권력기관인 군 최고위원회(SCAF)가 치안 안정을 이유로 무력을 사용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지 일주일 만에 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에 시위대는 군 최고 책임자인 파탈라 군 최고위 의장 겸 국방장관이 무바라크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단죄를 미루고, 9월로 예정했던 대선을 연기하는 등 혁명 의지가 의심스럽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
혁명 세력의 칼날이 군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런 외부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진혁은 알라딘 컴퍼니의 공식 활동을 위한 준비를 직원들과 함께 착실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만났다.
“알라딘 컴퍼니의 서진혁입니다.”
“나예프 대령입니다.”
“셰리피 소장님께 연락은 받았습니다.”
동부 기갑사단장인 셰리피 소장은 진혁과의 만남 이후 리비아 내전으로 인한 국경 경비 강화를 핑계로 국방부로의 전근을 미루고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군 최고위원회가 약속과 달리 대선을 연기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국방부로 오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진혁에게 전화해 부관을 보낼 테니 부대에 필요한 생필품을 공급하라고 했었다.
이미 지시를 받은 터라 나예프 대령이 아예 오퍼 시트를 만들어 왔다. 비누와 치약, 칫솔부터 가전제품까지 그 종류가 무려 50여 가지나 됐다.
제품명뿐만 아니라 제조업체까지 적혀 있었고, 그 뒤로 필요한 수량과 가격이 나와 있었는데 진혁은 처음 자신을 눈을 의심했다.
카릴리 시장을 몇 바퀴나 돈 덕분에 생필품 가격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단가가 굉장히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제조업체로부터 직접 구입한다면 절반 가격이면 충분했다.
그중에 통조림 종류는 유달리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혁이 물었다.
“통조림은 두바이의 체프사 제품으로 되어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할랄 인증 제품이기 때문입니다.”
“할랄 인증이요?”
“미스터 서도 알다시피 우리 무슬림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따릅니다. 그건 비단 육류뿐만 아니라 가공된 식품에도 해당됩니다. 가공할 때 율법에 따랐다는 것을 인증해 주는 제도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마크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통조림은 체프사의 제품으로 공급하겠습니다. 나머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진혁이 확답하자 셰리피가 준비한 말을 꺼냈다.
“미스터 서를 만나야 한다기에 한국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한국 속담에 친구 사이에는 콩 한 조각도 똑같이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다더군요. 사단장님께서도 참 좋은 속담이라며 저를 보내신 겁니다.”
“……!”
진혁의 눈에서 이채가 나타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이 정도로 이야기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바보였다. 셰리피는 이익의 반을 원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되자 진혁의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솔직히 세스가 떠올라 폭리를 취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진혁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저 역시 사단장님을 마음의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남자는 친구의 비밀은 반드시 지키라고 배웠다고도 전해 주십시오.”
“그 말씀을 들으시면 사단장님께서도 흡족해하실 겁니다. 그럼 계약을 하시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총 규모 30만 달러로, 납품은 다음 달 말까지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혁은 핫산에게 그 일을 맡기고 자신은 할랄 인증에 대해 알아봤다.
무슬림에게는 목숨만큼 중요한 의미였는데 지금까지 그것을 간과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소마야가 출국할 때마다 화장품을 부탁하며 왜 그렇게 성분을 따졌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 * *
4월이 시작되는 날.
알라딘 컴퍼니가 정식으로 태후물산 전략적 파트너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카이로 지사가 쓰던 사무실로 완전히 옮겼다. 서진혁이 사장이 되었다.
그날 저녁,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며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활기차게 시작한 알라딘 컴퍼니와 달리 일본 원전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원전 1호기에 이어 2, 3, 4호기까지 차례로 폭발을 일으켰다.
IAEA와 국제 사회가 금세기 최악의 원전 사고인 체르노빌 사태로 발전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를 나타냈다.
일본전력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안전을 위해 직원들을 철수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동안 먼저 나서서 문제가 없다고 비호하던 일본 정부가 오히려 반대하고 나섰다.
요시다 총리가 직접 ‘원전에서 직원이 철수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철수한 시점에서 일본전력은 100% 망한다.’라고 일갈하고 가미가제식 수단까지 동원하라며 압박했다.
주식 시장에서는 그걸 일본 정부가 더 이상 일본전력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심리적 저항선이라 여겼던 300엔 마저 무너졌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진혁은 한국으로 출장 갈 계획을 세웠다.
재고품 준비가 끝나 선적 전 검수 작업을 해야 했고, 가는 김에 모하메드 상회의 샘플도 확인할 작정이었다.
그 전에 처리할 일이 있었다.
* * *
-서진혁입니다.
딱 한마디에 더글라스는 얼음이 되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도 나타나지 않던 사람이 먼저 연락을 준 것이다.
-이틀에 걸쳐 공매도 물량을 청산해 주십시오.
“…….”
-듣고 있습니까?
“이틀에 걸쳐 청산. 정확히 들었습니다, 선생님.”
-이틀 후에 뵙죠.
이번에도 진혁이 자기 말만 하고 끊었지만 더글라스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