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43화 (43/307)

43화. 응징

이틀 후, 진혁은 젯다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장을 빠져나오자 더글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정중한 태도였다.

“굳이 이렇게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검은색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 * *B22

얼마 후 JK모건 빌딩에 도착해 최상층의 지점장실로 안내됐다.

“젯다 지점장 스미스입니다.”

“서진혁입니다.”

“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는 천천히 하고, 정산부터 했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앉으시지요.”

스미스가 자리에 앉으며 눈짓을 하자 더글라스가 얼른 서류를 내밀었다.

“평균 매도 가격이 195엔이었습니다. 수수료를 제외하고 순익이 1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에게 맡겨 주셔서 영광입니다.”

스미스의 말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이 건으로 올해의 최고수익률상은 젯다 지점으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익금은 어떻게 처리해 드릴까요?”

“5,000만 달러는 엔 선물에 투자해 주세요.”

“역시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보험 회사들이 지진 피해 보상금 마련 때문에 엔화 확보에 나서 지금은 고평가되고 있지만, 일본 경제의 암울한 상황을 감안하면 곧 떨어질 겁니다. 엔 선물을 매도해 놓겠습니다.”

“제 말씀을 오해한 것 같은데, 매수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저기, 이건 내부 정보라 원래는 알려 드리면 안 되는데…… 조만간 일본 정부에서 환율 방어에 나선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매수해 주십시오.”

딱 잘라 말하는 진혁의 태도에 스미스가 다시 입을 열려다가 얼른 멈췄다.

분명히 모든 시그널이 엔화 가치의 하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다시 말렸어야 했다.

그런데 상대는 최고의 수익을 올린 투자자였다.

그에게 조언하는 게 맞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스미스는 찜찜했지만 받아들였다.

어차피 투자의 결정은 진혁의 몫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일단 그대로 두는 것으로 하죠.”

“감사합니다.”

스미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수익금을 빼 가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용건이 끝나자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왔다.

아마라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손님들도 얼굴에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진혁의 의견을 묻고 스테이크와 와인을 주문한 스미스가 받은 명함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집트에서 사업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조그마한 무역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구 반대편의 일본에서 벌어질 일은 정확히 예측하신 것에 다들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투자 비밀은 묻지 않아야 하는데, 워낙 대단한 일을 하셔서 실언을 했습니다.”

“거창하게 투자 비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시지요.”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와 어색한 분위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서 잠깐씩 이야기를 나눌수록 스미스의 놀라움이 커졌다. 진혁이 세계 경기의 변화를 정확히 집고 있었다.

“역시 운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군요. 저희 쪽 분석실 보고서보다 안목이 더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무역을 하려면 아무래도 세계 경기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진혁이 별게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며 대화가 깊어지는 것을 피했다.

스미스는 전문가였다.

그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며 스미스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일본전력으로 인해 일본 지점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걸 어떻게든 만회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쪽 지점장이 하도 부탁을 해서요.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아직 기간의 여유가 남았는데도 청산을 하신 것은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일본전력은 민영화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소유였다.

시가 총액 기준으로 일본 19위의 견실한 기업이었다. 당연히 모든 펀드에 일정량씩 투자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락인 데다 진혁의 정보를 기다리다가 시기를 놓쳐 매도도 못한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대로 던졌다가는 손실이 확정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진혁의 청산 소식을 활용해 조금이나마 손실을 회복하려는 의도였다.

“지점장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주식은 바닥 밑에 지하가 있고 다시 그 밑에 터널이 있습니다. 지금 바닥을 예단하고 매수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휴……. 결국 손실을 복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군요.”

“이번 원전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터널은 길 겁니다. 박스권 매매를 잘 이용하면 조금이나마 손실은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스미스의 눈이 반짝였다.

박스권 매매는 주가가 횡보할 때 상단과 하단을 설정하여 매도와 매수를 반복하면서 그 차액을 취하는 매매 기법이었다.

이 정도라도 도쿄 지점장에게 빚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미스가 눈치를 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최근 들어 가장 빛나는 투자인데 제대로 알릴 수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원전으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아직도 신음하는데 그걸로 이득을 얻었다는 것을 떠들 수도 없고.”

“저는 괜찮습니다.”

“부담스……. 예? 괜찮으시다구요?”

스미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놀라 되물었다.

주식은 인간의 욕망이 탄생시킨 공식적인 투전판이었다. 특히나 선물은 피 터지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번 놈이 있으면 그만큼 잃은 놈도 있었다. 잃은 놈들은 번 자들을 헐뜯는 것으로 자신의 실패를 위안 삼으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공한 투자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다.

헌데 진혁은 아니었다.

“제가 불법 거래로 부당 이득을 취한 것도 아닌데 감출 이유가 없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대신 제대로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마침 NS통신 특파원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뉴욕포스트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 나온 김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신난 표정으로 전화를 거는 스미스를 바라보는 진혁의 시선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순히 수익금 정산만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번 투자를 결행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스미스의 점심 초대에 응해 부탁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가 먼저 제안해 준 것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호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에게 장신의 백인이 다가왔다.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손에 낡은 수첩을 들고 있는 게 척 봐도 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어서 오게, 조나단. 이야기한 분이시네.”

“서진혁입니다.”

“NS통신의 조나단 기자입니다. 럭키 가이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인사를 하는 조나단의 말은 꼬여 있었다.

주식 투자로 초유의 대박을 터트린 것은 분명 좋은 기사거리였지만, 그게 남의 불행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진혁은 조나단의 불편한 심리를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됐다.

“먼저 한 가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기자는 독자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보니 가끔은 곤란한 질문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불쾌해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 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먼저 1,000%가 넘는 큰 수익을 얻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감부터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뿌듯합니다. 제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 줘서 기쁩니다.”

“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얻으셨으니 당연히 기쁘시겠지요.”

“조나단.”

대놓고 꼬아 말하자 스미스가 불쾌한 얼굴로 주의를 줬다.

“험험, 제가 좀 다혈질이라. 미안합니다.”

“인터뷰나 계속하시지요.”

“세계 증시에는 수많은 주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일본전력이었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나 일본전력에서는 원전은 이상이 없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받으신 겁니까?”

“조나단!”

다시 스미스가 주의를 주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질문이었다. 내부자 정보에 의한 매매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조나단이 다시 사과하려 했지만 진혁의 입이 더 빨랐다.

“정보를 받긴 받았습니다. 발표와 마찬가지로 이상이 없다고들 하더군요.”

“이상한 말이군요. 이상이 없다는 말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니요?”

“일본과 일본인의 속성을 알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들은 2차 세계 대전 때 저지른 만행으로 전범 재판까지 받고도 아직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아, 한국인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진혁은 이번 일을 시작한 이유를 밝힐 때라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이 ‘No’라는 말을 안 하는 것은 알고들 계실 겁니다. 그들과 대화할 때는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과 이번 일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최초 일본의 발표 내용을 주의 깊게 들었어야 합니다. 당시는 핵 비상 경계령이 발효되고 주민 대피령도 발동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법령에 따라 발령한 것일 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냉각수 누수로 인해 연료봉이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일본전력은 ‘냉각 조치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미일 뿐 지금까지 방사능 유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복잡하군요.”

“다 잊고 일본전력의 발표에만 주목하시면 됩니다. ‘냉각 조치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미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냉각 조치에 이상이 생긴 걸 인정한 겁니다. 문제는 그다음 내용입니다. ‘방사능 유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방사능 유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조나단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듣고 보니 진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과에 짜 맞춘 것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걸로 그런 위험한 투자를 감행했다는 걸 이해하기는 힘들군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의심은 들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냥 더 지켜볼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단 1%라도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엄청난 재앙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처참한 모습,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죽음의 땅, 그건 막아야 한다. 이대로 지켜볼 수만 없다. 뭔가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진혁이 이끄는 분위기에 취해 버린 스미스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대사관부터 관련된 곳은 모두 전화를 해서 원전부터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예?”

“저뿐만 아니라 저희 직원들까지 달려들어 수십 군데가 넘는 곳에 원전의 위험성을 알렸습니다. 일본 정부나 언론사는 물론 IAEA, 뉴욕포스트까지.”

꿀꺽.

긴장감에 조나단은 물론 스미스의 목울대가 꿈틀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본전력 본사에까지 전화하게 됐습니다. 사장은 없다면서 비서라는 자가 사실 확인은 해 주지 않고 계속 제 신분을 캐묻더니, 유언비어를 날조하면 법적 조치를 당할 거라며 협박까지 하더군요. 그게 어떨 때 나오는 반응인지 기자라 잘 알지 않습니까?”

당연히 베테랑 기자인 조나단은 이런 반응을 받아 본 경험이 많았다.

책임자 부재, 사실 확인 거부, 신분 확인.

그리고 협박.

죄 지은 놈들이 핵심을 지적당할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오히려 그때 더 확신이 든다.

조나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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